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분

고분

[ 古墳 ]

고분(古墳)이란 글자 그대로 옛 무덤을 뜻하기도 하지만, 고고학에서는 개념적으로 엄격히 한정하여 특정 시기의 무덤양식을 지칭한다. 넓은 의미에서 고분이란 과거 사회에서 죽은 이를 위해 수행된 매장의례의 행위가 물질적인 증거로 남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의 고고학 자료를 통해서 볼 때, 죽은 사람을 매장한 증거는 호모사피엔스 단계부터 발견되는데, 죽은 사람을 처리하는 장례법은 지역과 문화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무덤의 양식도 다양하게 나타난다.

세계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매장법은 땅에 무덤구덩이를 파고 시신을 안치한 후 덮어 버리는 간단한 움무덤(土壙墓)이다. 이에 비해 초기문명지역에서는 일반적으로 지배자의 무덤은 거대한 구조물로 되어 있고, 그 안에는 피장자의 시신과 함께 많은 양의 껴묻거리(副葬品)가 안치되고, 때에 따라서는 시종이나 노예들이 순장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①고인돌 ②돌널무덤 ③독널무덤 ④돌덧널무덤 ⑤돌무지무덤

①고인돌 ②돌널무덤 ③독널무덤 ④돌덧널무덤 ⑤돌무지무덤

신석기시대를 거치면서 인간집단과 그 구성원 내에 계급이 분화되고, 청동기시대가 되면 그 양상이 더욱 심화된다. 한 사회 내에서도 그 사회가 진화되고 복잡해질수록 매장의례 역시 다양화되고 고분의 규모나 껴묻거리의 격차도 더욱 커지게 된다. 그래서 다양한 고분은 인간집단들이나 그 구성원들의 지위나 역할과 관련시켜 분석되며, 당시 사회의 관계성과 구조를 연구하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

죽은 이의 매장은 사후세계로 보내는 통과의례이기 때문에 현세의 권력보다 영적인 가치를 중시하는 고등종교가 받아들여지던 시점에서는 고분의 축조가 오히려 축소되기도 하였다. 삼국시대에 가장 융성한 발전을 보인 고분의 구조와 부장양상이 불교의 전래 이후 간소화되는 경향을 보면, 고분문화는 매장에 대한 관념의 변화와 관련시켜 연구할 필요가 있다.

먼저 고분의 구조를 살펴보면, 크게 매장시설(埋葬施設), 봉분(封墳), 묘역시설(墓域施設)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선사시대부터 간단한 매장시설로는 돌널(石棺)이나 나무널(木棺)만을 사용하는 무덤이 축조되며 이후 오랫동안 사용된다. 사회가 분화되고 부장품이 늘어나면서 매장시설도 확대되는데, 그래서 규모가 큰 덧널(木槨)이나 돌덧널(石槨)이 축조되고, 그 안에 다시 널(棺)과 같은 시신 매납 용구를 안치하는 구조가 나타난다. 이후 고구려·백제·신라·가야의 영역에서는 지역에 따라 다르지만 대개 4-5세기가 되면 중국식 묘제의 영향으로 덧널(槨)이 아닌 무덤방(室)을 쌓아 만들게 된다.

무덤방은 기본적으로 추가장(追加葬)을 전제로 한 매장시설이기 때문에 방 안으로 드나들도록 방의 한쪽 벽을 헐 수 있도록 하고 통로를 낸 앞트기식(橫口式)이나 통로를 복도처럼 축조한 굴식(橫穴式)이 된다. 그리고 축조재료에 따라 깬돌(割石)이나 자른돌(切石)을 쌓아 만든 돌방무덤(石室墳)도 있고, 벽돌이나 공심전(空心塼)을 사용한 벽돌무덤(塼築墳) 혹은 공심전무덤(空心塼墓)도 있다. 삼국시대의 고분의 발전은 한마디로 밀폐된 지하식 매장시설인 구덩식(竪穴式)에서 출입이 가능한 굴식(橫穴式)으로의 변화가 일반적이라 할 수 있다.

매장시설이 시신과 껴묻거리를 담는 용기와 같은 것이라면 봉분은 매장시설을 밀봉함과 동시에 그 위치와 외관을 표시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봉분이란 매장시설을 만든 뒤 그것을 포장하는 시설로 이해할 수 있지만 이와는 상반된 경우도 있다. 돌을 쌓아 돌무지를 만들거나 흙으로 일정 규모의 성토부를 미리 조성하고 그 안에 여러 세대에 걸쳐 매장시설을 배치하는 구조의 무덤양식이 있다. 선사시대에 있어서 요동반도(遼東半島) 여대(旅大)지방의 崗上墓, 樓上墓와 같은 돌무지무덤들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한국에서는 삼국시대에 지배자의 권력을 과시하듯이 거대한 규모로 축조된 봉분이 나타난다. 따라서 이 시기의 고분을 ‘고총(高塚)’이라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실은 선사시대에도 무덤의 외형을 나타내주는 시설이나 봉분도 존재하였다. 다만, 선사시대의 돌널무덤(石棺墓)이나 널무덤(木棺墓)의 경우에 봉분이 원래 있었지만 유실되거나 다져져서 지금 남아 있는 것은 거의 없다. 그래서 무덤구덩이 안으로 함몰된 흙의 토층을 파악하여 봉분의 존재를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봉분은 흙으로 쌓는 것(土塚 혹은 土築墳)이 보통이고, 돌을 이용한 것(石塚 혹은 積石塚)도 있다. 특히 봉분을 높게 축조하고 자연 유실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판축(板築)이라는 흙쌓기 방법을 이용하기도 하고, 계단식으로 돌을 쌓아 올리기도 한다.

고구려와 초기 백제지역에서는 돌로 봉분을 축조하는 돌무지무덤(積石塚)이 크게 발전하는 시대가 있었다. 신라의 경우 중심지인 경주지역에서는 돌로서 일정 높이를 쌓고 다시 흙으로 덮은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墓)이 왕묘의 형식으로 유행한다. 한국의 고분에서 봉분의 형태는 타원형이나 원형이 일반적인 편이고, 낙랑이나 고구려지역에서는 방대형이나 계단식 방대형의 외형을 가진 것이 많다. 추가장을 할 수 없는 지하식 매장시설을 가진 경우에 부부합장을 하려면 먼저 축조된 봉분에 또 하나의 봉분을 맞대어 쌍둥이무덤(瓢形墳)을 만든다. 이러한 표주박모양의 봉분은 신라 왕경인 경주를 중심으로 낙동강 동쪽 신라의 영역에서 자주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봉분이 덧붙여진 고분은 고구려 돌무지무덤 중에도 발견되는데 ‘곶묘(串墓)’라고 분류된 무덤형식이 그것이다. 특이한 봉분의 형태로서 장고모양(前方後圓形이라고도 함)과 같은 것도 있는데 한국에서는 주로 전남지방에 분포한다.

묘역시설이란 것은 하나의 매장시설이나 서로 관련된 둘 이상의 매장시설이 점유한 영역을 표시해 주는 시설이다. 봉분의 외연은 일종의 묘역을 나타내 주기도 하지만, 봉분 가장자리에 둘레돌(護石)을 돌리거나 도랑(周溝)을 파서 묘역을 표시하기도 한다. 또한 도랑 안팎에서 제사를 지낸 유구가 발견되기도 하는데, 이러한 외곽시설물을 통틀어 묘역시설로 볼 수 있다.

묘역은 원래 하나의 매장시설을 중심으로 구획되는 것(單葬墓)이라고 예상되지만 여러 개의 매장시설을 한 묘역에 배치하는 경우(多葬墓)도 많다. 특히 여러덧널무덤(多槨式古墳)이라 불리는 것은 5세기 중엽 이후 신라·가야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다.

고분은 단독으로 축조되는 경우도 있지만 일정 공간에 집단화되어 고분군을 형성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고인돌이나 돌덧널무덤, 혹은 움무덤들도 여러 무덤이 모여서 무리를 이루기도 하고 단독으로 존재하는 것도 있다. 특히 돌널움무덤으로 대전 괴정동, 아산 남성리 유적의 예와 같이 단독으로 존재하는 무덤에는 많은 양의 청동기가 출토되어 당시 상당한 세력자의 것임을 알 수 있다. 원삼국시대 이후에는 어떠한 고분도 단독으로 존재하지 않고 무리를 이루어 고분군을 형성하게 된다. 이때부터 고분군은 그것을 축조해 간 집단의 존재와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집단의 성격이 고분군의 양상에 잘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고분군의 지형적 입지, 매장시설의 배치상태, 규모나 껴묻거리의 수준 차에 따라 여러 가지 유형이 존재한다.

선사시대 분묘군은 평야지대나 낮은 구릉 혹은 대지에 분포하고 대규모 군집상을 보이는 경우는 거의 없다. 고분군의 군집이 대규모화되기 시작하는 것은 원삼국시대에 들어오면서부터이다. 삼국시대 이후 고분군의 입지선정과 배치상태는 삼국 제 지역마다, 또는 동일한 지역에서도 고분군 조영집단의 사회적인 신분에 따라서 다양한 유형으로 나뉘어진다. 고구려지역 돌무지무덤의 경우 이른 시기에는 강가에 분포하다가 서서히 낮은 구릉지로 입지를 옮겨 고분군이 형성된다. 백제에 있어서는 공주로 도읍을 옮기면서 왕릉만이 따로 모여 무리를 이루는 특별한 고분군의 존재가 주목을 끌게 되는데 역시 낮은 구릉지에 입지하는 것이 보통이다. 신라·가야지역의 경우 고분군이 대규모로 집단화되기 시작하는 초기 단계에는 평지에 분포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구릉사면으로 고분군의 입지가 옮겨간다.

대체로 대형덧널무덤이 나타나는 3세기 후반 경부터 구릉 정상부를 따라 입지하는 대형무덤들을 중심으로 보다 작은 무덤들이 에워싸듯이 분포하는 독특한 고분배치양상이 전개된다. 이에 비해 신라의 수도인 경주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는 대형무덤이 꽤 늦은 시기까지 평지에 분포하며 고분의 배치에 특별한 정형이 없는 점이 특징이다.

고분에서 출토되는 껴묻거리(副葬品)들은 선사시대로부터 삼국시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종류가 있는데 이들은 종류만큼이나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부장되기 마련이다. 껴묻거리 역시 시대와 지역에 따라서 다르게 나타남은 물론이며 시기가 내려올수록 껴묻거리의 종류가 다양화되고 그 양이 증가한다.

청동기시대 무덤에서는 고인돌(支石墓)이나 돌널무덤(石棺墓)을 막론하고 껴묻거리의 종류는 한 두 점의 붉은간그릇(紅陶)이나 민무늬토기(無文土器)와 간돌검(磨製石劍), 여러 점의 돌화살촉(磨製石鏃)이 부장되고 대롱옥(管玉)이나 굽은옥(曲玉)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비파형동검(琵琶形銅劍)을 비롯한 청동기류가 부장된다. 여기에서 옥과 청동기는 신분을 상징하는 유물로 큰 무덤에만 한정되어 출토되는 경향이 있다.

초기철기시대 지배자무덤에는 세형동검(細形銅劍)을 비롯한 각종 무기류와 청동거울청동방울을 중심으로 한 각종 제의구류 등 청동기유물이 집중되어 있다. 이러한 청동 무기와 의기류는 원삼국시대를 지나면서 철제 무기류로 바뀐다.

삼국시대에 들어오면 껴묻거리의 종류가 훨씬 다양화 될 뿐 아니라 양적으로도 크게 증가하는데 신라의 왕릉급 무덤인 황남대총 남분에서는 30,000여 점의 껴묻거리가 출토된 바 있다. 껴묻거리의 종류와 내용은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등 제 지역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것은 물론이며,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도 달라지는데, 이것은 매장의례의 관념이 시기적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또한 피장자의 신분이나 직업에 따라서도 껴묻거리가 변화를 보이기 때문에 그 양상의 차이를 가지고 피장자의 사회적 지위나 역할을 추론하기도 한다.

삼국시대 고분에서 출토되는 껴묻거리는 우선 피장자의 신변에 소지하는 것, 피장자의 사후세계를 위해 제공되는 것, 그리고 묘지 제사를 위해 공헌되는 것 등 3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로 신변유물은 보통 피장자가 차고 있거나 혹은 널 안에 매납되는 것이 보통이다. 이것은 주로 피장자의 신분을 상징하는 유물로는 관모(冠帽), 신발, 허리띠, 목걸이 및 기타 장신구와 도검류(刀劍類) 등이 있다.

둘째로 사후세계를 위해 제공되는 것은 주로 시신으로부터 조금 떨어진 머리맡이나 발치, 혹은 딸린덧널(副槨)에 매납된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덩이쇠(鐵鋌: 철기를 만드는 중간소재로 보통 신라·가야지역에서는 화폐처럼 사용되기도 하였음)와 같이 시신 혹은 널 밑에 깔아 놓기도 한다. 이런 부류의 유물들은 보통 1점씩 매납하지 않고 복수로 부장되며 상위 신분의 고분일수록 그 양은 큰 폭으로 늘어난다. 여러 다발의 화살(보통 쇠로 된 화살촉만 출토됨)과 투겁창, 갑옷과 투구 등의 무기류, 농공구류, 마구류(馬具類), 그리고 각종 토기나 금속기로 된 용기류 등이 그에 속한다.

셋째로 삼국시대 고분에서 출토되는 유물 중에는 장례시 현장에서 제사를 지내기 위해 공헌되는 유물이 있다. 예를 들면 신라의 돌무지덧널무덤의 봉분에는 봉토를 쌓으면서 제사를 지내고 각종 토기나 마구류를 매납하기도 한다. 그리고 신라·가야지역 무덤도랑(周溝)이나 고분 주위에는 제사 지낸 토기를 깨서 매납하는 것이 그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삼국시대 세 나라는 매장의례의 관념이 서로 달랐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래서 껴묻거리의 내용도 다르게 나타난다. 고구려 고분은 이미 도굴되어 버린 탓도 있겠지만 이 지역에서는 많은 유물을 부장하기 위해 노력하였던 것 같지는 않고 간단한 장신구와 무기 그리고 몇 점의 토기들을 상징적으로 매납한 것이 보통이다. 백제지역도 많은 양의 유물을 껴묻어주지는 않았다. 도굴된 적이 없이 발굴된 무녕왕릉에서 출토된 유물은 매우 화려하고 수준 높은 것들이지만 신라고분처럼 다량은 아니다. 무녕왕릉의 유물들은 기본적으로 신변유물 혹은 피장자의 신분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유물이 대부분이고 사후세계를 위해 용기류, 무기류 등을 다량 매납하지는 않았다.

껴묻거리가 엄청난 양으로 출토되는 고분문화지역은 역시 신라·가야지역이다. 특히 신라고분에서 유물이 다량으로 출토되는 이유 중에는 돌무지덧널무덤이라는 구조 자체가 도굴이 아예 불가능하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유물 중에도 용기류와 무기류, 기타 철기류들을 그 의미에 따라 상징적으로 1-2점씩 부장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무덤에 부장하기 위해 엄청난 양의 유물을 생산하고 매납한 것 같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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