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칼

돌칼

각종 돌칼

각종 돌칼

돌칼〔石刀〕은 곡식의 이삭을 따는 용도의 석기로,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농경도구 가운데 하나이다. 지금까지 조사된 한국 청동기시대 유적에서는 거의 예외 없이 돌칼이 나왔으며 그것도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의 생산활동에서 농업의 비중이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형태가 반달처럼 생겼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반달모양돌칼〔半月形石刀〕이라고 부른다. 반달모양돌칼은 좁은 의미로는 등〔背〕이 곧고 날〔刃〕이 굽은 형태의 돌칼을 뜻하지만, 넓은 의미로는 이삭을 따는 용도의 돌칼 모두를 포함한다. 리야오허(遼河)유역의 신석기문화인 양샤오(仰韶)문화기에 처음 나타난 것으로 한반도 남단에 이르기까지 전역에 걸쳐 분포한다.

돌칼의 분류는 전체적인 형태에 따라 여러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날의 형태에 따라 크게 굽은날〔曲刃〕과 곧은날〔直刃〕로 구분된다. 굽은날에는 물고기모양(魚形)과 배모양(舟形)이 있으며, 곧은날에는 긴네모모양〔長方形〕, 빗모양〔櫛形〕, 사다리모양〔梯形〕, 세모모양〔三角形〕 등이 있다. 한편, 돌칼의 한복판 또는 등쪽으로 약간 치우친 곳에는 구멍이 뚫려 있는데, 2개의 구멍이 가장 일반적인 형태이다. 나머지 대부분은 1개의 구멍이 뚫려 있으며, 3개 내지 4개의 구멍이 확인된 경우도 있다. 날의 형태도 한쪽에만 날을 세운것〔單刃〕과 양쪽을 갈아 만든것〔兩刃〕이 있다. 이러한 돌칼의 여러 가지 형태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동시에, 지역적으로도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먼저, 돌칼의 시기적 변천과정을 보면, 청동기시대의 이른 시기에 긴네모모양, 빗모양, 물고기모양, 배모양, 사다리모양의 돌칼이 사용되었으며, 물고기모양과 배모양이 수확구로서 가장 많이 이용되었다. 이 가운데 배모양은 날부분이 점차 곧게 변하면서 치우친 배모양〔偏舟形〕으로 변화·발전하였다.

상대적으로 늦은 시기에 해당하는 송국리문화단계(松菊里文化段階)가 되면 긴네모모양, 빗모양, 물고기모양은 모두 사용되지 않게 되며, 배모양이 작아지면서 동시에 날부분이 곧게 변한 세모모양이 발생하여 주로 이용된다. 한편, 돌칼의 존속시기를 보면 용연리 유적 출토예 등을 통하여 신석기시대 말기부터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순천 낙수리 유적 13호 원삼국시대(原三國時代) 집자리〔住居址〕의 바닥면에서 출토된 세모모양돌칼에 의해 이 시기까지 사용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돌칼은 초기철기시대에 이르러 철로 만든 반달칼과 낫 등으로 대체되었다.

다음으로 돌칼의 지역적인 차이를 요약하면, 우선 두만강유역과 압록강유역에서는 긴네모모양, 빗모양, 사다리모양 등의 곧은날돌칼을 사용한 반면, 청천·대동강유역에서는 곱은날돌칼인 물고기모양과 배모양이 주로 사용되었다. 팽이모양토기〔角形土器〕문화의 중심지역인 청천·대동강유역에서는 특히 물고기모양과 배모양의 돌칼만이 집중적으로 출토되고 있으며, 구멍의 수는 2개, 날의 형태는 한쪽날로 정착되는 경향이 확인된다. 이러한 양상은 인근의 동한만일대, 한강유역, 영동지역에서 모두 확인되는 현상으로 팽이모양토기문화의 확산과 관련된 것으로 판단된다.

한편, 금강유역에서는 이른 시기에는 물고기모양과 배모양이 주로 사용되다가 송국리문화단계에 이르러 치우친 배모양과 세모모양로 바뀌면서 날부분이 다시 곧은날로 변화한다. 영산강·섬진강유역과 낙동강유역에서도 이와 같은 양상이 확인되는데, 영산강·섬진강유역에서 이른 시기의 유적이 거의 조사되지 않은 반면, 낙동강유역에서는 이른 시기의 유적과 송국리문화단계의 유적이 다수 조사되고 있어 지역간의 차이를 보인다.

이러한 돌칼의 시기적 변화와 지역적 차이를 통하여 청동기시대의 농경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돌칼의 날부분 형태에 따라 농경방식의 차이가 확인된다. 먼저, 청동기시대의 이른 시기에 있어서는 농경에 가장 불리한 기후조건을 가진 한반도 북부지역에서 제작상의 편리함이 우선시되어 곧은날이 널리 사용되었으나, 논농사와 밭농사가 모두 가능한 그 이남의 한반도 전지역에서는 기능상의 장점을 채택하여 곱은날이 주로 사용되었다.

시기적으로 늦은 송국리문화단계가 되면 벼농사의 확산에 따라 제작이 쉬우면서도 사용면적을 넓히는 것이 가능한 세모모양이 고안되어 사용되었다. 특히, 세모모양돌칼은 중심부의 이중 사용을 방지할 수 있으며, 2개의 날을 상호 교대로 사용하기 때문에 훨씬 능률적인 도구라 할 수 있다. 이는 한국의 남한지방과 일본 큐슈(九州)지역에서 유행하였는데, 탄화된 쌀〔炭化米〕과 논유구(水田) 등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볼 때, 벼의 수확용으로 개발된 것으로 생각된다. 일본에서는 야요이시대(彌生時代) 초기에 세모모양과 짧은배모양〔短舟形〕의 돌칼이 발견되는데, 이들 모두는 한반도에서는 가장 늦은 시기의 것이고 남부지방에서 성행한 것으로 일본에의 농경 전파와 관련이 있다고 판단된다.

돌칼의 석재는 크게 두 가지의 다른 목적에 의하여 선택되었다. 첫번째는 제작의 편리함에 의하여 석재를 선택한 경우이다. 쪼개지는 성질이 강한 편암(片岩), 점판암(粘板岩), 혈암(頁岩)은 돌칼의 제작과 부서진 석기를 다시 가공하는 데의 편리함을 위하여 석재로서 이용되었다. 이와 달리 단단한 사암(砂岩)은 돌칼을 오랫동안 사용하기 위하여 선택된 석재이다. 이 밖에 유적 주변에 어떠한 석재가 분포하는가에 따라서도 석재의 선택이 결정된다.

돌칼의 제작공정은 먼저 적당한 석재의 선택→두드려 깨뜨리면서 전체적인 형태 만들기→거칠게 갈아서 표면을 다듬음→구멍뚫기→세밀하게 갈아서 마무리→완성품의 순서로 정리된다. 한편, 이러한 제작공정의 순서와 일치하지 않는 유물도 일부 확인되는데, 특히 구멍뚫기 단계와 세밀하게 가는 단계의 작업 순서가 뒤바뀌는 예가 상당수 출토되고 있다. 이를 통하여 돌칼의 제작이 반드시 일정한 순서로 이루어진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돌칼의 사용방법에 대해서는 최근 사용흔분석(使用痕分析)을 통한 연구가 일본인 학자들을 중심으로 활발히 진행되면서 보다 구체적으로 추정할 수 있게 되었다. 사용흔이란 사용에 의하여 석기에 생긴 물리적이고 화학적인 변화를 일컫는 용어로, 이를 통하여 돌칼의 사용방법이나 피가공물(被加工物)의 성격, 작업량(作業量), 재가공(再加工)의 여부 등을 파악할 수 있다. 아직까지 이러한 분석방법이 보편적으로 이용되지는 않고 있으나, 몇몇 특수한 형태의 돌칼에 대한 사용흔분석이 행하여져 그 기능이나 사용법이 일부 확인되고 있다.

대표적인 형태의 몇몇 돌칼에 대한 사용흔분석 결과, 다음과 같은 돌칼의 사용방법을 추정할 수 있다. 돌칼의 사용은 날부분이 형성되지 않은 면을 위로 향하게 하여 행하여졌으며, 이와 동시에 특정 부위를 집중적으로 사용하였다. 이렇게 집중적인 사용이 행하여진 부분에는 강한 광택면(光澤面)이 형성되며, 그 반대면에도 비교적 약한 광택면이 발생한다. 또, 날부분의 주된 사용부분과 가까운 등부분에서도 비교적 강한 광택면이 관찰되는데, 이는 수확시 날부분에서 꺾여진 피가공물이 등부분과 마찰되는 과정에서 생긴 것으로 판단된다. 이 외에도 손바닥이 닿는 부분에 광택면이 형성된 것도 있으나, 일반적이지는 않다. 그리고 끈을 연결하는 방식은 석도 양쪽의 구멍을 가로질러 반대면으로 이어진 끈을 등부분 방향으로 올려서 오른손 중지에 연결하는 방식이 추정된다.

한편, 끈의 사용과 관련하여 구멍이 4개인 돌칼이 확인되어 주목된다. 북한지역의 심귀리 유적에서는 빗모양, 최근에 조사된 아산 명암리 유적에서는 배모양에 구멍이 4개 뚫린 돌칼이 출토되었다. 두 돌칼 모두 2개의 구멍이 각각 하나의 세트를 이루면서 구멍의 크기나 구멍을 뚫는 방법, 구멍의 위치 등에 있어서 차이가 존재하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따라서 석도에 구멍을 뚫는 행위에 있어서 시간적인 차이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하여 구멍이 4개인 돌칼은 사용시 2개의 구멍에만 끈을 끼우는 방식으로 이용된 것을 알 수 있으며, 끈을 끼우는 구멍을 변화시킴으로써 날부분의 한쪽면만이 집중적인 사용에 의하여 마모됨을 피할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손준호)

참고문헌

  • 한국 반월형석도의 연구(안승모, 서울대학교석사학위논문, 1985년)
  • 한반도 출토 반월형석도의 제분석(손준호, 고려대학교석사학위논문, 2001년)

동의어

석도(石刀)

참조어

반달모양돌칼, 반월형석도(半月形石刀), 삼각형석도(三角形石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