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탄리 유적

금탄리 유적

[ 平壤 金灘里 遺蹟 ]

지역 평양
신석기문화층 출토 토기

신석기문화층 출토 토기

평양시 사동구역 금탄리에 있는 신석기·청동기시대 야외유적이다. 1954년 물질문화사 연구소에서 대동강안 일대의 원시유적을 답사하는 과정 중 알려졌으며, 1955년 고고학 및 민속학 연구소에서 발굴하였다. 유적은 대동강 중류의 한 지류인 남강이 대동강과 합류하는 지점에서 남강 좌안(左岸)을 따라 약 1.6㎞ 올라온 곳의 하안단구(河岸段丘)에 있다. 이곳 부근에는 원래 미림리, 청호리, 남경 등 일찍부터 알려진 많은 유적들이 있어 선사시대 사람들이 밀집하여 살았다고 여겨지는 곳이다.

유적의 층위에 대해 보고자들은 퇴적 층위와 집자리 및 출토유물들을 대비하여 신석기·청동기문화층을 구분하였으나 층위 자체를 명료하게 밝혀내지는 못하였다. 홍수로 인한 강물의 침식과 후대의 경작에 의한 교란현상, 그리고 발굴 당시에는 한반도 청동기시대의 문화상과 특징에 대한 개념이 없었기 때문이다. 신석기시대 집자리는 지표 아래 1.5m 정도에서 나오는 7호 집자리가 가장 이른 1문화층에 속한다. 제2문화층에 속하는 것이 5·9·10·11호 집자리이다. 청동기시대층에 속하는 팽이그릇 문화층에는 1·2·3·8호의 4개 집자리가 있다.

청동기문화층 출토 석검. 길이 8.0cm

청동기문화층 출토 석검. 길이 8.0cm

신석기문화층 출토 청동끌. 길이 5.6cm

신석기문화층 출토 청동끌. 길이 5.6cm

제1문화층의 7호 집자리는 너비 4m 정도의 장방형(長方形) 움집이며, 바닥에는 진흙을 다졌다. 기둥구멍(柱孔) 및 특별한 시설은 없으나 북쪽에는 화덕자리(爐址)가 있고 남쪽에는 도구를 만들던 흔적이 남아 있어 집안 내의 공간분할이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조갯날 도끼(合刃石斧), 버들잎형 화살촉(柳葉形鏃), 그물추(漁網錘), 숫돌(砥石), 삽, 토기 등이 나왔다.

특히 삽은 백운석제이며, 길이 18㎝의 신바닥 모양으로 지탑리의 삽(19.3㎝)과 비교된다. 토기는 바탕흙에 활석(滑石)을 혼입했으며, 줄무늬·톱니무늬·생선뼈무늬·삼각집선문(三角集線文)들이 주로 나오는데, 이들은 궁산과 지탑리의 무늬양식에 새로운 모티프가 첨가된 것으로써 논자에 따라 서해안지방에서도 독자적인 지역권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제2문화층의 집자리들은 한 변이 4.5-5.5m 정도 되는 네모꼴(方形)이 대부분이지만 11호 집자리는 장축, 단축이 7.4×4.1m의 특별히 긴네모꼴(長方形)이다. 집 중앙에는 강돌(川石)을 여러 개 잇대어 둘러놓아 만든 화덕자리(爐址)가 있고, 토기를 거꾸로 박아놓고 쓰던 저장구덩이(貯藏穴)가 있는데 이는 궁산이나 지탑리 유적에서 자주 보이던 현상이다.

11호 집자리는 규모나 짜임새가 독특한 편이다. 이 집은 제2문화층의 다른 집들보다 훨씬 더 내려간 지표 아래 2m 깊이에 놓여 있었고, 집자리 중앙에서 약간 북쪽으로는 가로, 세로, 깊이가 2.4×0.9×0.8m 규모의 구덩이가 나왔다. 구덩이 네 벽은 진흙으로 발랐고 벽 및 바닥 일부에 돌을 깔아놓았다. 큰 구덩이의 약간 북쪽으로 1.0×0.8m 정도의 구덩이가 있으며, 그밖에 크고 작은 구멍 수십 개가 조사되었다. 이 구멍들은 기둥구멍이나 밑이 뾰족한 토기들을 놓던 자리라고 생각되었다. 이로 보아 정상적인 살림터가 아니며 공공 목적에 이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주변 집들의 크기보다 훨씬 크며 집안에 다시 깊고 커다란 움이 있는 것은 암사동 유적 및 평양시 남경 31호 집자리와도 유사하다. 즉 신석기시대 서해중부지방의 대동강-한강 유역에 퍼져있었던 공통의 시설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제2문화층에서는 석기와 토기 등 매우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석기는 벌들잎형의 돌화살촉(柳葉形石鏃), 돌도끼(石斧), 자귀(手斧)와 함께 함북지방에서 흔히 발견되는 곰배괭이(11호 집자리), 갈돌(石棒), 숫돌(砥石) 등이 있다. 그물추는 한집에서 몇 백 개씩 나올 만큼 풍부한데, 9호 집자리에서는 600여 개가 한 곳에서 무더기로 나와 이 지역에 살던 사람들에게 물고기잡이가 중요한 생업이었음을 보여준다. 토기는 목긴 단지(長頸壺)와 함께 손잡이(把手)가 많이 나온다. 2문화층의 토기들은 둥근밑(圓底)이라고 하더라도 암사동, 지탑리의 것과는 다르며, 입술끝이 약간 바라졌다. 납작밑토기(平底土器)는 밋밋하게 올라가거나 축약(縮約)되어 올라가는 것의 2가지가 있다.

한편 이층에서는 민무늬토기와 함께 서북지방에서는 발견 예가 많지 않은 덧무늬토기들이 출토되어 주목되는데, 이러한 토기들이 많이 나오는 동북지방 및 남해안지방의 토기들과의 연관관계에 대해서는 아직 논의된 적이 없다. 보고자들은 빗살무늬토기와 무늬 없는 토기들이 주류를 이루는 가운데 빗살무늬토기 → 덧무늬토기 및 간토기, 무늬없는토기 → 팽이토기로의 계기적 발전과정을 상정해 놓았다.

청동기시대 문화층은 금탄리 유적 3문화층이라고 한다. 3문화층은 팽이그릇 관계 집자리와 유물갖춤새를 잘 보여주고 있다. 집자리는 장방형의 평면에 얕은 움집으로 바닥에 진흙을 깔고 다져 만들었으며, 장축은 남-북으로 놓이고 벽체는 경사져 있다. 집자리에서 나온 유물은 팽이그릇, 변형 팽이그릇과 화살촉, 창끝, 반달돌칼(半月形石刀), 자귀, 대패날 등의 석기가 나왔는데 이들 석기들은 팽이그릇 관계 집자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이다. 8호 집자리에서는 청동끌(銅鑿)이 1점 나왔다. 금탄리 유적의 팽이그릇 집자리들은 동시기의 것이 아니며 이른 시기 집자리들(1·2호)과 이보다 늦은 시기의 집자리들(3·8호)이 있다.

금탄리 유적은 궁산문화 후기로 편년되었으며 최근에 와서 궁산문화가 자꾸 세분되자 1문화층은 궁산문화 2기(B.C. 4000년기), 2문화층은 궁산문화 4기(B.C. 3000년기 후반)로 보고있다. 금탄리 3문화층은 B.C. 2000년기 후반에 이루어진 것이다.

참고문헌

  • 북한의 선사고고학 3-청동기 시대와 문화(장호수, 백산문화, 1992년)
  • 금탄리 원시유적 발굴 보고(김용간, 유적발굴 보고 10, 1964년)
  • 금탄리유적 제2문화층에 대하여(김용간, 문화유산 3, 196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