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남대총

황남대총

[ 慶州 皇南大塚 ]

지역 경주
황남대총(98호분) 전경

황남대총(98호분) 전경

현재 경주시내 중심가인 황남동(皇南洞), 황오동(皇吾洞), 노동동(路東洞), 노서동(路西洞) 일대에 소재한 대규모 고분군의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는 제98호분으로, 황남동에 소재한 신라 최대의 고분이라는 뜻으로 1980년 문화재위원회 회의에서 ‘황남대총(皇南大塚)’이라는 별칭이 부여되었다. 그러나 황남대총이라는 현재의 별칭은 2개의 무덤으로 구성된 고분의 특성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황남대총쌍분’이라고 고쳐서 불러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매장주체부 전경

매장주체부 전경

이 고분은 현존하는 고신라 최대의 표형(瓢形)봉토를 가진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이다. 이 고분의 발굴은 신라고분의 내부를 국민에게 보여주겠다는 교육적 의도에 따라, 대통령의 특별지시로 1973년부터 1975년까지 만3년6개월 여에 걸쳐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산하 한시적 조사단체인 경주고적발굴조사단(현 경주문화재연구소)에 의하여 체계적으로 발굴 조사되었다. 당시까지만 하여도 5~6세기대의 신라 돌무지덧널무덤에 대한 발굴자료는 일제강점기와 해방직후에 이룩하여 놓은 것이 거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들 대개는 일제의 발굴을 빙자한 보물찾기식의 조사와 비전문가에 의한 졸속 발굴작업 등이어서 돌무지덧널무덤의 구조나 매장내용을 과학적으로 해명할 수 있는 기본자료는 거의 없었던 셈이었다. 그러던 차에 황남대총을 제대로 조사하기 위하여 그 전초작업으로 외형이 조금 작은 천마총(황남동 제155호분)을 먼저 발굴하였고, 이어서 황남대총(황남동 제98호분)을 발굴하게 된 것이다. 이들 2기의 고분발굴은 한국 고고학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결정적인 전기가 되었고, 결과적으로 고신라 돌무지덧널무덤의 세부내용을 상세하게 이해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계기가 제공되었다.

황남대총 북분 매장주체부

황남대총 북분 매장주체부

고분의 외형으로 본다면, 황남대총은 2개의 원형봉토분이 결합되어 있는 표형분(瓢形墳)이다. 남분과 북분이 합쳐진 이 표형분은 의도적인 부부합장을 위한 것으로 판명되었는데, 남편무덤(夫墓)인 남분이 선축되고 부인무덤(婦墓)인 북분이 남분에 덧붙여 나중에 축조되어졌음이 양 고분 연결부위의 토층조사를 통하여 확인되었다. 남분의 봉토 아래에는 돌무지(積石部) 바로 밑에 장방형(長方形)의 으뜸덧널(主槨)과 방형(方形)의 딸린덧널(副槨)이 ‘T’자모양으로 설치되었는데, 으뜸덧널은 장축방향이 동~서(두향은 동침)로 놓여 있으며, 생토 표면을 약간 파내고 냇돌(川石)과 자갈을 고르게 펴서 바닥을 만들고 그 위에 주칠(朱漆)을 한 것으로 나타났다. 으뜸덧널은 3중의 덧널로 설치되었는데, 중간덧널 안에 다시 안덧널을 놓고 그 안에 나무널(木棺)이 안치되어 있었다.

이들의 규모는 가장 바깥 덧널의 길이, 너비, 높이가 6.5×4.1×3.5m이고, 안쪽 덧널은 3.6×1.0×0.8m 가량 된다. 딸린덧널은 으뜸덧널로부터 2m의 두께로 쌓아 올린 돌무지 벽을 사이에 두고 으뜸덧널의 서쪽에 설치되어 있는데, 길이 5.2m, 너비 3.8m로 방형에 가까우며 높이는 1.3m에 불과하다. 으뜸덧널의 바닥에는 잔자갈을 촘촘히 깔았지만, 딸린덧널은 생토면을 그대로 덧널 바닥으로 삼았다.

다음으로 돌로 주부곽을 둘러쌓는 데 있어서는, 통나무로 거대한 가구물을 먼저 짜 올리고 나서 사람머리크기의 냇돌로 돌무지를 축조해 올린 모습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돌무지를 중심으로 직경 80m, 높이 23m 정도의 초대형 봉분을 판축수법으로 쌓아 올렸는데, 봉분의 기저부를 돌아가면서 높이 3.3m, 두께 2.1m 정도의 둘레돌(護石)을 먼저 돌려놓고, 경주주변의 산흙생토를 이용하여 봉분을 축조하였다. 마지막으로 봉토의 표면에는 두께 40~50㎝의 점토를 고르게 덮어서 봉분을 마무리하였다.

유물은 으뜸덧널과 딸린덧널 내부에서는 물론이고 주부곽의 상부와 봉토내부 그리고 봉토의 정상부에서까지 다량으로 출토되었다. 나무널 안에서는 피장자가 착용했던 각종의 장신구가 출토되었는데 수지형입화식금동관(樹枝形立華式金銅冠)과 금제허리띠 등이 착용되어 있었다. 안덧널 내에는 별도의 부장품을 넣어두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는데 은관, 금제조익형관식, 금제, 은제의 용기류와 칠기, 유리용기, 금장식고리자루큰칼 등이 출토되었다. 딸린덧널 내에는 주로 토기류가 다량 매납되어 있었고, 비단벌레날개로 장식된 금동제안장 등과 같은 각종 마구류와 철기류가 많이 출토되었다. 으뜸덧널과 딸린덧널의 상부에서도 토기류, 철기류가 출토되었고 봉분정상부에서는 마구류 일괄품이 출토되었다. 남분에서 출토된 유물의 총계만 3만 점이 넘는 막대한 양이었다.

북분은 남분에 덧붙여진 것으로 남분의 봉토와 둘레돌의 일부를 파괴하고 설치되었다. 덧널을 지상에 설치하고 목조가구를 설치한 뒤 돌무지를 만드는 등의 기본적인 구조는 남분과 동일하지만 북분은 내부구조가 주부곽식이 아니라 외덧널(單獨槨)인 점이 남분과 다르다. 덧널은 방형에 가까운 장방형으로, 그 규모는 6.8×4.6×4.0m에 이른다. 역시 덧널의 둘레와 상부에는 냇돌로 돌무지를 만들었는데 냇돌에 주칠을 한 것이 많았다. 무덤의 중앙에는 남분과 마찬가지로 3중으로 된 덧널과 나무널을 안치하고 있었다.

나무널 안에는 피장자가 착장하고 있던 유물인 삼산녹각입식금관(三山鹿角立飾金冠), 금제허리띠 등이 있었으며, 안덧널(內槨) 안에 설치된 유물부장칸에는 은제허리띠를 비롯하여 각종 귀금속제용기 등이 출토되었다. 북분의 출토유물을 남분과 비교해 보면, 남분이 금동관을 착장하고 있는데 반해서 북분은 금관을 착장하고 있었고 남분에서는 특히 무기류와 마구류를 비롯한 각종 철기류가 다량 출토되었으며 특히 남분의 정상부에 마구류를 부장했다면 북분은 덧널상부봉토에 방추차를 매납하였다는 점이 다르다. 이 북분에서는 ‘부인대(夫人帶)’라는 명문이 침각된 은제허리띠가 출토되어 피장자는 여자로 추정되며, 남분에서는 유골 일부가 수습되었는데 감정결과 60세 전후의 남성이 주인공이고 여자어린아이가 순장(殉葬)되었음이 밝혀졌다.

이 황남대총의 축조연대는 대형 돌무지덧널무덤의 축조 상한연대를 결정하는 중요한 기준이 되고 있는데, 발굴조사자는 묘곽형식의 변천, 고식마구(古式馬具)의 등장시기, 신라토기의 편년, 북분에서 출토된 중국제 흑갈유자기소병(黑褐釉磁器小甁)의 매납시기 등을 근거로, 남분은 4세기 중엽경, 북분은 4세기말~5세기초경으로 추정하였다. 이에 반하여 고구려군남정설(高句麗軍南征說)이라는 고대사 연구성과를 근거로 삼는 귀고리, 신라토기편년 연구자나 혹은 중국에서의 고식마구 출현에 대한 다른 해석을 근거로 삼는 연구자들은 황남대총 남분을 5세기 중후반, 북분을 6세기초로 편년하고 있기도 하다. 또 다른 해석으로는 사료상에 나오는 왕세계(王世系)와 혼인관계 등을 비교하여 남분의 피장자를 내물마립간(奈勿麻立干)이나 눌지마립간(訥祗麻立干)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제시되어 있다.

참고문헌

  • 皇南大塚 : 積石木槨墳硏究의 새 指標(李鍾宣, 韓國考古學全國大會 發表文, 1996년)
  • 皇南大塚(南墳)發掘調査報告書(文化財硏究所, 1994년)
  • 皇南大塚(北墳)發掘調査報告書(金正基外, 文化財管理局, 198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