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레돌

둘레돌

[ 護石 ]

장군총

장군총

묘역(墓域)을 표시하거나 봉분의 흘러내림을 방지하기 위해 무덤의 가장자리에 돌려놓은 일종의 석열(石列) 혹은 석단열(石段列)을 말한다. 선사시대 혹은 고대에 있어서 봉토분의 경우 봉분의 가장자리에 큰 돌을 세우거나 작은 돌을 쌓거나 하는 예가 있다. 돌무지무덤의 경우도 가장자리에 배치하거나 쌓는 돌은 의식적으로 큰 돌을 사용함으로써 봉분의 가장자리를 보강하는 예가 많다.

유럽 신석기시대에 주로 대서양 연안과 지중해 근처에 분포하는 거석무덤 중에는 이와 같이 둘레돌을 두른 예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이른 바 널길무덤(羨道墓 : passage-grave)이나 돌방무덤(石室墳 : chambered tomb), 혹은 장형분(長形墳 : long-mound 혹은 long-barrow)이라고 불리는 돌무지무덤 혹은 흙무덤들은 거의 대부분 가장자리에 큰 판돌(板石)을 세우거나 아니면 괴석을 돌려놓는 경우가 많아 일종의 둘레돌이라고 할 수 있다.

합천 옥전M6호분

합천 옥전M6호분

한국에서는 청동기시대 고인돌(支石墓) 중에 일종의 묘역을 표시하는 구획석이 정연하게 돌려진 예가 많다. 특히 창원 덕천리(德川里) 1호 지석묘와 같은 경우 꽤 넓은 장방형의 제단과 같은 묘역을 다듬은 돌로 석축한 예가 있고, 사천 이금동(梨琴洞) 유적에서는 방형 및 장방형의 묘역을 연결한 대규모 묘역이 구획된 바도 있다.

그러나 초기철기시대를 지나 원삼국시대가 되면 한반도 중부 이남지역은 주로 널무덤(木棺墓)이나 덧널무덤(木槨墓)이 유행하게 되는데, 이들 묘제는 일종의 봉토분이긴 하지만 봉분을 보호하는 둘레돌을 돌려 묘역을 구획하는 일이 거의 없다. 그 대신 중서부지방과 호남지방에는 도랑을 파서 묘역을 구획하는 주구무덤(周溝墓)을 흔히 볼 수 있다.

선덕왕릉

선덕왕릉

삼국시대에 들어서면 본격적으로 둘레돌이라고 할 만한 것이 등장하여 발전한다. 둘레돌은 백제지역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고 주로 고구려와 신라, 가야의 고분에서만 발견된다. 고구려의 초기 돌무지무덤들은 무기단식의 방형(方形)·장방형(長方形)·원형분(圓形墳)들로 대부분 가장자리 돌은 대석(大石)을 사용하여 돌무지분구를 쌓는다.

이러한 예를 본격적인 둘레돌이라고 말할 수는 없고 고구려 지역에서 제대로 된 둘레돌은 정비된 기단식 돌무지무덤에서 발견된다. 유명한 돌무지무덤인 장군총(將軍塚)이나 태왕릉(太王陵)의 경우처럼 길이 2m가 넘는 장대석을 드문드문 배치시켜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둘레돌이 형태적으로나 기능적으로 가장 잘 발달한 곳은 신라와 가야지역이다. 특히 둘레돌은 경주를 중심으로 한 신라의 영역에서 먼저 형태를 갖추어 낙동강 이동(以東)의 영남지역에서 두드러지게 발전하고 나머지 영남지역에도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되는 고분문화요소라고 추측된다. 신라의 영역에서 가장 오래된 둘레돌 중의 하나는 울산(蔚山) 중산리(中山里) 고분군 74·75호묘라 할 수 있다. 4세기초로 편년되는 이 무덤은 고운 사질점토로 덮은 방형의 봉분을 보호하기 위해 직경 0.5-1.0m 가량 되는 큰 냇돌을 쌓아 놓아 둘레돌의 구실을 하게끔 했다.

4세기 후반경의 신라지역만 하더라도 봉분이 정형화되지 않아 분형이 타원형의 형태를 띠기도 하고, 둘레돌도 가지런하게 배치되지 못한다. 그러나 5세기경에 접어들면 원형의 봉분이 정형화되고 봉분의 가장자리를 일주(一周)하거나 아니면 낮은 쪽으로만 둘레돌을 돌리게 되는데 일정한 규격의 냇돌(川石)이나 깬돌(割石)을 사용하여 3단 혹은 4단으로 정연하게 축조한다. 이와 같은 정형화되기 시작하는 단계에는 보통 한 무덤에 하나의 봉분을 덮고 하나의 봉분만을 둘레돌로 두르게 된다.

하지만 표형분(瓢形墳)이나 여러덧널식(多槨式)무덤이 등장하게 되면 개별무덤의 봉분과 봉분, 둘레돌과 둘레돌이 불가피하게 겹쳐지게 된다. 보통 표형분의 경우에는 선대의 봉분을 일부 헐고 둘레돌도 일부 뜯어내어 표형의 봉분을 조성하게 되는데, 여러덧널식 무덤에서는 기왕의 둘레돌과 봉분을 헐지 않고 바로 묘곽을 추가한 후 반원형의 둘레돌을 부가하게 된다. 이상과 같은 정비된 둘레돌의 형태와 규칙적인 추가배치의 양상은 낙동강 이동의 제 지역으로 퍼져나간다. 그러나 낙동강 이서 지역에서는 봉분의 가장자리로 둘레돌이 돌려지긴 하지만 경주지역에서처럼 여러 단을 석축한다든지 아니면 규칙적으로 추가된다든지 하는 양상을 보여주지는 못한다.

둘레돌이 가장 정비된 형태로 등장하는 것은 신라가 통일을 전후한 시기부터이며, 잘 다듬은 화강암 판돌과 기둥돌로 돌려진 통일신라 왕릉의 둘레돌로 발전하게 된다. 무열왕릉(武烈王陵)과 선덕왕릉(善德王陵)은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하여 봉분의 가장자리를 3-4단 석축하는 것으로 대신하고 있다.

그러나 신문왕릉(神文王陵)의 경우는 잘 다듬은 석재를 사용하여 3-4단을 가지런히 쌓고 삼각형의 지탱석(支撑石)을 등간격으로 세워 놓았다. 이어 가장 발전된 형식을 보이는 경덕왕릉(景德王陵)의 경우는 석축하는 둘레돌 대신 판돌을 세우고 판돌과 판돌 사이에는 기둥돌을 세운 뒤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를 조각하였다. 이와 같이 정형화된 왕릉의 둘레돌은 고려와 조선시대에도 계승되어 봉토 둘레돌의 기본이 되었다.

참고문헌

  • 新版韓國美術史(金元龍·安輝濬, 서울大學校出版部, 1993년)
  • 新羅古墳硏究(崔秉鉉, 一志社 199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