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레걸이

치레걸이

[ 裝身具 ]

신체나 의복에 붙여 장식을 하거나 신분의 상징성을 나타내기 위해서 만들어진 도구의 총칭을 말한다. 그러나 치레걸이는 정신적인 면이 강하므로 다른 이유 때문에 신체에 붙였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치레걸이는 신체에 붙는 위치에 따라 명칭을 달리하는데 머리장식(髮飾), 귀고리(耳飾), 목걸이(頸飾), 가슴걸이(胸飾), 팔찌(腕飾), 반지(指輪), 허리장식(腰飾), 족륜(足輪) 등이 있다. 이것들은 착장방법(着裝方法)에 의해서 단식(單式)과 조합식(組合式)으로 구별되는데 일반적으로 발식(髮飾), 귀고리(耳飾), 팔찌(腕飾), 반지(指輪) 등은 단식(單式)이고, 목걸이(頸飾), 가슴걸이(胸飾), 허리장식(腰飾), 족륜(足輪) 등은 조합식(組合式)이다.

치레걸이는 중국의 周口店 유적에서 여러 가지 수식(垂飾)을 늘어뜨린 목걸이가 발견된 것처럼 구석기시대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한국의 구석기시대 유적에서는 치레걸이가 출토된 예를 볼 수 없고, 신석기시대 이래로 나타난다.

신석기시대 치레걸이는 목걸이, 귀고리, 팔찌, 족륜 등이 있고 치레걸이의 형태에 따라 대롱옥(管玉), 구슬 등이 있다. 이들 치레걸이의 재료는 짐승의 치아(齒牙)나 뼈, 조류(鳥類)의 뼈, 어골(魚骨), 대리석, 조개, 토제(土製), 석제(石製) 등이 있다.

목걸이와 가슴걸이는 치레걸이를 끈에 꿰어 목에 거는 공통성이 있으므로 구별하기가 어렵다. 특히 주거지나 패총 등과 같은 생활유적에서 출토되었을 때는 구별이 불가능하지만, 무덤의 발굴조사시 출토되는 지점에 따라서 구별할 수 있다. 범방 패총의 소아용 무덤에서 출토된 골도(骨刀)는 소아의 가슴 주변에서 출토되어 가슴걸이로 추정된다. 이들 목걸이와 가슴걸이의 재질은 조골(鳥骨), 각(角), 치아(齒牙) 등이다. 조골은 동삼동 패총에서 출토되었고 각과 치아는 서포항 유적에서 출토되었다. 서포항 유적의 치아 치레걸이는 멧돼지의 견치이다.

귀고리는 귀를 뚫어 끼우거나 거는 형태로 구별되는데 한국에서 출토된 것은 귀에 끼우는 형태이고, 재질은 상어 척추뼈와 토제품이 있다. 상어 척추뼈로 만들어진 귀고리는 농포동 패총, 동삼동 패총, 송도 패총 등에서 출토되었다. 또 토제품은 울주 신암리(新岩里) 유적에서 출토된 것이 있다. 이것은 평면형태가 원형(圓形)이고 표면에 와문(渦文)이 시문되어 있는 점으로 미루어 일본 죠몽시대(繩文時代)에 유행하였던 이전(耳栓)과 유사하다.

팔찌는 한반도에서 흔하게 보이는 치레걸이로, 동북지방과 남해안지방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된다. 재질은 패각과 석제가 있는데 대부분은 패각이다. 패각의 종류는 투박조개, 피조개, 삿갓조개 등인데 투박조개가 가장 대부분을 차지한다. 통영시 상노대도 산등 패총에서는 여성인골의 좌측 팔목에 패각으로 만들어진 4개의 팔찌가 착장된 채로 출토되어 패륜의 용도가 명확히 밝혀졌다. 한편 석제 팔찌는 서포항 유적과 금탄리 유적에서 출토되었다. 서포항 패총에서 출토된 팔찌는 반원형의 형태를 띠며 한쪽 끝 편에 구멍이 뚫려 있는 점으로 미루어 2개를 연결해서 사용한 것 같다. 또 금탄리 유적의 팔찌는 곱돌로 제작된 파손품이다.

족륜은 통영군 연대도 패총 7호묘의 인골에서 살펴볼 수 있다. 인골의 주인공은 장년 남성으로 치레걸이는 양 발목에서 약간 떨어진 부분에서 출토되었다. 출토상태는 왼발에 32점, 오른쪽 발에 40점, 오른쪽 발 아래에서 48점이 출토되었다. 이 3세트는 각 돌고래, 수달, 너구리의 치아로 만들어졌다.

청동기시대의 치레걸이는 목걸이나 가슴걸이 등이 있는데 그 형태에 따라 굽은옥(曲玉), 대롱옥, 구슬 등으로 구별된다. 이들 치레걸이의 재료는 짐승의 치아, 패각(貝殼), 천하석(天河石), 벽옥(碧玉), 유리(琉璃) 등이 있다. 짐승의 치아(齒牙), 패각 등은 패총에서 출토되고, 천하석, 벽옥, 유리 등은 고인돌이나 돌널무덤에서 출토된다.

귀고리는 청도 사촌리 유적에서 수습된 것으로 거는 형태이다. 이것은 편평한 환상(環狀)의 백색 옥제품으로 중앙의 약간 위쪽에 구멍이 뚫려 있고, 이 구멍에서 외연(外緣)에 이르는 부분이 끊겨져 있다. 이러한 형태의 귀고리는 중국의 신석기시대 유적과 일본의 죠몽(繩文)시대 유적에서 많이 출토되는데 결상이식(결狀耳飾)으로 부른다.

이외의 치레걸이는 대부분이 목걸이나 가슴걸이로 추측되는데 서포항 패총에서 멧돼지 견치, 고남리 패총에서는 패각제로 만든 것이 출토되었다. 이와는 달리 전남 남해안지방의 고인돌에서는 많은 양의 옥들이 출토되었다. 여수 평여동 다군 2호 지석묘에서는 천하석제 굽은옥 2점, 벽옥제의 대롱옥 29점, 천하석제의 구슬 253점이 출토되었다. 이들 치레걸이는 석실의 중앙부에서 동쪽편에 치우친 점으로 보아 가슴부근까지 내려오는 가슴걸이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 3호에서는 구슬 2점, 대롱옥 136점이 출토되어 2호 출토품과는 차이가 있다. 이처럼 같은 지역의 치레걸이라 할지라도 개인차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철기시대의 치레걸이는 발식, 목걸이, 귀고리, 팔찌, 족륜 등이 있고 치레걸이의 형태는 정형화된 굽은옥, 6면체로 정교히 다듬은 절자옥(切子玉), 주산알 모양의 옥과 소형옥이 있다. 그리고 토제곡옥, 토제소옥, 아제곡옥, 패제관옥, 골제뒤꽂이 등이 있으며 재질은 수정제, 벽옥제, 유리제, 토제, 패각제, 골각제 등이 있다.

머리장식은 이 시기에 처음 등장하는 치레걸이로 해남 군곡리 패총과 마산 외동 성산 패총에서 출토되었으며 재질은 사슴의 뿔이다. 군곡리 패총 출토품은 얇은 판상으로 복수(複數)의 발을 가지고 있으며 음각의 기하학문이 시문되어 있다.

목걸이나 가슴걸이는 토제곡옥, 절자옥, 주산알 모양의 옥과 소형옥, 아제곡옥, 패각제관옥 등이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것들은 남해안지방의 패총에서 많이 출토되는데 유리제의 소형옥은 군곡리 패총에서 유리틀과 함께 상당량이 출토되었다. 이 시기에 해당하는 중국의 사서인 『삼국지(三國志)』 〈위서동이전(魏書東夷傳)〉에 ‘以纓珠爲財寶. 或以綴衣爲飾. 或以縣頸垂飾 …’, 또 『진서(晉書)』에 ‘以貴纓珠. 用以綴衣. 或飾髮垂耳 …’이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당시 치레걸이의 이용을 알 수 있다.

패제관옥은 군곡리 패총에서만 출토되는데 피뿔고둥의 각주를 연마하여 길게 구멍을 뚫은 것이다. 팔찌는 패각제가 있는데 군곡리 패총에서 피조개와 삿갓조개로 만든 것이 출토되었다.

치레걸이가 본격적으로 세트가 갖추어지는 것은 삼국시대로 볼 수 있다. 삼국시대의 치레걸이는 머리에 쓰는 관모(冠帽), 귀에 다는 귀고리(耳飾), 목이나 목에서 가슴까지 거는 목걸이(頸·胸飾), 손가락에 끼우는 반지(指環), 팔목에 차는 팔찌(釧), 허리를 두르는 허리띠장식(帶金具와 腰佩), 발에 신는 신발(飾履)이 주요 구성요소이다.

참고문헌

  • 三國時代 耳飾과 帶金具의 分類와 編年(李漢祥, 三國時代 裝身具와 社會相, 1999년)
  • 考古資料를 통해 본 우리 나라 古代의 冠(咸舜燮, 三國時代 裝身具와 社會相, 1999년)
  • 羽毛附冠飾의 始末(申大坤, 考古學誌 8, 1997년)
  • 高句麗考古學硏究(東潮, 1997년)
  • 신라와 가야의 裝身具(李仁淑, 韓國古代史論叢 3, 1992년)
  • 한국사론 15-한국의 고고학Ⅲ(국사편찬위원회, 1985년)
  • 裝身具(윤세영, 한국사론 15, 국사편찬위원회, 198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