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토띠토기

점토띠토기

[ 粘土帶土器 ]

점토띠토기. 높이(左) 15.1cm

점토띠토기. 높이(左) 15.1cm

아가리에 점토띠를 붙여 만든 토기로, 초기철기시대에 남한지방에서 유행한 무문토기 후기 형식이다. 대체적으로 전체 모양은 심발형(深鉢形)을 이루고 있는데, 간혹 호형(壺形)토기에도 점토띠구연(口緣)토기가 있다.

점토띠토기가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61년 한강변의 양주 수석리(水石里) 유적 발굴조사를 통해서이다. 그리고 1967년 대전시 괴정동(塊亭洞)의 돌덧널무덤(土壙石槨墓) 유적에서 세형동검(細形銅劍)과 조문경(粗文鏡) 등의 청동기, 그리고 흑도장경호(黑陶長頸壺)와 함께 심발형(深鉢形)의 점토띠토기가 출토됨으로써 이 토기가 세형동검시기에 속하는 무문토기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점토띠토기는 크게 2가지 세부형식으로 분류될 수 있는데, 그것은 점토띠의 단면형태를 기준으로 해서이다. 첫째는 단면형태가 원형에 가까운 형식으로 앞서 수석리와 대구 연암산(燕岩山) 유적에서 출토한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다른 하나는 그 단면형태가 삼각형에 가까운 것으로 해남 군곡리(郡谷里)와 사천시 늑도(勒島) 유적의 예가 대표적이다.

이들 유적의 지명을 따서 점토띠토기는 전기의 수석리-연암산식토기군과 후기의 군곡리-늑도식 토기군으로 나누어 살필 수 있다. 수석리-연암산식 토기군은 다시 원형 점토띠 구연의 심발형토기와 고리형 손잡이의 호형토기를 표식으로 하는 수석리식 토기군, 원형점토띠구연의 토기와 쇠뿔모양(牛角形) 손잡이의 호형토기를 표식으로 하는 교성리식(交成里式)토기군, 그리고 원형 및 삼각형 등의 점토띠 구연의 심발형토기에 쇠뿔모양, 나팔모양 굽의 고배(高杯)를 표식으로 하는 연암산식 토기군 등으로 세분될 수 있다.

석기로는 홈자귀(有溝手斧)와 삼각형돌칼, 그리고 삼각 편평식의 석촉이 대표적이나, 삼각만입(三角灣入)석촉, 반월형돌칼, 그리고 대패날, 턱자귀(有段手斧), 단인주상석부(單刃柱狀石斧)와 양인석부(兩刃石斧)도 일부 공반된다.

군곡리-늑도 토기군은 조질(粗質)토기로 심발형(深鉢形)과 호형(壺形), 고배형(高杯形), 높은 굽의 발형(鉢形), 시루형, 뚜껑형 및 소형토기가 있다. 심발형과 발형에 ‘〈’자형으로 꺽인 구연(口緣)에 삼각 단면의 점토띠가 붙은 것이 대부분이며, 호형토기에는 쇠뿔모양, 혹은 꼭지모양 손잡이가 성행한다. 마연토기로 흑색 및 적색이 있으며, 기형으로는 장경호, 고배 등이 있다.

석기로는 턱자귀(有段手斧), 양인석부(兩刃石斧), 석촉(石鏃), 돌칼(石刀), 돌낫(石鎌) 등이 소량 공반된다. 단면 삼각형의 점토띠토기가 출토하는 무덤 유적으로는 창원 다호리(茶戶里)의 예가 있는데, 여기서는 후기형 세형동검과 함께 다량의 한식(漢式) 철기와 한대 화폐 그리고 한식거울(漢鏡)이 출토되었다.

점토띠토기가 출토되는 유적을 구체적으로 살피면 주거지, 돌덧널무덤(土壙石槨墓), 그리고 조개무지(貝塚) 유적을 들 수 있다. 우선 주거지로서 주목되는 것은 교성리 유적이 있다. 이는 서해안 가의 해발 188m의 높은 산 정상에 있는 고지성(高地性) 취락지로서 바닥을 ‘ㄱ’자형으로 파낸 반움주거지가 10여 기 확인되었다. 이러한 고지성 취락이 결국 방어적(防禦的) 성격을 띠는 것이므로, 전에 없던 당시 사회의 외부적 불안을 말해주는 것이 되겠다.

점토띠토기가 부장된 무덤은 돌덧널무덤(土壙石槨墓)으로서 다량의 세형동검 관계 청동기가 부장 되는 것이다. 괴정동이나 남성리(南城里)의 경우, 세형동검, 조문경(粗文鏡)을 비롯해서 각종 의기(儀器)가 부장(副葬)되는데, 이를 통해 제사장적(祭司長的) 성격을 가진 군장(君長)이 출현하였음을 알 수가 있다. 또한 삼천포 늑도와 광주 신창동(新昌洞)에서는 점토띠토기로 소형 옹관(甕棺)을 만든 예가 출토되고 있는데, 이는 대체로 유아용 옹관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러한 유적 유물갖춤새의 총체적인 변천과정을 살필 때 점토띠토기는 원형점토띠토기에서 삼각형점토띠토기로 변천하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그 지리적 분포범위도 한반도 충남과 경기도를 중심으로 한 중부지방에서 점차 전남과 경남의 남해안지방으로 옮겨가는 것이 확인된다. 점토띠토기는 세형동검문화와 함께 일본 구주(九州)지방으로까지 확대된다.

점토띠토기의 기원에 대해서는 2가지 측면에서의 설명이 있다. 그 하나는 평양 남경(南京) 유적의 후기 주거지에서 출토하는 말기 팽이형토기(角形土器)에서 보는 것처럼 겹아가리(二重口緣)의 신흥동식토기(新興洞式土器)에서 기원을 찾는 견해이다. 다른 하나는 요녕성(遼寧省)의 二道河子 움무덤 등에서 출토하는 이중구연토기에서 찾는 견해이다. 二道河子 등의 요동반도(遼東半島) 유적에서는 남한지방의 점토띠토기와 공반하는 흑색마연장경호는 물론 세형동검과 관계 있는 후기 비파형동검 또는 二道河子式의 초기 세형동검이 출토된다.

이와 같은 점토띠토기의 기원형식과 관련하여 볼 때, 남한지방 점토띠토기의 상한연대는 B.C. 4~5세기경으로 추정되며, 하한(下限)은 한반도 남해안 지방의 창원 다호리(茶戶里) 등지에서 전한시대(前漢時代) 화폐와 거울이 출토하는 것으로 보아 기원전후한 시기로 이해된다.

참고문헌

  • 圓形粘土帶土器文化硏究-湖西 및 湖南地方을 中心으로-(朴辰一, 釜山大學校 碩士學位論文, 2000년)
  • 韓國의 先·原史土器(國立中央博物館, 1993년)
  • 韓國 原三國文化의 硏究-全南地方을 中心으로(崔盛洛, 學硏文化社, 1993년)
  • 保寧 校成里 집자리 發掘調査 中間報告書(國立扶餘博物館, 1987년)
  • 粘土帶土器 文化性格의 一考察(韓相仁, 서울大學校 碩士學位論文, 198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