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수리 유적

낙수리 유적

[ 順天 洛水里 遺蹟 ]

지역 순천

전라남도 순천시 송광면 낙수리에 있는 철기시대 집자리유적으로, 1985년 주암(住岩)댐 수몰지구 지표조사에서 확인되었다. 낙수리는 북서에서 남동으로 뻗은 낮은 구릉의 남쪽 경사면에 자리하는데, 유적은 마을의 동쪽 끝에 ‘ㄱ’자형으로 돌출되어 나온 구릉상에 위치한다. 이 구릉의 주변에는 보성강(寶城江)이 ‘U’자형으로 곡류하면서 생긴 비교적 넓은 충적대지가 발달되어 있는데 이곳에서 대규모 집자리군의 존재가 확인된 바 있다.

이 유적은 서울대학교 발굴조사단이 1986년과 1987년 2차례에 걸쳐 발굴조사한 결과 모두 15기에 이르는 철기시대의 집자리를 확인했다. 이들은 역사적으로 삼한시대 내지는 삼국시대에 해당하는 것들로서, 이 유적에서 불과 수 ㎞ 내에 위치하고 있는 대곡리(大谷里) 유적에서 확인된 동시대의 집자리들과 함께 이 지방의 고고학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를 제공했다.

낙수리 집자리들은 풍화암반층을 파고 들어가 조성되었는데, 그 평면형은 말각방형(抹角方形)을 기본으로 장변과 단변의 길이 차가 그리 크지 않은 장방형(長方形), 그리고 이들에서 약간 변형된 형태이다. 집자리의 장축방향은 대개 남-북 또는 북동-남서이고, 크기로 미루어 보아 저장시설로 여겨지는 7·9-1·12호 유구의 경우를 제외하면 그 규모는 4-5×3-4m 정도이며, 평균면적은 16.9㎡이지만 26㎡ 이상인 것도 2기가 있다. 움(竪穴)의 깊이는 최고 1m에 달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아예 한쪽 벽이 유실된 경우도 보이는데, 벽이 유실되어 버린 극단적인 예는 집자리가 축조된 지형상의 특징과 관련된 것으로 여겨진다. 즉 이 같은 상황은 비교적 경사가 심한 곳에 위치한 집자리들에서 나타나는데, 일반적인 경우는 현존하는 집자리 보다도 약간 깊은 30∼40㎝ 정도에 달할 것으로 여겨진다. 바닥은 대개 단단한 생토다짐인데, 일부에서는 점토보강의 흔적도 보인다. 집자리 내부에서 나타난 시설물로는 저장구덩이(貯藏穴), 화덕자리(爐址), 기둥구멍(柱孔), 도랑(屋內溝), 선반(段) 등이 있다.

저장시설은 옥외저장시설과 옥내저장시설로 나뉘어지는데, 옥외저장시설은 다시 집자리에 인접하여 부속시설처럼 배치된 것(9-2호)과 집자리에서 약간 떨어져 단독건물로 설치된 것(7·12호)으로 나뉜다. 반면 옥내저장시설은 집자리의 내부 중심에 위치한 것과 한쪽 벽을 타원형 또는 원형으로 파고 들어가 바닥면을 수평으로 확대하거나 바닥을 수직으로 파고 들어간 경우가 있다.

화덕시설은 2호 집자리에서만 ‘8’자형으로 판 구조물이 확인되었고, 다른 집자리들에서는 바닥의 일부에 불을 피웠던 흔적이 나타나는 정도이다.

도랑의 흔적은 2기의 집자리에서 확인되었는데, 특히 4호 집자리의 경우에는 움의 벽을 따라 너비 10∼15㎝, 깊이 5∼10㎝의 도랑이 돌아가며, 또한 남벽 중앙에서 북서쪽 모서리를 향해서 집자리 바닥을 분할하는 도랑이 돌아간다. 이러한 도랑시설은 한국보다는 일본에서 발견 예가 많은데, 그 기능에 대해서는 아직 명확한 해답을 얻지 못하고 있으나 배수구 또는 움 내부의 기능적인 분할, 특수용도의 시설로 추정하고 있다. 한편, 이러한 도랑시설은 인접한 대곡리 도롱동(道弄洞)에서 조사된 집자리에서도 보이고 있다.

그리고 4·9·15호 집자리에서는 한쪽 벽에서 단(段)이 확인되었는데, 특히 9호의 경우는 남쪽 벽 바닥에서 20㎝ 정도 높이로 너비 40∼50㎝의 단이 설치되었고, 이곳에서 다량의 목탄과 토기가 출토되었다. 이로 보아 9호의 경우, 단시설은 선반 또는 작업대의 기능을 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기둥구멍은 움 내부에 없는 것, 움 내부에만 배치된 것, 움 벽에 따라 배치된 것, 움 안쪽과 주변에 모두 배치된 것 등이 있다. 이들 중 벽 내면에 둘러지는 것이 주종을 이룬다.

낙수리 집자리는 3개의 집자리군으로 묶을 수 있는데, 각 군집마다 비교적 큰 집자리(8·9·13호)가 1기씩 있고 주변에 저장구덩이도 있어, 주거 군집별 생활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낙수리 집자리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은 철편(鐵片) 2점, 삼각형돌칼(三角形石刀) 1점, 숫돌(砥石) 1점, 갈돌(石棒) 1점 외에 각종 토기류가 있다. 유물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토기는 적색·회색연질토기가 주를 이루며 경질토기는 매우 적고, 표면에는 문살무늬가 타날(打捺)되어 있다. 대표적인 기종으로는 둥근밑단지(圓底短頸壺), 쇠뿔잡이(牛角形把手)가 달린 시루, 바리모양(鉢形)토기, 포탄형토기(長卵形壺) 등이 있는데, 특히 포탄형토기는 거의 모든 집자리에서 출토되었는데, 이는 인접한 대곡리 유적에서도 같은 양상을 보인다.

낙수리 유적의 연대를 결정하는 단서는 무엇보다도 토기류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전라남도지방의 토기편년이 아직 정립되지 못하고, 또 이 지역의 토기편년은 이제까지 독널무덤(甕棺墓), 움무덤(土壙墓), 돌방무덤(石室墳) 등 고분중심으로 이루어져 그 적용이 어렵기도 하다. 현재까지의 자료를 볼 때, 낙수리 집자리유적의 연대는 3세기 후반∼4세기 전반을 그 중심연대로 하고 그 상한은 3세기 전반정도로 여겨진다.

마지막으로 이 유적이 갖는 고고학적 의미로는, 첫째 전라남도지방에 있어 최초로 확인된 마한시대 집자리로 전시기(前時期) 집자리와의 비교를 통해 그 변천과정의 실마리를 제공한 점, 둘째, 구릉상에 밀집된 집자리군이 발굴됨으로써 개별유구의 검토에서 벗어나 집자리 상호간의 관계와 공동체의 성격파악을 가능하게 한 점, 셋째, 마한시대의 사회·경제적인 여건을 파악할 수 있는 고고학적 자료를 제공하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상과 같은 고고학적 의미를 가지는 낙수리 유적은 인접한 대곡리 유적과 보성군 문덕면 하죽 유적과 함께 전라남도지방의 철기시대 문화를 파악하는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한다.

참고문헌

  • 洛水里 낙수住居址(崔夢龍 外, 住岩댐 水沒地域文化遺蹟發掘調査報告書Ⅵ, 全南大學校博物館, 1989년)
  • 住岩댐水沒地區地表調査報告書(全南大學校博物館, 198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