새김덧띠무늬토기

새김덧띠무늬토기

하남 미사리 출토 새김덧띠무늬토기

하남 미사리 출토 새김덧띠무늬토기

일본 야요이시대(彌生時代) 조기(早期)의 표식적인 토기로 알려져 있었으나, 우리나라에는 1990년 하남 미사리 유적의 정식발굴조사를 통해서 최초로 확인되었다. 이 토기는 구연외측에 점토띠를 붙이고, 그 상면에 도구로써 빗금무늬〔斜線文〕 또는 자돌무늬〔刺突文〕 등의 문양을 새긴 것인데, 이러한 문양 대신에 두 손가락으로 점토띠를 어긋나게 비틀어 붙이는 방법도 있다. 이 외 문양이나 손자국이 없는 무문양인 것도 있다.

남한에서의 새김덧띠무늬는 주로 바리모양토기〔鉢形土器〕의 구연부에 장식되지만, 북한지역에서는 바리모양토기외 항아리모양토기〔壺形土器〕에 장식되는데, 구연에서 떨어진 동체부에 또는 경부와 동체부의 경계지점에 또는 동체부에 붙기도 한다. 점토띠의 단면 형태는 삼각형·제형(梯形)·반원형 등이 있다. 일반적으로는 일주(一周)하나, 3∼4개로 분리되어 붙는 것도 있다.

제천 황석리, 진주 상촌리 출토 새김덧띠무늬토기

제천 황석리, 진주 상촌리 출토 새김덧띠무늬토기

남한에서의 출현은 신석기시대 말이지만, 민무늬토기시대〔無文土器時代〕 조기의 표식유물로 인식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토기는 지역에 따라 그 존속시간을 달리하는 것으로 생각되는데, 영남 남부지역은 전기 후반 또는 중기 전반까지 잔존하고 있어서, 다양한 지역상을 띨 것이라고 추측된다. 이 형식의 토기는 현재 강원·전라를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 확인된다. 그 원류는 중국의 동북지역이며 돌칼〔石刀〕·붉은간토기〔丹塗磨硏土器〕·슴베없는돌화살촉〔無莖式石鏃〕·외날도끼〔單刃石斧〕 등을 공반한 농경문화가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 점차 한반도 남으로 확산되었다고 생각된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일본까지 전파되어 농경사회의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고 추정된다.

미사리 유적에서는 돌깐돌두름식〔石床圍石式〕 화덕자리〔爐址〕를 가진 정방형의 집자리〔住居址〕에서만 새김덧띠무늬토기가 출토되었다. 이에 따라 미사리의 집자리와 새김덧띠무늬토기를 일괄하여, 미사리유형(渼沙里類型)으로 분류하는 경향도 있다. 이 토기는 일주하는 형식에서 점토띠가 3∼4개로 분리되는 형식 또는 마디모양덧띠무늬〔節狀突帶文〕 형식으로 변화한다. 이 이후의 덧띠무늬는 문양이 없고 구연직하에 부착되며 단면형태가 횡타원형을 띠는 꼭지모양의 손잡이〔把手〕 형태로 전환된다고 생각된다. (안재호)

참고문헌

  • 東アヅアの稻作農耕(鄭漢德, アヅアからみた古代日本新版, 古代の日本 2, 1992년)
  • 한국 농경사회의 성립(안재호, 한국고고학보 34, 2000년)
  • 무문토기의 성립과 계통(배진성, 영남고고학 32, 2003년)

동의어

돌대문토기(突帶文土器)

참조어

계관형돌대문토기(鷄冠形突帶文土器), 절상돌대문토기(節狀突帶文土器), 각목돌대문토기(刻目突帶文土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