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살무늬토기

빗살무늬토기

[ 櫛文土器 ]

암사동 출토 빗살무늬토기

암사동 출토 빗살무늬토기

한국 신석기시대에 만들어진 토기를 통칭하는 명칭이다. 신석기 토기 가운데 초기(初期)에 만들어진 덧무늬토기(隆起文土器), 만기(晩期)에 만들어진 겹입술토기(二重口緣土器) 등을 제외하고, 순수히 곧은입술·뾰족밑(尖底)의 반쪽 계란 모습에 기하학적 문양의 새김무늬로 이루어진 토기만을 빗살무늬토기로 보는 협의의 개념도 있다. 그리고 여기에는 빗살무늬토기가 북구 및 시베리아 등지에서 발달한 Kamm Keramik(“빗살무늬토기”란 의미)과 직·간접으로 관련 있다는 견해도 있다.

빗살무늬토기는 지역에 따라 특징적인 모습을 보이는데 그 출현 양상과 공반유물, 그리고 현재까지의 시기구분을 종합하여 검토할 때 대략 초기, 전기, 중기, 후기의 네 단계 발전과정을 거쳤다고 여겨지고 있다.

초기의 빗살무늬토기는 대략 B.C. 6000년 전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했으며 남해안 중심의 덧무늬토기와 동북지방의 찍은 무늬토기, 서북지방을 중심한 짧은 이음 구불무늬(‘之’字文)토기를 꼽을 수 있다. 남해안지방의 덧무늬토기는 부산 동삼동, 김해 범방과 북정, 울산 신암리, 통영의 욕지도·연대도·상노대도, 여천 돌산 송도 유적 등지에서 나타난다. 동북지방의 찍은무늬토기는 함북 선봉 서포항, 양양 오산리 유적 등에서 나타나며 ‘之’자무늬는 평북 미송리 유적을 비롯한 몇몇 유적에서 나타나고 있다.

덧무늬는 토기 표면에 덧띠를 따로 덧붙이는 것을 말하는데 순수하게 가는 덧띠 혹은 굵은 덧띠로 이루어진 세선융기문(細線隆起文)·태선융기문(太線隆起文) 등이 있으며, 토기벽에 덧띠를 붙인 뒤 그 위에 다시 아삭아삭 새기거나 덧무늬 없는 부분에 새김무늬(沈線文), 찍은무늬(押印·押捺文)를 베푼 것도 있다. 덧무늬에 다른 무늬가 첨가된 것이 더 나중 시기로 여겨지고 있다. 덧무늬토기가 베풀어진 토기들은 그다지 크지 않으며 대개 납작밑을 가지고 있다. 이와 함께 토기 몸체에 무늬가 전혀 베풀어지지 않은 민패토기도 많이 나오므로 무늬가 적다는 것이 남해안 토기의 한 특징이 되고 있다. 토기 바탕흙은 모두 찰흙질로 빚어졌으며 토기가 잘 빚어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주위에서 구할 수 있는 화산암·바닷가의 잔 자갈 등을 깨뜨린 것을 비짐으로 첨가하는 경우가 많다.

남해안지방의 토기들은 특히 토기를 만든 뒤의 끝손질도 많이 발달했던 것으로 나타나는데, 예를 들면 덧입힘(slip)이나 물감칠의 발달 등이 그것이다. 흰색의 두꺼운 덧입힘층 위에 다시 붉은 물감을 칠한 붉은간토기는 대표적인 예이다. 신석기 초기에 나타나는 붉은간토기는 작고 오므라든 입술이 많으며 때로 새김무늬가 곁들여지기도 하여 청동기시대의 전형적인 붉은간토기와 구별된다.

동북지방의 초기 빗살무늬토기에는 서포항 유적 1기층의 바리모양토기(鉢形土器)와 양양 오산리 유적 1문화층의 토기류가 있다. 서포항의 것은 입술 가까이에 4-5줄의 짧은 빗금을 눌러찍은 것이다. 바탕흙은 찰흙에 조개가루와 가는 모래를 섞었으며 갈색을 띤다.

오산리의 토기들은 모두 납작밑이며 입술지름에 비해 상당히 좁아드는 것이 전형적이다. 일찍부터 손잡이가 달리거나 목이 있는 토기들도 많이 나온다. 입술 가까이부터 무늬를 3-4줄 눌러 찍은 종류가 많은데 평행으로 된 점무늬나 짧은 빗금무늬 및 손톱무늬가 가장 많다. 무늬없는 민토기도 나와 전체로 무늬가 적다는 점에서 남해안지방과 비슷하다. 또 토기 겉면에 덧입힘을 하거나 공들여 문질러서 광택나는 것이 많다는 점에서도 남해안지방의 토기들과 유사성이 있다. 바탕흙은 가는 모래를 섞은 찰흙이 주로 쓰였다.

서북지방의 짧은이음구불무늬는 중국 동북지방의 소주산, 상마석, 신락, 후와 유적 등 요서·요동에서 주로 출토되는 ‘之’자문토기와 같다는 것인데, 이들은 대개 모래흙을 섞었으며 깊은바리(深鉢)가 주로 나오는 것이다. 서북지방에서는 의주 미송리 이외에 당산, 세죽리 유적 등지에서 간간이 1-2점씩 출토되고 있으므로 앞으로의 발굴례가 증가되어야 확실한 언급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최근에 발굴된 제주 고산리 유적의 경우 덧무늬토기에 앞서는 시기인 유기물토기(有機物土器, 바탕흙에 유기물이 많이 들어있다가 굽는 과정에서 타버리고 그 흔적으로서 구멍이 숭숭 뚫려있는 토기. 후꾸이·셴부꾸지 등 일본의 초기 유적 토기들과 아무르 하류지방의 가샤 유적 등에서 최근에 자주 보고되는 토기들이 이러한 형식이다)가 나오는 것으로 보고되었으나 이 역시 정식보고서가 나온 뒤 더 연구되어야 할 사항이다.

전기의 빗살무늬토기가 만들어지는 시기는 B.C. 4500년 무렵부터 B.C. 3500년 무렵까지로서 이 무렵은 기후가 무척 따뜻했다고 추정되며 이러한 환경에 적응한 인구의 증가현상도 가속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것은 전기 빗살무늬토기의 출토지가 늘어나는 것으로 보아서도 알 수 있는데 특히 서해중부지방 전기 빗살무늬토기의 존재는 뚜렷하다.

남해안지방의 토기는 입술 및 그 가까운 부분에 미세한 횡주어골문(橫走魚骨文)이나 빗금무늬(斜線列文) 등 찍거나 누른 무늬(押印·壓捺文) 종류가 대표된다. 이러한 시문방식이 사용되는 시기를 ‘부산기(釜山期)’라고도 한다. 대체로 무늬들이 매우 작고 미세하며 따라서 그릇의 두께도 얇은 경우가 많다. 토기는 목이나 귀때(注口)가 생기거나 손잡이가 붙는 경우가 많다. 또 입술 자체에 금을 새긴 이른바 구순각목(口脣刻目 : 골아가리) 토기도 나오기 시작한다. 초기유적으로 하동 목도리 조개무지 등이 새로이 발굴·보고 되었다.

오산리 2문화층의 토기는 몸체가 줄어들며 바닥이 상대적으로 넓어져 안정감을 주게 되었다. 목단지가 증가하는 추세를 보여준다. 바탕흙에 굵은 모래를 섞은 것이 많으며 무늬를 베푼 것이 적어지고 토기의 색깔은 이전보다 매우 밝은 황갈색이 주류를 이루게 된다.

서포항 2기의 토기도 모두 납작밑이나 입술 바로 밑이 들어가서 짧은 목이 생겨난 그릇이 나타난다. 무늬는 주로 점줄무늬류를 몸체부분에까지 베풀었으며 새김무늬 특히 생선뼈무늬가 쓰이기 시작한다. 가로로 짧은 금을 띄엄띄엄 돌린 것도 있다. 무늬가 없는 민토기도 공반된다. 바탕흙에는 모래, 운모, 조개가루 등이 섞여 있으며 흑회색, 황갈색, 적갈색을 띠고 있어 구울 때 산화가 불충분했음을 보여준다.

전기 빗살무늬토기는 대동강 유역-한강유역 사이에 있는 평남, 황해, 경기 지방 및 서해도서지방에 걸쳐 집중 출토되고 있다. 평남 궁산리와 황해도 봉산 지탑리, 한강유역의 암사동·미사리 유적 등이 특히 잘 알려져 있으며 현재까지 대략 80여 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전기의 토기는 모두 뾰족밑이며 입술·몸체·밑부분의 세 부위에 저마다 다른 무늬가 정연히 베풀어진 것이 특징이다. 입술에 평행밀집의 빗금무늬(斜短線文)·점줄무늬(點線列文)·손톱무늬 등이, 몸체에 생선뼈무늬 또는 그 변형이라 여겨지는 평행사선문이나 사내끼무늬(斜格子文), 밑부분에는 방사선식 빗금무늬나 띠대문(組帶文)·평행사선문이 베풀어지는 것이 정형적(定型的)이다. 이때 입술과 몸체 사이에 이른바 종속구연문이라고 하는 점물결무늬(波狀點線文)·무지개무늬(重弧文) 등 곡선무늬가 들어가기도 한다.

주로 쓰이는 무늬에서 한강유역과 대동강유역의 토기는 약간의 지역 차이를 나타내는데, 대동강유역의 토기는 입술 쪽에 주로 누르거나 찍은 종류의 점줄무늬, 몸체에 세로 방향 혹은 생선뼈무늬 등이 주로 베풀어지지만 한강유역의 토기들은 입술 쪽에 새긴 빗금무늬, 몸체에는 세로와 가로 방향의 생선뼈무늬가 주로 나타난다. 새긴 무늬보다 찍은 무늬를 이른 시기의 것으로 보는 한국의 시기구분으로 본다면 대동강 유역의 토기가 한강유역의 것보다 약간 먼저 발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중서부지방 토기의 큰 특징은 바탕흙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운모·활석·석면 등을 많이 넣어서 겉면이 반짝거리거나 매끄러운 토기들이 많이 출토된다. 서해안지방 빗살무늬토기들의 크기는 대부분 남해안 및 서포항 지역의 납작밑 토기들 보다 커서 저장기능의 역할도 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중기 빗살무늬토기의 시기가 되면 남해안지방에서 덧무늬토기는 완전히 사라지며, 토기의 생김새나 무늬로 볼 때 거의 전 지역에서 이 시기의 흔적이 있어 신석기 중기문화의 확산을 알 수 있으며, 서해중부지방과 남해안지방과의 관련성, 서해중부지방과 동북지방과의 관련성 등이 증가하는 경향을 볼 수 있다. 해안가 뿐만 아니라 내륙지방 큰 강의 중류 및 상류지역에서도 유적이 발견되고 있어 결국 빗살무늬토기가 전국적인 보편성을 보이는 시점이다.

남해안지방에서는 문살무늬·빗금무늬·집선문·생선뼈무늬 등을 굵고 힘있게 새긴 태선심선문(太線沈線文)을 베푼 토기들이 주로 만들어지는데 이 시기를 ‘두도기’라고도 부른다. 무늬는 토기의 입술 가까운데서 점차 밑부분에까지 베풀어지지만, 중기의 늦은 시기로 가면 다시 입술 쪽에 가까운 윗부분에만 무늬가 베풀어지는 쪽으로 회귀하여(이른바 수가리 2식, 봉계리 3식) 토기에 무늬를 많이 넣지 않는 남해안토기의 특징이 살아있다. 그리고 태선문이 새겨지는 만큼 토기살도 두터우며, 무늬가 베풀어진 입술 쪽이 몸체 이하보다 약간 더 두터운 경우도 있다. 토기의 밑은 거의 둥근-뾰족밑으로 바뀐다.

이렇게 생김새와 무늬 모두가 서해중부지방의 전기 빗살무늬토기와 유사한 모습으로 바뀌고 있어 이 무렵에 한강유역과의 교류가 활발해졌을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입술부분에 자주 베풀어지는 삼각형·마름모형의 집선문은 일본 규슈(九州)방에서 출토되는 토기무늬에도 많아 그쪽지방과의 교류도 추정되고 있다. 태선문토기 시기의 방사성탄소연대는 수가리에서 많이 얻어졌는데 4510, 4490, 4430, 4380, 4290 B.P. 등이 나와 대략 B.C. 3000년을 전후할 것으로 보인다.

오산리 3문화층에서도 서해중부지방 계통의 뾰족밑 빗살무늬토기가 나와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달라진 모습을 보여준다. 토기무늬는 입술 부분에 평행 밀집된 빗금무늬를, 몸체부분에 생선뼈무늬를 베푼 것이 주류를 이루나 때로는 입술에서 몸체에 이르는 부분을 모두 생선뼈무늬로 새긴 것과, 생선뼈 대신 문살무늬나 조대문 등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밑부분에까지 무늬를 베푼 것이 나오기도 한다. 바탕흙은 찰흙질에다 석영·장석·운모 등을 넣은 것이며 소수이지만 석면을 섞은 것도 있다. 앞 시기와는 달리, 덧입힘이나 갈기(磨硏) 등의 끝손질을 하지 않아 거친 느낌을 주고 있다.

서포항 3기층 빗살무늬토기의 가장 큰 특징 가운데 하나는 타래무늬를 베푼 토기가 나타난다는 점이다. 타래무늬는 2줄의 선을 서로 꼬여들어가게 한 사이에 선이나 점줄로 채운 것이다. 이것은 서해안지방의 점물결무늬와 같이 곡선무늬(한국 빗살무늬토기 가운데 곡선무늬 모티프라는 것은 무척 드물다)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또 하나는 덧무늬가 출현한다는 점이다. 남해안지방과는 달리 북한지방의 덧무늬는 중기에 출현하여 청동기시대의 민무늬토기가 나올 때까지 쓰이는 특징이 있는데 여기서는 입술 가까이 덧무늬 1줄을 돌린 것이 나온다.

서해안지방에서 신석기 중기의 토기들은 입술 바로 아래의 점물결무늬가 발전하여 허리 전체에 베풀어지거나 입술부분에 새로이 사내끼·삿자리무늬 등이 베풀어지기도 하나 가장 보편적인 현상은 무늬를 베푸는 면적이 줄어들어 밑부분의 무늬가 없어지는 점, 입술과 몸체부분이 전부 생선뼈무늬로 채워지는 점, 그리고 무늬가 정형성을 잃고 성의없이 베풀어진 점 등이다. 토기의 생김새는 입술부분이 오므라든 항아리나 대야밑처럼 완만한 납작밑도 나오고 있다. 그리고 서해도서지방이나 남한 중부내륙지방의 중·상류지방에서 새로이 찾아지는 대부분의 신석기 유적(영종도 송산, 도담 금굴, 제천 황석리 유적 등)에서는 중기이후의 빗살무늬토기 유형이 대부분을 차지하여 그 시기를 짐작케한다.

후기의 빗살무늬토기 시기가 되면 남해안지방에서는 매우 특징있게 생긴 겹입술토기가 만들어지는데 이 시기를 ‘영도기’라고도 한다. 겹입술토기는 남해안지방에서 조사된 거의 모든 유적에서 찾아져서 사람들이 널리 퍼져 살았던 시기임을 잘 보여준다. 겹입술토기만의 층으로 이루어진 단순 유적도 있는데 사천 구평리, 부산 금곡동 율리, 김해 농소리 유적 등이 대표적이다. 겹입술토기는 입술부분을 1겹 덧대어 만든 것이며 모래질이 매우 많이 포함된 흙으로 만들어 단단하고 사각거리며, 크고 무겁고 검은 빛을 띤다. 밑부분은 예외없이 둥근밑으로 만들었다. 무늬는 두터운 겹입술 아래에 퇴화된 빗금무늬를 띄엄띄엄 베풀었지만 점차 후기로 가면서 겹입술의 모양이 흐트러지면 구평리·율리 등에서 보듯이 다시 홑입술에 가깝게 회귀하며 입술은 바라지고 무늬가 거의 베풀어지지 않게 된다. 즉 무문토기로 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성에서 알 수 있듯이 이른 무문토기의 하나인 겹입술의 팽이형토기(角形土器)와 관계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겹입술토기와 함께 조개껍질을 비짐으로 쓴 단단하고 검은 토기들도 공반되는데, 이들은 흡수율이 매우 낮은 특징이 있어 주목된다. 흙 가락바퀴도 출토되었다. 후기 빗살무늬토기의 실연대는 수가리 3문화층, 율리, 상노대도 4문화층(2층), 동삼동 영도기 등의 방사성탄소연대자료를 통해 알 수 있는데 대개 B.C. 1500년 무렵이다.

서포항 4·5기층에서는 무늬없는 토기들이 많아지며, 생김새는 납작한 사발류나 들린 굽이 많아진다. 늦은 시기를 지시하는 번개무늬(雷文)가 나와 주목되는데, 이것은 3기층의 타래무늬가 직선화되면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풀이되고 있다. 붉은 칠을 한 토기에 번개무늬가 베풀어진 경우도 있다. 5기층으로 가면 민무늬가 대다수로서 더 이상의 무늬 변화를 찾아보기 어려운 대신 끝손질과 비짐이 달라짐을 볼 수 있다. 토기 겉면을 매끄럽게 갈아 윤이나고 갈색을 띄며 바탕흙에는 단일하게 모래만 첨가하게 된다. 범의 구석 1기층은 동북지방 신석기 최말기로서 이러한 경향을 잘 보여주는데 돌대문(突帶文)과 구멍무늬토기도 이 무렵부터 나오게된다.

서해중부지방에서는 소야도·덕적도 등 도서지방 거의 전역에서 빗살무늬토기가 나타날만큼 사람들이 여러 곳에 퍼져나가 살았음을 보여준다. 이때에는 무늬를 베푸는 면적이 크게 줄어들어 주로 입술부분에만 새기며, 매우 퇴화된 양식이라 무늬가 거칠고 엉성하게 시문된다. 생선뼈무늬가 산만하게 그려지는 가운데 선이 교차되어 문살무늬처럼 보이거나 생선뼈무늬가 해체되어 1-2줄의 빗금무늬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한편 금탄리나 남경 유적에서 보듯이 그릇 전체를 가로방향의 생선뼈무늬, 줄띠무늬 등으로 채운 토기, 덧무늬토기, 그리고 무늬가 전혀 베풀어지지 않은 민무늬토기도 나온다. 완만한 납작밑·들린 굽 등이 만들어진다. 토기의 바탕흙은 이제까지의 모래질에서 바뀌어 찰흙질 토기가 나오며 비짐은 점차 모래 한가지로 단일화되어 간다. 서해도서지방의 신석기시대 역시 B.C. 1500년 무렵이 그 하한으로 여겨지고 있다.

서북지방의 신암리·용연리·토성리·쌍학리 등의 유적에서는 번개무늬가 베풀어진 토기들이 자주 출토된다. 신암리 1기층의 경우 바리·굽접시·단지 등 생김새도 다양한 그릇에 번개무늬·참대순무늬·덧무늬·단추무늬·독특한 새김무늬(刻線文) 등이 많고, 간그릇과 함께 요동반도 일대에서 나오는 구운 후에 채색하는 토기들도 나온다. 이들의 바탕흙은 대개 진흙에 부드러운 모래나 운모를 섞었다. 용연리에서도 번개무늬와 덧무늬가 베풀어진 신암리형의 항아리가 주류이지만 민무늬토기가 차지하는 비율이 더 높다. 빗살무늬토기 무렵에 흙으로 만들어진 부산물로는 위에서 인용한 가락바퀴, 토우 등을 들 수 있다. 오산리에서는 흙으로 꾹꾹 눌러서 눈과 코, 입을 표시하고 있는 인물상을 찾은 바 있다. 농포동에서는 흙으로 만든 여성상과 개의 머리를 빚은 것이 나왔는데 여성상은 선사시대에 자주 출토되며 대개 풍요와 다산의 기원을 나타낸다고 여겨진다. 울산 신암리에서는 흙으로 빚은 여성 조각이, 부산 금곡동 율리에서는 흙으로 빚은 여성 성기 모양의 조각이 나왔다.

빗살무늬토기는 대개 손으로 그냥 빚거나(手捏法) 테쌓기(輪積法)·감아올리기(捲上法) 등으로 만들었는데 자연과학을 이용한 여러 가지 분석법에 의해 밝혀진 바에 의하면 카올리나이트나 일라이트, 몬모릴로나이트 등의 점토광물 바탕흙에 석영·장석·운모·활석·석면·조개가루·토기가루 등 다양한 물질을 섞어 작업성을 좋게 하여 빚었으며 한데가마(露天窯) 또는 산화분위기에서 구웠던 것으로 나타난다. 굽는 온도는 대개 700℃ 이하였으며 녹니석 등의 바탕흙이나 석면 등의 특별한 비짐을 구하기 위해 상당히 먼거리까지도 다녀왔던 것으로 나타난다.

빗살무늬토기가 다공질(多孔質)이므로 그 쓰임새는 마른 낟알 등을 담는데 제한되어 쓰인 것으로 한정하기 쉽지만, 흡수율 분석과 외국의 민족지 사례를 검토해보면 빗살무늬토기는 낟알저장, 화식기, 물그릇 등의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참고문헌

  • 신석기시대의 유물: 토기(신숙정, 한국사 2, 1997년)
  • 고고학과 자연과학(최몽룡·신숙정·이동영, 학연문화사, 1996년)
  • 우리나라 남해안지방의 신석기문화 연구(신숙정, 학연문화사, 1994년)
  • 한강유역의 신석기문화(안승모, 한강유역사, 1993년)
  • 조선전사(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 1991년)
  • 한국고고학개설(김원룡, 일지사, 1986년)
  • 지역적 비교(한영희, 한국사론12, 1983년)
  • 토기의 시대적 변천과정(임효재, 한국사론12, 187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