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개무지

조개무지

고고학에서 조개무지〔貝塚〕란 옛사람들이 먹고 버린 조개의 껍질〔貝殼〕이 쌓인 곳을 말한다. 이 안에는 조개껍질 뿐만 아니라 물고기뼈나 짐승뼈 등 당시 사람들이 먹은 뒤 버린 온갖 자연유물과, 부러진 바늘〔針〕이나 용도 폐기된 작살〔鋸〕, 낚시〔約針〕 등 살림살이 가운데 못 쓰게된 것들도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것들이 더미를 이루어 쌓이게 된 것이므로 조개무지라는 명칭이 생겨났다.

그러나 조개무지 연구가 발달한 오늘날에는 조개무지의 기능을 반드시 폐기장(廢棄場)으로만 보지 않는다. 조개무지란 많은 수의 사람들이 연속적으로 행위를 한 장소라기 보다는 소수의 사람들이 간헐적으로 찾던 곳이며, 버린 물질들이 쌓이고 삭평되기를 반복한 장소이기 때문에 후대의 사람들이 이 곳 위에 집〔住居址〕을 짓기도 하고 무덤을 쓰기도 하며 그 위에 다시 조개무지가 쌓이기도 하는 것이다. 때로는 가금류의 보금자리로서 2차적으로 쓰인 예까지 있다. 따라서 조개무지의 발굴은 퇴적이 헐거운 점을 주의해야 하고, 문화유물과 자연유물의 분석이 중요하며 당시의 환경과 해안가의 변화상을 복원해주어야 한다는 점 등에서 흥미있으면서도 매우 어려운 작업이다.

조개무지는 후기 구석기시대에도 드물게 나타나지만, 전세계적으로 사람들이 바다자원을 일상적인 식량자원으로 먹기 시작한 무렵은 신석기시대이며 이때부터 조개무지가 집중적으로 만들어졌다. 청동기시대에 들어가서도 조개무지는 계속 나타난다. 다만 전신세 중기-후기로 오면서 전세계적으로 집약적인 조개따기 활동은 점차 중지되었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언급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청동기시대의 조개무지로 대표적인 예로는 라선 초도와 태안 고남리, 군산 비응도동, 제주 상모리 조개무지가 있다. 초도는 라진만 앞바다에 있는 지름 9.5㎞ 정도의 섬인데 이곳에서 장방형 집자리와 석기, 뼈연장〔骨器〕, 토기와 함께 특기할 것으로 청동방울〔銅鈴〕과 청동의 원판형동기가 출토되었다. 유물들로 보건대 이 근처에서 농사짓기, 물고기잡이, 사냥활동이 모두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고 치레걸이〔裝身具〕와 뼈숟갈〔骨匕〕 및 바늘통, 붉은간토기〔丹塗磨硏土器〕와 채색토기(彩色土器) 등에서 정교하고 다양한 유물 제작솜씨를 볼 수 있다.

위신재(威信財)에 속하는 청동유물의 출현은 당시의 사회관계 연구에 일조할 것으로 보인다. 자연유물의 출토 또한 풍부하며 사람뼈〔人骨〕 14개체가 찾아졌다. 초도 유적은 청동기시대의 생업과 사회관계를 엿볼 수 있는 보고이므로 장차 심도있는 분석과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고남리 유적은 바다 가까이의 작은 구릉지 경사면에 있으며 야외불뗀자리〔野外爐址〕와 할석 산포지 등이 발견되었다. 특기할 것은 신석기시대의 문화층 위에 청동기시대 조개무지가 있어 두 시기의 연속성을 시사한다는 점이다. 유물로는 농경도구를 비롯한 각종 석기, 붉은색 및 검은간토기류, 탄화된 볍씨, 사냥채집활동을 보여주는 자연유물 등이 매우 많다. 유적의 탄소연대는 청동기시대 문화층이 기원전 9∼5세기, 신석기시대 문화층이 기원전 15세기 경으로 측정되었다.

비응도동 유적은 섬의 구릉사면에 있으며 집자리, 야외불뗀자리, 돌화살촉 등이 발견되었다. 이 유적은 신석기 문화층, 청동기시대 문화층이 연속적인 층위를 이루지 않고 지점을 달리하여 형성되었다. 외반구연의 송국리식토기가 주를 이루며 방사성탄소연대는 청동기문화층이 기원전 8~4세기, 신석기시대 문화층이 기원전 30~15세기 경으로 측정되었다.

상모리 유적은 남제주 대정읍 바닷가에 있는 생활유적이다. 기원전 6세기∼3세기에 걸친 시기에 형성된 제주도 민무늬토기〔無文土器〕 유적의 하나이며 집자리로 추정되는 유구와 토기, 석기 등 많은 유물이 발굴되었다. 토기 형식은 중부지역의 흔암리식토기(欣岩里式土器)와 같다.

조개무지 유적은 당시의 환경변화와 직접 관계되는 많은 자료를 갖고 있다. 우선 조개무지의 분포나 범위가 해안가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에서 당시의 해안선을 추정할 수 있으며 출토되는 조개, 물고기, 동물화석을 통해 당시의 기후, 자연환경을 복원해 볼 수 있다. 자연유물과 함께, 가끔 탄화된 곡물도 출토됨에 따라 당시의 생업에 대한 직접적인 자료를 제공한다. 집자리〔住居址〕와 무덤 등이 공존하며 여기에 뼈로 만든 예술품 등도 잘 보존되어 있어 당시의 정신세계에 대한 연구를 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조개무지가 우리나라를 포함하여 전세계적으로 청동기시대에 급격히 줄어든다. 우리나라에서는 청동기시대에 생업이 주로 농경으로 바뀌면서 어업도 내수 위주로 전환했을 것이라는 가설이 나오고 있지만 고남리나 초도의 예를 보자면 그 곳 주민들은 신석기시대에 이어 농사짓기와 어업, 사냥 채집 등을 포함한 다양한 생업에 종사했다고 여겨진다. 조개따기의 단절에 대해 활용전략의 변화, 남녀사이의 관계변화, 전승되어오는 지식과 상징의 변화, 주거유형의 크기와 타입의 변화 등을 시사한다는 포괄적인 견해도 있으나, 이와 아울러 신석기-청동기 무렵의 환경변화에 대한 이해와 연구도 매우 필요할 것으로 여겨진다. 최근 서해안의 도서지방에서 청동기시대의 조개무지들이 자주 발견되는 바 이들에 대한 심도있는 조사와 분석이 조개무지 연구를 진전시킬 것으로 전망된다. (신숙정)

참고문헌

  • 라진 초도 원시유적 발굴보고(도유호·정백운, 유적발굴보고 1집, 1955년)
  • 안면도고남리패총 1∼8차 발굴조사보고서(한양대학교박물관, 1988년 ∼ 1998년)
  • 상모리 유적(제주대학교박물관, 1990년)

동의어

패총(貝塚), 조개더미, 조개무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