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리 유적

남성리 유적

[ 牙山 南城里 遺蹟 ]

지역 아산

다량의 세형동검시기(細形銅劍時期) 청동기를 부장한 무덤유적으로, 충남 아산시 남성리의 표고 30-40m의 상당히 낮은 구릉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1976년 국립부여박물관 조사당시, 유구(遺構)의 대부분은 파괴되었지만, 잔존한 일부 벽석의 구조로 유구의 성격을 추측할 수 있었다.

돌널(石棺)은 부식암반(腐蝕巖盤)을 파내려 간 무덤구덩이 내에 축조되고 있다. 무덤구덩이(土壙)는 지면에서 아래쪽으로 가면서 서서히 면적이 좁혀진 것으로, 토광 상부의 평면형태는 길이, 너비가 3.1×1.8m의 크기로 부정타원형(不定楕圓形)을 이루고 있다. 돌널은 현지표 2m 아래의 깊이를 바닥으로 하고, 한쪽 면을 비교적 고르게 다듬은, 두께 10㎝정도의 판석상의 깬돌(割石)을 1겹 쌓아서 벽석으로 하였다. 벽석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은 3단으로, 바닥에서 약 70㎝의 높이로 축조되었다.

바닥에는 두께 5㎝ 정도의 판돌(板石)이 깔려 있고, 각 판돌의 사이는 붉은 점토로 채워져 있었다. 돌널 내부의 규모는 길이, 너비, 높이가 2.35×0.5-0.7×1.0m정도이다. 두향(頭向)은 대롱옥(管玉)의 출토위치로 보아 동침(東枕)이고, 이 두향(頭向)으로 보면 널의 평면형태는 이른바 두광족협식(頭廣足挾式)이다. 무덤구덩이(墓壙)는 원래 40㎝ 내외 크기의 돌로 채워져 있음으로 보아, 상부에는 적석(積石)을 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출토유물(방패형동기, 부채모양동도끼, 천하석제식옥)

출토유물(방패형동기, 부채모양동도끼, 천하석제식옥)

출토유물로는 세형동검(細形銅劍) 9점, 방패형동기(防牌形銅器) 1점, 검파형동기(劍把形銅器) 3점, 다뉴조문경(多鈕粗文鏡) 2점, 부채모양동도끼(扇形銅斧) 1점, 동끌(銅鑿) 1점, 천하석제식옥(天河石製飾玉) 1점, 대롱옥(管玉) 103점, 점토띠토기(粘土帶土器) 3개체분, 검은간토기 목긴항아리(黑陶長頸壺) 1개체분과 소량의 칠기(漆器)조각이 나왔다.

동검(銅劍)은 1점 만이 등날이 검신(劍身) 기부(基部)까지 나 있는 윤무병의 Ⅱ식(尹武炳, 韓國靑銅器文化硏究, 藝耕産業社, 1991)이나, 나머지는 등날이 결입부(抉入部)까지만 나 있는 Ⅰ형식인데, 이 중 1점은 봉부편만 전한다. 가장 긴 것은 Ⅰ식으로 길이 37.2㎝이다. 가장 짧은 것 또한 Ⅰ식에 속하는 것인데, 결입부도 희미하고 결입부 이하의 날이 살짝 곡선을 이루어 비파형동검(琵琶形銅劍)에 가까운 고식(古式)임을 보여주고 있다. Ⅱ식검 1점은 길이 29.5㎝로 봉부가 유난히 길고 날의 폭도 매우 좁은 특이한 형식인 바, 전체적으로 황해도 봉산군 송산리(松山里) 출토 세형동검과 비슷하다.

조문경(粗文鏡) 2점은 직경 18㎝로 지금까지 발견된 조문경 중 가장 큰 편에 속한다. 거의 완전한데, 주연부(周緣部) 단면이 반원형에 가깝고, 꼭지 평면이 오목렌즈모양이며, 무늬의 선이 비교적 가늘어 세문경에 가깝다. 거울 뒷면의 문양은 1-2줄의 원형선으로 문양대가 나뉜 2, 3구식으로 세문경에 비해서 선간격이 넓은 성형문(星形文)으로 배치하였다.

방패형동기 1점은 길이 17.6㎝로서 여기 남성리의 예를 제외하면, 대전 괴정동(槐亭洞) 출토품과 傳 대전 출토 농경문(農耕文) 청동기가 2점 전할 뿐인데, 이들과 다른 것은 상단과 하단의 네 귀퉁이 갈래가 사람이 손팔을 벌린 형상으로 크게 뻗어 있다는 점이다. 상부에 나 있는 갈래 끝에는 공모양의 방울이 붙어 있고, 하부의 갈래는 각각 2가닥으로 크게 뻗어 있어 문양과 형태에서 대전 출토품들보다 한층 발전한 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상단에는 같은 간격으로 3개의 구멍이 나있으며, 가장자리를 따라서 평행집선문대(平行集線文帶)가 둘러지고 다시 그 안에 일정한 기하학적 형상의 같은 평행집선무늬가 앞·뒷면에 장식되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 평면 오목렌즈 모양의 꼭지에 원형고리모양의 새끼장식이 매달린 것이 앞면에 1개, 뒷면에는 2개가 부착되어 있다.

검파형동기는 길이 24.5㎝로서 대전 괴정동, 예산 동서리(東西里) 출토 예와 마찬가지로 3점이 한 조를 이루고 전체적인 형상도 동일하다. 마디가 있는 대나무를 세로로 쪼갠 것과 같은 모양으로 다른 출토 예보다 상단의 가장자리 바깥으로 길고도 날카롭게 뻗어 더욱 예리한 느낌을 준다. 상하단의 불룩한 앞면 각각 한가운데에 앞서 방패형동기에서 보이던 원형 새끼고리모양의 장식이 붙어 있으며, 크게 가장자리를 돌아가며 2줄의 평행집선문대가 장식되어 있다. 그 중 1점은 상단의 고리장식 바로 위에 시베리아나 경북 울주 반구대(盤龜臺) 암각화에서 볼 수 있는 수법으로 형상화된 사슴 전신상이 장식되어 있어 특이하다. 동체는 점선으로 반점을 표시하고 꼬리는 아주 짧게 묘사되어 있는데, 동서리 검파형동기에는 손모양이 장식되었다. 움푹한 뒷면에는 동서리 예와 마찬가지로 윗단에는 2개, 아랫단에는 1개의 꼭지가 달려 있다.

청동도끼는 길이 4.4㎝의 소형으로 날이 부채꼴을 이루고, 소케트에 폭이 넓은 1줄의 돌대(突帶)가 있는 형식이며, 동끌은 길이 6.5㎝로 가운데가 빈 긴 막대형식으로 횡단면은 육각형이다.

옥제품은 모두 천하석제로 길이 1-2㎝의 대롱옥 103점과 고리를 반 쪼갠 모양에 구멍이 1개 뚫린 길이 4.1㎝의 굽은옥(曲玉) 1점이 출토되었다.

토기로는 검은간토기 목긴항아리 1점과 점토띠토기 3개체분이 전하는데, 목긴항아리는 동서리 예보다 입 지름이 크고, 높이가 낮은 형식이다. 점토띠토기 1점은 점토띠구연 바로 아래에 작은 돌기가 부착된 형식으로 이와 같은 점토띠토기는 遼寧省 유적에서 동검과 함께 출토되어 비교가 된다.

남성리 유적은 돌무지돌널무덤(積石石棺墓) 또는 돌무지널무덤(積石木棺墓)의 구조를 갖고, 방패형동기, 검파형동기, 다뉴조문경, 천하석제식옥, 점토띠토기, 흑도장경호 등의 유물 갖춤새가 대전 괴정동, 동서리 유적과 매우 흡사하다. 이들은 대체로 같은 집단이 비슷한 시기인 B.C. 3세기대에 남긴 것으로 추정되는데, 유물의 형식으로 보아 동서리보다 이르고 괴정동보다 다소 늦은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 南城里 石棺墓(韓炳三·李健茂, 國立博物館古蹟調査報告 10, 1977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