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산리 유적

오산리 유적

[ 襄陽 鰲山里 遺蹟 ]

지역 양양
융기문토기. 높이 16.0cm

융기문토기. 높이 16.0cm

강원도 양양군 손양면 오산리에 있는 신석기시대 집자리 유적으로, 남한에서 측정된 방사성탄소연대값으로는 최고치(最古値)를 나타내어 각광을 받은 유적이다. 유적은 동해안에서 내륙 쪽으로 200m 정도 떨어진 모래언덕(沙丘) 위에 있으며 바로 옆에 ‘쌍호’라고 불리우는 호수가 있다. 1981년부터 서울대학교박물관에 의해 발굴되었고 3권의 보고서가 나와 있다. 호수를 메우기 위해 모래를 파서 50m 가량 되는 언덕의 가운데 부분이 없어졌기 때문에 약 6,000㎢ 범위의 유적지는 두 쪽으로 나뉘는데, 모래언덕의 동쪽부분이 오산리 A, 서쪽이 오산리 B지점이다.

오산리 유적은 6차에 걸쳐서 발굴되었으며 11기의 집터와 소할석 및 돌무지 유구 7기, 다량의 석기토기들이 드러났다. 퇴적층위는 6개로 구분되는데 1층은 암황갈색 찰흙층이며 청동기시대층이다. 2층은 황갈색 모래질층이며 서해안식의 빗살무늬토기가 나오나 많이 교란되었다. 3층은 암갈색 모래질층이며 이때부터 납작밑토기가 나온다. 유적의 중심이 되는 5층은 A·B지구에서 다 나타나며 7개의 색깔이 다른 층으로 세분된다.

결합식 낚싯바늘. 길이(右) 9.4cm

결합식 낚싯바늘. 길이(右) 9.4cm

1층은 적갈색 민토기, 덧띠토기, 결합식 쇠뿔모양 손잡이 등이 나오는 청동기시대의 층이다. 위에쓰 문화측정으로는 3360±180 B.P.로 나온 값이 있다. 2층(제 3문화층)부터 신석기시대 층으로서 서해안의 뾰족밑 빗살무늬토기, 납작한 강자갈의 양쪽 끝을 떼어내어 만든 그물추 등이 나온다. 3층(제 2문화층)에서는 원형천막과 같은 임시시설의 굄돌로 생각되고 있는 석렬(石列) 1기가 확인되었으며, 토기·석기 등에서는 아래 5층(제 1문화층)의 출토양상과 거의 같다.

특이한 것으로는 흙으로 빚은 사람얼굴이 있다. 신석기시대에 사람얼굴 모양을 상징한 예술품으로는 이 오산리의 것 이외에 동삼동의 국자가리비, 서포항의 뼈 조각품 등이 있을 정도로 희귀한 예이다.

제1문화층은 여러 층으로 세분되나 유물상으로나, 방사성탄소연대측정값으로나 큰 차이를 찾을 수 없어 일괄로 서술한다. 모두 11기의 집터가 드러났는데 둥근꼴이며 집안에는 사각형의 화덕자리(爐址)가 1-2개씩 있다. 집자리는 대부분의 경우 바닥만 찰흙으로 다졌을 뿐 기둥구멍이나 벽의 흔적이 전혀 없기 때문에 움집이 아니라 지상가옥이며, 맨바닥 위에 가운데로 기울어진 기둥을 세워 중앙의 받침기둥이 없이 엮어 지붕을 씌운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9호 집자리 같은 경우 찰흙으로 다진 바닥이 아니라 화덕자리가 가장자리에 환형(環形)으로 깔리고 화덕자리에서 불에 탄 흙이 많이 나오는 것이 특징이다. B-1호 집자리도 찰흙다짐이 없다. 집의 크기는 평균지름이 6m 정도이며 지름 3m 정도인 경우 저장고나 부속시설로 보고 있다. 집안의 작업공간 분할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일정한 범위에 돌을 쌓아서 만든 소할석 및 적석유구 7기가 나왔다.

제1문화층에서 나온 석기 가운데 대다수를 차지하는 것이 묶음낚시로서 70점(큰 것은 길이 10㎝정도)이 나왔으며 그밖에 그물추, 돌도끼, 돌칼, 화살촉, 돌창, 돌톱, 추모양 석기, 숫돌 그리고 돌감이 나왔다. 묶음낚시는 낚시 허리부분의 아래쪽이 급하게 휘어져 있고 이 부분에 바늘이 연결되어 낚시의 기능을 발휘하는 도구인데 동삼동, 서포항, 상노대도, 일본의 서북구주지방 등 바닷가의 조개무지(貝塚) 유적에서 많이 발견되고 있다. 묶음낚시는 흔히 큰 물고기를 잡는데 썼다고 말해지며, 하나로 연결되는 낚싯바늘에 비해 물고기가 물렸을 때 분리되어 파손되지 않으며 또 낚시의 바늘부분은 뼈나 나무 어떤 것도 가능하다는 점에서 유리하다.

이곳에서만 보이는 특징적인 추모양 석기는 윗부분에 줄을 맬 수 있도록 홈이 파이고 한쪽 면이 평평하게 다듬어져 있어 던지는 도구의 앞부분에 묶어 썼던 것이 아닐까 여겨지고 있다. 이곳에서 출토된 흑요석은 백두산 계열로 성분분석되었는데 비교자료가 없다는 점에서는 성급한 결론이나, 적어도 신석기시대 교역연구의 실마리를 제공해주게 되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1문화층의 토기들은 대다수가 납작밑(平底) 토기이며 덧무늬토기(隆起文土器)가 조금 나왔다. 토기의 모양은 좁은 밑에 몸체가 매우 넓은 발형(鉢形)이 대부분이나, 독 또는 목단지도 있다. 무늬는 주로 입술 주위에만 베풀었는데 찍은 무늬(押捺文)가 가장 많고 새김무늬(陰刻文)일 경우에는 평행한 단선문이 베풀어지며 2가지 수법이 결합되기도 한다. 이러한 양식은 이른 시기로 편년되는 서포항 1·2기층과 통한다. 토기 겉면을 갈아서 윤이 나는 토기가 많다.

오산리 유적 발굴의 첫째 의의는 서포항 유적과 남해안지방의 신석기문화를 잇는 중간지대에서 중요한 신석기시대 유적을 찾아내었다는 점이다. 둘째로 현재까지로는 오산리 유적이 한국 신석기시대 유적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에 속한다는 점이다. 셋째로 이러한 납작밑의 찍은 무늬 위의 제3문화층에서 서해안식의 뾰족밑 빗살무늬토기들이 나와 이른바 동한식(東韓式)의 오산리토기가 서한식(西韓式)에 선행함을 알아낸 점이다. 넷째 오산리 유적의 상한을 B.C. 6000년으로 잡을 때 이는 현재 북한의 시기구분과 근접한다는 점이다. 북한에서는 1990년대 이후 신석기시대의 상한을 B.C. 6000년으로 상향조정하고 있으며 미송리 유적과 더불어 북한에서 가장 이른 시기 유적의 하나로 꼽히는 서포항과 오산리 유적과의 문화적 유사성은 진작부터 지적되어 오던 바이다.

오산리 유적은 서쪽과 남쪽에 형성되어 있는 한천산 줄기의 계곡이 갑자기 평탄해지는 낮은 개활지의 사구에 위치하고 있어 매우 강한 바람이 부는데, 이러한 입지가 오산리의 층위와 연대문제에 많은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즉 퇴적층의 기본 토양은 고운 모래(fine sand)로 이루어져 있으며, 유적에는 매우 강한 바람이 규칙적으로 불어오고 있으니 오산리의 층위는 계속 교란되거나 재퇴적되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이 견해를 따른다면 유적의 층위와 시기구분을 확신할 수 없는데, 한편 방사성탄소연대값은 현재까지 한국에서 가장 오랜 것으로 나와 논의의 소지가 크다. 이러한 문제는 유물의 편년과 절대연대측정, 자연지리적 환경에 대한 퇴적학, 지질학적 고찰 등을 아우른 종합적 연구를 통해 해결해나가면 좋을 것으로 보인다.

오산리 유적의 연대에 대해 제1문화층의 여러 층에서 채집한 숯으로 방사성탄소연대측정을 한 결과 10개의 탄소연대 값이 나와 있는데 1호 집터의 7120±700 B.P.가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이며 대부분의 연대들이 7000-6000 B.P. 사이에 나오고 있다.

참고문헌

  • 오산리 토기의 연구(김장석, 서울대학교석사학위 논문, 1991년)
  • 오산리유적 1·2·3(서울대학교박물관, 1984년·1985년·1988년)

유의사항

  • ⓘ 본 콘텐츠는 과거 인류들이 남긴 유물, 유구, 유적 등의 고고학적 내용으로, 유적명과 주소는 2001년 발간 당시 행정구역을 기준으로 반영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