팽이형토기

팽이형토기

[ 角形土器 ]

대전 둔산동 주거지 출토. 높이 17.6cm

대전 둔산동 주거지 출토. 높이 17.6cm

한국 청동기시대에 유행한 민무늬토기(無文土器)의 한 형식으로, 아가리(口緣部)쪽이 큰 것에 비해 바닥이 작아 전체모양이 팽이모양과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쇠뿔처럼 생겼다하여 ‘각형토기(角形土器)’라고도 한다. 최근에는 대표적인 유적의 이름을 따 ‘신흥동식토기’라고도 하는데, 대동강유역에 주로 분포하는 지역성이 강한 토기형식이다. 한강유역을 비롯한 남한지방에서는 그 변형형식이 약간 분포할 뿐이다.

팽이형토기는 전체모양이 특징적이어서 붙여진 이름이지만, 또 다른 특징은 아가리 장식에 있다. 아가리가 겹으로 되고, 그 부위에 일정한 간격으로 짧은 빗금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이러한 이중구연의 단사선(短斜線) 장식은 요녕지방(遼寧地方)의 旅大市 趙公家 유적을 비롯한 ‘조공가식토기(趙公家式土器)’에서도 보이므로, 여기서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되기도 한다. 그리고 금탄리(金灘里) 유적의 조사 결과 아래층에서는 반란형(半卵形)의 말기 빗살무늬토기(櫛文土器)가 출토되는데 무늬가 거의 없고, 전체 기형(器形)이 굽바닥을 제외하고는 초기 팽이형토기와 비슷하여 팽이형토기의 기원을 대동강유역의 빗살무늬토기 말기형식에 두고 있기도 한다.

팽이형토기는 기종으로 보면 독모양(甕形)과 항아리모양(壺形)으로 나뉘며, 작은 마연단지토기가 공반된다. 학자에 따라서 옹은 전형, 호는 변형의 팽이형토기로 분류하기도 한다. 옹은 호에 홑구연이 다수 보이고 있는 것에 비해 모두 이중구연으로 만들고 있으며, 구연부는 약간 외반(外反)한 듯이 보이도록 한 것이 다수이나 어깨에서 약간 안쪽으로 경사지게 한 것도 있다. 편평한 바닥은 약간 축약되어 동체부와 연결된다. 호의 목부분(頸部)은 어깨에서 각을 지어 직립되는 것과 나팔형으로 자연스럽게 벌어지는 2가지 형태가 있다.

세부적인 형식 분류는 대체로 겹아가리와 빗금무늬의 유무를 기준으로 삼고 있는데, 그 형식의 변천은 크게 조기, 전기, 중기, 후기 등의 4기로 나누어 살필 수 있다. 조기의 것은 석교리(石橋里), 금탄리에서 출토되는 것으로 동체부(胴體部)가 거의 공모양을 이루고, 저부(底部)는 둥근 바닥에서 편평바닥으로 이행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따라서 신석기시대 빗살무늬토기의 요소가 남아 있는 단계라 할 수 있겠다. 추정연대는 B.C. 10~9세기경이다.

전기는 침촌리, 금탄리 그리고 신흥동 유적의 예가 대표적으로 동체는 공모양에서 타원형으로 이행하며, 저부는 평저로 완성되는 단계로, 순수 팽이형토기문화 단계라 할 수 있겠다. 겹아가리와 일정간격으로 시문된 빗금무늬 토기시대와 구분되는 석기문화도 완성되는데, 턱자귀(有段手斧), 반달돌칼(半月形石刀), 대패날, 달도끼(環狀石斧), 그리고 유경식석검(有莖式石劍) 등이 나타난다. 추정연대는 B.C. 8~7세기경이다.

중기는 주암리(舟岩里), 석탄리(石灘里) 등의 유적 출토 예로 호형(壺形)토기에 홑구연이 증가하는 단계이며, 추정연대는 B.C. 6~5세기경이다. 다음 후기로는 입석리(立石里) 등의 유적 출토 예가 있는데, 무문(無文)의 옹형(甕形)토기가 증가하고, 호형토기 중에서도 나팔형 목의 형태가 많아지는 바, 점차 팽이형토기의 모습이 변형되는 단계라 할 수 있겠다. 추정연대는 B.C. 4~3세기경이다.

이러한 팽이형토기 중 전기에 속하는 전형적인 예는 한반도 중부지방에서는 강화도 출토 예가 있지만, 한강유역에서 발견되는 팽이형토기는 저부가 넓어져 전체모양이 화분모양을 이루며, 빗금무늬도 연속으로 시문(施文)되는 이른바 ‘가락동식(可樂洞式)’이라는 변형 팽이형토기이다. 이러한 변형 팽이형토기는 한강 이남으로 파급되어 청주 내곡동(內谷洞)과 대구에 이르기까지 파급되는데, 공렬토기(孔列土器)의 요소와 혼합하여 남한강 상류의 경기도 여주 흔암리(欣岩里) 유적의 출토 예로 대표되는 이른바 ‘흔암리식토기’ 양식을 만들기도 한다.

그리고 변형된 팽이형토기는 멀리 제주도에까지 전해져 다른 공렬토기와 함께 출토된다. 한반도 중부이남과 제주도에서 출토되는 팽이형토기는 겹아가리가 거의 홑구연화되면서 그 구연부 폭도 넓어진다. 그리고 짧은 빗금무늬도 스치듯이 긋는 방식으로 변화하여 일정한 속성의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 확인된다.

팽이형토기가 출토되는 집자리 유적은 거의 장방형(長方形)으로서 특징적이다. 기둥구멍(柱孔)이 집터 안쪽 가장자리로 돌아가며 있으므로 일정한 벽체가 있는 반움집 맞배나 우진각 가옥을 이루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무덤유적으로 돌널무덤(石棺墓)과 고인돌(支石墓) 유적이 있다. 석관묘는 2매의 긴 판석과 작은 판석을 짜맞춰 장방형의 매장부 석관을 만든 것으로 평양 어수구(御水區) 석관묘의 예가 있다. 이 유적에서는 팽이형토기편과 함께 피홈(血溝)이 있는 이단병식(二段柄式) 마제석검과 유경식석촉(有莖式石鏃)이 출토되었다. 그리고 지석묘로서는 천진동 지석묘가 있는데, 주변에 적석시설(積石施設)을 하고 여러 석관형 매장시설이 있는 개석식(無支石式)지석묘이다.

팽이형토기 유적에서 현재까지 알려진 청동기금탄리 유적동끌(銅鑿)과 신흥동 유적의 동포(銅泡) 뿐이다. 이로 보아 팽이형토기문화는 그 이른 단계의 청동기문화와 큰 관련이 없어 보이며, 후기에 이르러서도 청동기를 적극적으로 사용하였다는 증거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팽이형토기 사용집단은 유적의 입지적 조건으로 보아 농경생활을 적극적으로 영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 직접적인 증거로 평양시 남경(南京) 유적에서는 다량의 탄화미가 36호 집자리에서 확인된다. 그밖에 남경유적에서는 조, 수수, 콩, 기장 등도 출토되었다.

참고문헌

  • 조선고고학개요(사회과학원고고학연구소, 과학·백과사전출판사, 1986년)
  • 남경유적에 관한 연구(김용간·석광준, 과학·백과사전출판사, 1984년)
  • 角形土器考(한영희, 한국고고학보 14·15, 한국고고학회, 198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