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모

관모

[ 冠帽 ]

관은 착용자의 신분을 나타내거나 특별한 의식을 집행할 때, 그 권위를 상징하기 위하여 제작한 것으로, 특정형태와 차등화된 재질 및 장식으로 착용자의 사회적 신분을 상징하고, 제도적 장치인 관제에 의해 규제를 받는 공적 의례용의 쓰개를 말한다. 관은 대체로 형태와 용도에 따라 의식용의 외관과 일상용의 내관으로 나누어지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별개의 관과 관모이면서 경우에 따라 내·외관으로 조합되어 사용하기도 한다. 삼국시대의 관은 대체로 금으로 제작된 것이 많으나 금동제관, 은제관, 백화수피제관모류 등도 상당수 발견되고 있으며, 또 각 나라마다 제작수법이나 의장이 독특한 양상을 띠고 있다.

경주 천마총. 17.6×17.2cm

경주 천마총. 17.6×17.2cm

경주 천마총. 높이 45cm

경주 천마총. 높이 45cm

고구려 관(高句麗 冠)은 출토 예가 몇 되지 않는다. 그러나 고구려 벽화고분이나 옛 기록을 통해 볼 때 그 형태나 관식의 부착방식, 관제를 살펴볼 수 있어 당시 상당히 유행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에는 절풍(折風), 책(책), 관(冠) 등이 있으며 절풍은 고깔모양으로 옆에는 새 깃이나 새 깃 모양의 금속제장식을 달아 귀천의 차별이 있었으며, 책은 절풍보다 신분이 높은 자가 쓴 것으로 뾰족하게 솟은 것과 앞으로 휘어진 것이 있다. 관은 왕이나 귀족이 사용하였던 것으로 왕은 백라관(白羅冠), 귀족은 청라관(靑羅冠)을 썼다고 한다.

실물로 남아있는 관의 형태는 3례 정도이나 이외에도 절풍에 장식하는 관장식과 ‘山’자모양 앞가리개도 있다. 평양 청암리 토성에서 출토된 금동관은 대관(帶冠)의 형태로 유운문과 방형으로 장식된 넓은 대륜부에 5개의 화염문과 2개의 인동문이 혼합된 입식이 배치되었다. 대륜부의 양끝에는 리본모양의 수식이 길게 드리워져 마치 불상의 보관과 닮았다. 평양부근에서 출토된 금동관은 대륜부 위에 세워진 삼산보관식의 입식을 좌우에 내만하게 세웠으며 입식에는 화염문과 당초문이 투조되어 있다. 최근 이 유물에 대해서는 대륜부를 후대의 복원에 의한 것으로 파악하고 마구의 한 부속품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평양 진파리 1호분에서 출토된 관은 관모의 형태로 심엽형의 반을 세로로 자른 투각된 금동판 2장을 겹쳐 만든 형태이다. 중앙에는 연주문대의 이중원문 속에 태양을 상징하는 삼족오(三足烏)를 투각하고 나머지 공간 위·아래에 봉황과 용을 배치하였다. 뒷면에는 나무 바닥판에 비단벌레 날개를 깔고 그 위에 금동판을 얹어 베게의 마구리장식이라는 견해도 있다. 관장식은 새 깃털 또는 새 날개모양 솟은장식과 ‘山’자모양의 금동제앞가리개가 있다. 이는 절풍에 꽂은 장식으로 생각되며 경주 황남대총 남분 은관의 ‘山’자모양 앞가리개와 깃털모양 입식, 의성 탑리 고분의 새 깃모양 장식에서 서로 연관성을 보인다.

새 깃털 모양 입식에는 집안 우산하 3560호묘·3105호묘, 전 집안출토, 중앙박물관소장 덕5193 등이 있고 쌍영총개마총, 무용총, 이현묘 벽화고분에 그려져 있다. ‘山’자모양 앞가리개는 중앙박물관소장 덕5193이 있으며 이와 유사한 예는 북연의 풍소불묘에 있어 당시 치레걸이류의 북방적 문물교류를 보여준다. 이 외에도 운산 용호동 1호에서는 3점의 금동봉황장식이 출토하였는데 부리, 벼슬, 긴 몸통으로 구성되고 그 아래에는 2족이 있다. 족 하단부에는 작은 구멍이 2개씩 있어 관모의 상부에 장식하던 것으로 보이며 이는 신라의 서봉총, 금관총의 조형장식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백제 관(百濟 冠)은 한성시대 중심지에서 출토된 실물자료가 없으나 웅진시대 이후 초화형관식을 부착 혹은 가삽한 관모가 주류를 이루어 고구려와 비슷한 양식이다. 또한 옛 기록에서 알 수 있는 백제 관의 형태는 역시 고구려와 같고, 제사나 조배시 관의 양쪽에 장식을 하였으며 왕은 금꽃으로 꾸민 오라관(烏羅冠)을, 신하는 은꽃으로 꾸민 관을 썼다고 하였다. 실제 출토 예에서도 무녕왕릉의 금판을 오려 만든 초화식관식과 여러 지역출토의 은화관식이 있어 기록을 뒷받침해 준다. 무녕왕릉의 관식 중 왕의 관식은 인동문과 화염문을 투조하고 영락을 달았고, 왕비관식 역시 인동문과 화염문을 투조하였으나 왕의 관식과는 달리 문양이 좌우대칭이다.

한편 왕비의 머리부근에는 사각형과 오각형의 금판장식이 있는데 이는 대륜에 장식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은화관식은 얇은 은판을 접어 2-3개의 대칭하는 꽃모양으로 오린 것으로 부여 능산리, 하황리, 나주 흥덕리, 남원 척문리, 논산 육곡리 등에서 출토된 것이 있다. 특히 부여 능산리 고분에서는 모자철심이 공반 출토되어 흑갈색모자의 전면에 은화관식을 꽂게 하는 착장상태를 알 수 있다.

이밖에 백제 주변지역에서는 나주 반남면 신촌리 9호 을관(乙棺)과 익산 입점리 출토품이 있다. 이중 나주 반남면 신촌리 9호 출토품의 경우 내·외관이 조합되었으며 상태가 매우 양호하다. 내관은 반원형의 금판 2장을 맞붙여 위쪽 둥근 가장자리에 테두리를 씌워 붙였다. 관모의 가장자리에는 간단한 인동문이 둘러져 있고, 바탕 안쪽에는 초화문을 돌출된 점선으로 표현하였다. 외관은 너비 3㎝의 둥근 테두리 위에 3개의 입식을 세운 것으로 입식들은 각기 가운데 곧게 솟은 줄기를 중심으로 3갈래의 가지가 뻗친 모습으로 투조된 수목형이며 영락과 구슬장식이 있다. 이러한 관의 형태는 전형적인 백제의 관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으며, 가야나 신라와의 관계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신라 관(新羅 冠) 중 평상시에 사용하는 관모는 옆에서 보았을 때 마늘모양의 폭이 좁은 모자로서 금, 금동, 은의 금속제와 백화수피제 혹은 천, 가죽 등의 유기질로 되어 있다. 금속제관모의 대표적인 예로는 경주 천마총과 금관총의 예가 있는데 갖가지 화려한 투각문 혹은 타출문이 장식된 여러 매의 금판을 작은 못으로 연결 고정하고 전면에 새 날개형 관식을 가삽할 수 있게 하였다. 실제 양산 부부총에서는 관모에 새 날개형 관식이 가삽된 채 출토되었다. 유기질제관모는 금령총 출토품과 같이 표면에 채색한 예도 있으나 황남대총의 예와 같이 금속으로 보강한 것도 있다.

신라의 외관은 고구려나 백제와는 달리 나무나 초화를 아주 간략하게 도안화시킨 ‘山’자형의 직선적인 장식으로 된 3개의 입식과 뒤쪽에는 사슴뿔 모양의 장식을 비스듬하게 세웠고 금관의 표면에는 영락과 곡옥을 매달았다. 입식의 끝은 보주형으로 마무리되었다. 이러한 산자형 관이 시기에 따라 변화하는데 입식의 단수가 3단에서 4단으로 늘어나면서 위, 아래 단이 가까워지고, ‘山’자형입식의 각도가 둔각에서 직각으로 되고, 대륜과 입식을 고정하는 못의 수가 2개에서 3개로 증가하며, 대륜부 영락의 단수가 1단에서 3단으로 점차 늘어난다.

이러한 관은 대개 5-6세기 중엽까지 낙동강 이동(以東)지역에 분포하며 이후 신라의 영역변경에 따라 넓게 확산되는데 6세기말에는 동해 추암동 가-21호분, 충청북도 단양 하리, 안동 지동 2호, 울릉도 현포리 고분군 등지에서 퇴화한 형태의 금동관이 발견된다. 이러한 관이 대형분이 아닌 중소형분에서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이전과 같은 정치적 권위의 상징물이 아닌 재지의 무속인이 사용한 주술적인 성격으로 변화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신라의 관은 자료가 매우 풍부하여 그 재질의 차이로도 고분 피장자의 사회적 성격을 나타내기도 하는데, 순금제관은 모두 경주의 중심고분에서만, 그 밖의 중소형분 혹은 신라의 변경지역에서는 금동제나 은제관이 출토하는 것으로 보아 중앙으로부터 분여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 밖에 경북 의성 탑리 출토 금동관, 경주 황남대총 남분 출토 은제관에서처럼 새 깃털모양의 입식은 고구려와의 관계를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현재까지 알려진 가야 관(伽耶 冠)은 몇 예 없으나 신라관에 비해 사실적인 의장의 초화형 혹은 수지형의 입식이며, 신라관과는 다르게 일정한 형태적인 획일성을 찾기 힘들다. 가야의 금제관은 2점이 전해지는데, 하나는 고령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하는 호암미술관소장 금관으로 대륜부에 3단으로 이뤄진 4개의 초화형입식을 세우고, 곡옥으로 장식하였다. 또 하나는 일본인 小倉武之助가 수집하여 일본 동경국립박물관에 기증한 것으로 보주형 입식을 대륜부의 전면에 세우고 양옆에는 밖으로 휘는 새 깃모양 장식을 ‘V’자 모양으로 세운 형태이다.

금동관으로는 고령 지산동 32호분, 30-2호분, 성주 가암동 고분군 출토의 외관이 있고, 내관으로는 합천 옥전 23호 출토품이 있다. 고령 지산동 32호분 출토품은 입식이 1매로 불상의 광배모양을 띠며 작은 연봉오리모양의 장식이 있다. 대륜부와 입식의 가장자리, 그리고 입식의 전면에는 타출점렬문 2열과 그 사이에 타출방식으로 된 파상문을 장식하였다. 고령 지산동 30-2호 출토 금동관의 경우 대륜모양은 32호와 같으나 초화형입식을 3매 세웠으며, 입식의 형태는 매우 간략화되고 단순해진 연봉오리모양을 하고 있다.

위의 2점은 모두 대륜부가 완전히 돌아가지 않고 부분적인 것으로 보아 대륜부 내측에 천이나 가죽을 대어 머리띠를 만들고 전액만을 장식한 형태로 생각된다. 내관의 형태를 띤 합천 옥전 23호분 출토품은 무늬가 없는 테두리의 안에는 삼엽문으로 장식하고 정수리부분에 금동봉이 있어 술 혹은 깃을 달아 장식한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 三國時代 耳飾과 帶金具의 分類와 編年(李漢祥, 三國時代 裝身具와 社會相, 1999년)
  • 考古資料를 통해 본 우리 나라 古代의 冠(咸舜燮, 三國時代 裝身具와 社會相, 1999년)
  • 羽毛附冠飾의 始末(申大坤, 考古學誌 8, 1997년)
  • 高句麗考古學硏究(東潮, 1997년)
  • 신라와 가야의 裝身具(李仁淑, 韓國古代史論叢 3, 1992년)
  • 裝身具(윤세영, 한국사론 15, 국사편찬위원회, 198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