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방무덤

돌방무덤

[ 石室墳 ]

돌방무덤(石室墳)은 굴식(橫穴式) 매장시설(埋葬施設)의 일종으로, 굴식이란 구덩식(竪穴式)에 상반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는데 구덩식이 매장시설을 축조하고 난 뒤 시신과 부장품을 위에서 아래로 하강 안치하는 데 비해 굴식이란 무덤방을 만들고 생시에 실내를 출입하듯 무덤방의 측면을 개방하여 들어갈 수 있도록 하였다. 따라서 돌방무덤이란 밀폐된 덧널(槨)이 아니라 출입이 가능한 방(室)을 의미하며 굴계의 돌방무덤이 채용되는 동기는 덧장(追加葬)을 하기 위함이다.

예컨데 구덩식돌덧널에 반복 매납을 하려면 봉분을 헐고 덧널을 뜯어야 하므로 추가장 자체가 어렵기 때문에 굴계무덤이 필요한 것이다. 유럽지역에서는 신석기시대 거석무덤에서도 추가장을 한 이러한 묘제를 볼 수 있지만 중국을 포함한 동북아시아 고대묘제에 있어서는 어느 지역이건 구덩계 매장시설로부터 굴계 매장시설로의 변화를 볼 수 있다.

돌방무덤은 구조적으로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과 앞트기식돌방무덤(橫口式石室墳)으로 구분된다. 굴식이 무덤방(墓室 혹은 玄室)으로 들어가는 통로를 석축하여 복도처럼 만든 널길(羨道)이 있는 데 비해 앞트기식은 무덤길(墓道)은 있으되 석축한 널길이 없이 무덤방의 한쪽 벽을 뜯고 출입할 수 있도록 한 돌방무덤이다. 보통 돌방무덤이라면 굴식돌방무덤이 보편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앞트기식돌방이란 낙동강 중하류역의 신라·가야영역에서 전통적인 구덩식돌덧널이 주변 굴식돌방무덤의 영향으로 변형되어 출현한 돌방무덤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특히 일본 고고학계에서는 앞트기식 중에 수혈계횡구식석실(竪穴系橫口式石室)이라는 개념을 따로 정의하는 것이 보통이다. 수혈계횡구식이란 횡혈계횡구식과 상반되는 개념으로 구덩식돌덧널의 전통이 많이 남아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앞트기식돌방의 초기형식은 아무래도 구덩식돌덧널과 구조적으로 유사하기 마련이고 굴식돌방과 공존하면서 그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으므로 수혈계와 횡혈계의 구분은 앞트기식 매장시설의 테두리 내에서 서로 다른 형식으로 정의될 수 있을 뿐이지 용어상 구분하는 것은 혼란을 초래할 우려가 있다.

돌방무덤의 기원은 중원지역으로부터 확산된 묘제의 영향으로부터 찾아야할 것이다. 특히 전국시대 이후 공심전묘(空心塼墓)로부터 한대(漢代) 요동지방을 거쳐서 낙랑지역까지 확산되어 들어오는 굴계(橫穴系)묘제의 영향을 배제하고서는 삼국시대 돌방무덤의 기원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런데 중국식 굴계묘제란 한국의 돌방무덤과는 축조 재료가 다르다. 요령지방에 들어온 각석묘(刻石墓)나 낙랑지역에까지 확산되는 나무방무덤(木室墓), 벽돌무덤(塼築墳) 등과 같은 굴계묘제의 영향을 받아 축조재료를 깬돌(割石)로 변형시켜 축조기술을 발전시켜 나간 것이 삼국시대의 돌방무덤이라고 할 수 있다.

삼국의 제 영역에서 이른 시기의 묘제는 모두 구덩계 매장시설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시차는 있으나 일정시기가 되면 삼국의 제 고분은 굴계의 돌방무덤으로 바뀌게 되는 데 이러한 변화는 물론 고구려지역에서 가장 먼저 시작되었을 것이고 다음으로 백제지역에서 채용하게 되며 양국에서 발전시킨 굴식돌방이 신라·가야지역에 영향을 주어 이 지역에서도 앞트기식·굴식돌방무덤이 축조되기 시작한다.

고구려돌방무덤(高句麗石室墳) : 고구려의 영역 안에서 굴식돌방이 최초로 축조되는 것은 현재의 자료로서 4세기 전반대의 어느 시점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돌무지무덤이 예맥족의 전통적인 묘제라면 이 돌방무덤은 고구려인 고유무덤형식이 아니라 요동지역과 낙랑·대방지역에 들어와 있었던 중국 굴계묘제를 받아들인 것이다. 즉 고구려가 성장하면서 이 지역을 점령하여 영토로 삼은 뒤부터 돌방무덤이 벽화와 함께 자연스럽게 고구려의 무덤형식으로 흡수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고구려 고유묘제인 돌무지무덤이 최고로 발전된 형식이 되는 시기부터 돌방무덤이 축조되기 시작하고 고구려가 평양으로 도읍을 옮긴 뒤에는 고구려인의 주묘제(主墓制)로 정착하게 된다.

고구려의 돌방무덤은 후기 도성인 평양을 중심으로 대동강과 재령강유역에 넓게 분포하고 중기 도성인 집안(集安) 일대에도 많은 돌방무덤이 발견된다. 압록강 중류역의 집안 부근에 분포하는 굴식돌방무덤 중에는 평양 천도 이전의 것도 있지만 천도 이후에 축조된 것도 많이 있다. 통구평야 곳곳의 고분군과 그 안의 수많은 고분 중에는 굴식돌방무덤도 많이 분포한다. 통구평야에는 환문총(環文塚)이 있는 하해방(下解放) 고분군, 각저총(角抵塚)과 무용총(舞踊塚) 등이 포함된 우산하(禹山下) 고분군을 비롯하여 산성하(山城下) 고분군, 마선구(麻線溝) 고분군, 만보정(萬寶汀) 고분군 등에는 돌방무덤이 분포하며 이들과는 약간 떨어져 존재하는 장천지구(長川地區)에도 벽화무덤이 포함된 많은 돌방무덤들이 축조되어 있다.

평양을 중심으로 한 대동강 중류와 하류역을 비롯하여 황해북도 북부의 재령강 유역은 돌방무덤이 조밀하게 분포하는 지역이다. 물론 이 지역의 돌방무덤들은 평양으로 천도한 이후 고구려인의 손으로 축조된 것이 대부분이지만 그 이전에 해당하는 것도 있다.

고구려가 4세기 초에 이 지역을 장악한 이후에도 낙랑·대방의 지배자 집단들이 잔류하여 일종의 자치권을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하여 대동강유역을 직할지로 경영하기 전까지 이 지역은 상당 기간 동안 고구려에 복속한 중국 변군(邊郡)의 관리들에 의해 통치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러한 사정을 반영하는 중요한 고분이 안악(安岳) 3호분과 덕흥리(德興里) 고분과 같은 예이다.

이 두 고분은 모두 벽화무덤이고 묵서(墨書)로 된 묘지명(墓誌銘)이 발견되었다. 묘지명에 나타나는 안악 3호분의 피장자는 동수(冬壽)라는 역사적인 인물인 데 『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당시 요동을 지배하고 있던 모용씨(慕容氏)에 반하여 고구려에 망명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평양에서 서쪽으로 20여 ㎞ 떨어진 남포시 덕흥리 고분의 경우 피장자인 □□鎭이란 인물은 묵서명에 따르면 중국식의 관직과 고구려의 관위(官位)를 함께 가진 것으로 나타나 있다.

안악 3호분과 덕흥리 고분은 내부구조와 벽화의 내용이 서로 차이가 있다. 안악 3호분이 요동지역에서 발견되는 위진시대(魏晋時代) 벽돌무덤이나 돌방무덤의 구조 및 벽화내용과 상당한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면 덕흥리 고분은 고구려식 돌방무덤의 초기형 구조에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안악 3호분의 축조시기인 4세기 중엽에서 덕흥리 고분의 5세기 초까지 이 지역 돌방무덤의 성격과 변화는 고구려 돌방무덤과 벽화고분의 기원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라고 볼 수 있다.

고구려 돌방무덤은 4-7세기라는 꽤 오랜 기간 동안 주된 매장시설로 자리잡아 발전되어온 만큼 그 구조적인 특징과 시기적인 변화를 요약해서 말하기는 어렵다. 특히 집안일대와 독로강유역, 그리고 대동강유역의 돌방무덤들 사이에 지역적인 차이도 있고 피장자의 신분이나 관위에 따라서도 축조방법이나 내부구조의 차별이 있기 때문에 더욱 일률적으로 말하기 어렵다. 고구려 돌방무덤의 내부구조는 보통 평면의 형태와 천장의 구조를 통하여 재구성된다.

특히 평면의 형태는 벽화의 내용과 함께 돌방무덤의 시기적 변화를 비교적 잘 보여준다. 천장 구조에 따라 크게 활천장, 모죽임천장, 납작천장(平天障) 등의 형식이 있다. 활(穹窿形)천장은 네 벽을 계단처럼 안쪽으로 밀어내어 폭을 줄임으로써 도움식 천정을 만든 것이고 모죽임천장(抹角藻井)은 천장의 네 귀에 삼각형의 고임을 받치면서 올라가 맨 위에 하나의 뚜껑돌을 얹어 놓은 형식이다.

평면형태를 기준으로 하여 고구려 석실분을 크게 외방무덤과 여러방무덤으로 나눌 수 있다. 외방무덤(單室墓)은 중심방(主室) 또는 널방(玄室) 하나에 널길이 달려 있는 것으로 널길의 길이와 위치에 따라 서로 다른 형식으로 나뉘어 질 수 있다. 여러방무덤(多室墓)의 대표적인 것은 덕흥리 고분, 모두루총(牟頭婁塚), 장천 1호분(長川1號墳)과 같이 앞방(前室)과 뒷방(後室)인 두방(二室)으로 구성되고 두 방을 연결하는 통로와 앞방에 난 무덤길이 일직선으로 배치된 두방무덤(二室墓)이다.

이에 비해 천왕지신총(天王地神塚), 용강대총(龍岡大塚) 등은 앞방 좌우에 옆방(側室)이 붙은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마선구 1호분(麻線溝1號墳)처럼 묘길 양쪽에 옆방이 붙은 구조도 있다. 각저총(角抵塚)과 무용총(舞踊塚)은 무덤길에 난 양쪽 방이 하나로 합쳐져 옆으로 긴 앞방처럼 된 구조를 하고 있다. 예외적으로 감실총(龕室塚)이나 약수리(藥水里) 고분과 같이 벽감(壁龕)이 돌출된 구조도 있고 집안(集安) 삼실총(三室塚)과 같은 것은 같은 크기의 방을 ‘ㄱ’자 모양으로 3개 배치한 특이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대개 평면형에 따라 고구려 돌방무덤의 시기적인 변화를 보면 복잡한 여러방무덤의 구조에서 간단한 외방무덤의 구조로 통일되는 과정을 볼 수 있다. 요동지방의 나무방무덤(木室墳)이나 돌방무덤 혹은 벽돌무덤을 직접 계승한 안악 3호분처럼 앞방, 뒷방, 널방이 있고 널방에 양 옆방이 붙고 회랑까지 가진 구조에서 앞·뒷방을 가진 무덤으로 변천하고 6세기부터는 긴 널길을 가진 외방무덤만이 축조된다. 그래서 고구려의 후기고분 단계에는 축소된 하나의 널방에 긴 널길이 연결되어 있는 외방무덤만 보이는 것이다.

백제돌방무덤(百濟石室墳) : 백제의 영역에서 돌방무덤이 매장시설로 쓰이게 되는 것은 고구려나 낙랑지역과 가까운 한강유역이 먼저가 아닐까 한다. 마한·백제지역에서 굴식돌방무덤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시기와 그 확산 경위에 대해서는 불분명한 점이 많다. 최근에 들어서 이 지역 굴식돌방무덤들이 꽤 많이 조사되어 각 지역별로 연구되고 있지만 마한·백제영역을 총괄하여 그 전개과정을 설명하기에는 아직 어려운 점이 많다. 마한·백제의 영역에서 굴식돌방무덤의 분포 상황에 따라 크게 3개의 지역군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로 서울 송파구 가락동, 석촌동, 방이동 일대를 중심으로 하는 한강유역권, 둘째로 공주와 부여 일대를 중심으로 논산과 익산지역을 포함하는 금강유역권, 셋째로 장성, 나주, 함평, 무안, 영암 일대를 포함하는 영산강유역권이 그것이다.

한강유역권의 돌방무덤은 서울 가락동(可樂洞)과 방이동(芳荑洞) 일대에 분포한다. 가락동 고분군에서는 3호분에서 6호분까지 모두 4기의 돌방무덤이 낮은 구릉의 정상부와 경사면에서 발굴되었다. 이들은 직경 10m에서 18m 가량 되는 원형의 봉토무덤들이고, 매장시설은 정방형이나 장방형의 평면형에 남쪽벽으로 널길(羨道)이 나있는 굴식돌방무덤이다. 정방형의 돌방에는 널길이 동쪽 벽에 치우친 평면 ‘ㄱ’자형이고 장방형의 경우는 널길을 남쪽 짧은 벽의 중앙에 내어 평면이 ‘모’자형이다.

이와 같은 널방과 널길 배치에 의한 평면형의 차이에 따라 천장의 모양도 다르게 나타난다. 정방형 돌방무덤의 경우 네 벽이 함께 안으로 경사져서 올라가 폭이 매우 좁아진 천장을 판석(板石) 1장을 사용하여 덮는다. 이에 비해 장방형 돌방무덤의 경우 장벽(長壁)쪽에서 안으로 휘어져 들어가고 단벽은 수직벽을 유지하게 되며 긴 판석 3-4장으로 양 장벽에 걸쳐서 천장을 만든다. 방이동 고분군 돌방무덤의 구조도 대체로 가락동 고분군과 비슷하다. 다만 특별한 것이 방이동 6호분의 구조라고 할 수 있다. 이 고분은 방형의 돌방에 ‘모’자형으로 널길이 난 형태인데 돌방의 중앙에 돌을 쌓아 격벽을 만들어서 널방을 동쪽과 서쪽으로 분할한 특이구조를 가지고 있다.

가락동·방이동 일대의 굴식돌방무덤은 백제의 영역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해당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 백제 전기의 굴식돌방무덤에서는 출토된 유물이 거의 없어 연대를 정확히 알기는 어려운 형편이다. 다만 집안 일대의 고구려 돌방무덤이 출현하는 시기나 낙랑의 영역에서 벽돌무덤이 돌방무덤으로 변화되는 단계의 연대를 4세기경으로 본다면 그 영향을 받아 한강유역에서 돌방무덤이 출현하는 것은 그보다는 약간 늦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이들 전기 백제의 지배자 집단의 무덤으로 한강유역에 존속한 기간은 웅진 천도 이후로 내려갈 것 같지 않으므로 4세기말에서 5세기 중엽경에 해당되리라고 추측된다. 그러나 이 돌방무덤들은 그 구조와 거기서 출토된 짧은굽다리접시(短脚高杯) 등의 토기류들을 근거로 백제의 것이 아니라 진흥왕의 한강유역 점령 후에 축조된 신라의 돌방무덤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서울지역의 ‘ㄱ’자형으로 널길을 낸 방형의 돌방무덤은 웅진 천도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발전하여 왕릉의 매장시설로도 사용된 것 같다. 공주(公州)의 송산리(宋山里) 1·2·3·4호분은 평면형이나 기본적인 축조 방식이 가락동·방이동 고분군의 정방형굴식돌방무덤의 구조와 동일하다. 특히 널길 앞턱에 문지방돌을 두고 무덤방 바닥에 돌을 깔아 놓은 가락동 3호분의 구조는 송산리 4호분으로 연결된다.

공주지역의 굴식돌방무덤은 이전의 것보다 훨씬 발전된 양상을 보여준다. 돌방바닥에 벽돌을 깔거나 동서 양편에 널받침(棺臺)을 설치하는 등의 변화를 보여준다. 특히 송산리 29호분과 같은 경우는 굴식돌방무덤의 기본구조를 가지면서 돌방의 벽을 반듯반듯하게 벽돌모양으로 가공한 돌을 사용하여 쌓았다.

웅진시대(熊津時代)의 굴식돌방무덤은 구조적인 면에서 남조계(南朝系) 벽돌무덤의 영향을 받는 것 같다. 벽돌로 축조된 고분의 영향으로 굴식돌방무덤의 널방은 장방형의 터널모양으로 변화되고 널길(羨道)을 남쪽 단벽(短壁) 중앙에 내는 방식을 취하게 된다. 교촌리(校村里) 고분군과 보통리(甫通里) 고분군의 굴식돌방무덤, 능치고분(陵峙古墳), 시목동(木洞) 고분 등 공주일대에서 발견되는 굴식돌방무덤들은 아치형 천장을 가진 터널식벽돌무덤에 가깝도록 축조되어 있다. 벽돌과 돌이라는 재료의 차이 때문에 자연스런 아치형은 만들지 못하고 벽면 상단의 폭을 조금씩 줄여 뚜껑돌을 덮거나 맞배식 천장으로 만든 것도 있다.

사비시대(泗時代)의 굴식돌방무덤은 웅진시대의 것을 더욱 발전시켜 나간 형태를 보여준다. 백제 고유양식의 굴식돌방무덤이 가장 발전된 형태로 전개되는 과정에서 고구려의 굴식돌방무덤 혹은 무덤벽화 요소를 받아들이게 되는 것 같다. 특히 백제 중심지의 고분군인 능산리(陵山里) 고분군의 굴식돌방무덤들은 그 축조기법 상으로 주변지역의 굴식돌방무덤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세련되었다. 이것들의 내부 널방과 널길은 화강암을 물갈이 한 정제된 석재(石材)를 사용하여 축조하였다. 무덤방은 긴 장방형의 평면에 무덤방의 남쪽벽 중앙에 널길이 2중으로 연결되어 무덤 밖으로 통한다.

널방의 천장은 각 무덤에 따라 다르다. 규모가 가장 큰 중하총은 정제된 석재를 사용하여 전축분의 아치형 천장을 모방하였고 동상총은 맞조림식천장(平斜天障이라고도 함)이라 하여 긴 판돌을 양쪽 긴 벽 위에 세우고 그 위에 큰 판돌을 덮는 구조이다. 이와 같은 천장 조립방법은 공주에서 발생하여 부여지역의 고분에 계승된 것으로 보여진다. 능산리 고분군에서 굴식돌방의 널길은 2중으로 연결되며 바깥쪽 입구가 넓어지는 형태인 점이 주목되는 데 이와 같은 형태요소는 고구려지역의 외방무덤(單室墓)이 가진 널길의 구조와 어떤 관련성이 있는 듯하다.

능산리 고분군 동하총은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벽화무덤으로 유명하다. 고구려 후기 무덤벽화들처럼 물갈이한 화강암에 직접 그렸고, 네 벽에는 각각의 방위에 따른 사신도(四神圖)를, 천장에는 나는 구름(飛雲文)과 연꽃무늬를 묘사했다. 벽화는 물론 고구려식 소재이지만 필치는 백제식의 부드러움이 보인다. 능산리 고분군의 굴식돌방에는 널받침(棺臺)이 설치된다. 동하총과 같이 중앙에 하나의 넓은 널받침을 만들기도 하지만 동상총처럼 2개의 널받침을 나란히 설치하기도 한다.

공주천도(公州遷都) 이후에 백제의 중앙귀족의 전용무덤으로 사용되던 굴식돌방무덤이 주변지역으로 확산되어 재지 수장층의 무덤으로도 사용된다. 특히 백제가 전북과 전남의 재지 세력집단들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해 나감에 따라 백제중심지역과 제 지역은 문화적으로도 보다 긴밀한 관계성을 가지게 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역사적인 맥락에서 전북·전남일대의 재지 세력집단의 지배계층들은 토착묘제(土着墓制)인 독널무덤(甕棺墓)의 사용을 폐지하고 굴식돌방무덤의 채용이 적극 추진되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5세기 후반경부터 금강하류역에도 굴식돌방무덤이 나타난다. 부여, 논산, 익산 등의 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군산, 부안, 완주, 남원일대까지 굴식돌방무덤이 확산된다. 그중 익산지역에서 금동제 관모(冠帽)와 신발(飾履), 중국제 청자가 출토된 입점리 1호분(笠店里1號墳)의 존재는 매우 의미가 있다. 이 무덤은 무덤의 구조상으로 가락동 3호분이나 송산리 4호분과 연결될 수 있는 방형의 굴식돌방무덤이라는 점에서 비교적 이른 시기에 속하는 돌방무덤의 구조를 따르고 있다. 또한 이 고분에서 출토된 중요유물이 백제 중앙으로부터 하사 받은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피장자는 백제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토착세력집단의 지배자로 이해하는 것은 당연한 것 같다.

익산지방에는 또한 익산(益山) 쌍릉(雙陵)이라고 하는 왕릉급에 가까운 규모의 무덤이 있다. 연대를 알 수 있는 출토유물이 없지만 그중 대왕릉(大王陵)의 내부구조만으로 본다면 능산리 고분군의 굴식돌방무덤과 비교될 수 있으므로 사비시대의 무덤일 가능성이 높다. 익산지역에는 규모와 부장유물 상으로 보아 세력이 큰 집단의 수장묘로 굴식돌방무덤의 존재가 인정된다.

그러나 금강하류역의 나머지 굴식돌방무덤들은 규모도 작은 편이고 돌덧널이 앞트기식돌방무덤(橫口式石室墳)과 혼재해 있는 양상을 보여준다. 이는 익산지역의 굴식돌방무덤들을 제외하고는 제 지역집단의 세력이 미미하였으며 백제 중심지문화의 수용도 제한적이었음을 말해준다. 대개 금강하류역과 전북일대의 굴식돌방무덤들은 웅진시대로부터 발전한 터널형 굴식돌방무덤이 대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데 무덤의 축조방법에 있어서는 백제 중심지의 세련된 기법에는 따르지 못한다.

영산강유역은 다른 어떤 지역보다도 독널(甕棺)을 매장시설로 하는 분구묘의 발전이 늦은 시기까지 지속되어 왔다. 고분문화상으로 보아 토착문화의 전통이 늦게까지 남아 있다는 것은 토착세력집단의 자립성도 강하게 유지되었다는 사실을 증명해 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지역에도 5세기 말이나 6세기 초가 되면 굴식돌방무덤이 지배계층의 무덤으로 수용되어 재지적인 전통과 혼합되는 양상을 보여준다.

매장시설로서 백제의 중앙지배집단의 굴식돌방을 채택하지만 봉분과 관련된 구조적인 특징이나 부장유물은 이 지역의 전통을 보여 준다. 봉분의 규모만으로 본다면 공주나 부여의 왕릉급에 뒤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이 지역 정치체의 자율성과 관련하여 시사하는 바가 많다. 봉분의 형태가 방형 혹은 장고형을 취하고 분구를 약간 조성한 뒤에 매장시설을 만드는 방식도 이 지역의 전통적인 분구묘 축조방법을 따르는 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토기와 같은 부장유물도 중심지역의 영향에 의해 변형되지 않고 지역적인 전통을 유지하고 있는 점도 주목해야할 일이다.

이 지역의 굴식돌방무덤으로 나주 송제리(松堤里) 고분은 방형 돌방에 중앙에 널길이 나고 궁륭형(穹窿形)의 천장구조를 가지고 있어서 서울지역의 굴식돌방무덤을 직접 계승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해남 월송리(月松里) 조산고분(造山古墳), 장성 영천리(鈴泉里) 고분 등도 천장의 구조가 다를 뿐 방형에 가까운 널방의 한쪽 벽 가운데로 널길을 낸 것인데 널방의 입구 좌우에 돌기둥을 받쳐 놓은 독특한 구조를 보여 준다.

이와 같은 속성만으로 본다면 경남 서남부지역으로 확산되는 굴식돌방무덤의 기원지는 전남지방일 가능성이 있다. 광주 명화동(明花洞) 고분과 월계동(月桂洞) 고분은 전방후원형(前方後圓形)이라고도 하는 장고모양의 봉분을 가졌으며 매장시설은 굴식돌방무덤의 구조이다. 이들 고분은 봉분의 가장자리에 도랑을 파고 그 안쪽을 따라 원통모양의 하니와(埴輪)를 줄지어 묻어 놓았다. 장고모양의 봉분 형태와 하니와의 매설은 한국의 삼국시대 고분에서는 잘 볼 수 없는 것이며 일본지역의 고분에서는 흔히 보는 요소이기 때문에 매우 흥미로운 자료이다.

금동신발과 은장식고리자루칼(銀裝環頭刀)이 출토된 나주 복암리 3호분(伏岩里3號墳)은 장방형의 굴식돌방을 채용하였으나 전통적인 봉분의 형태인 방형 봉분을 가지고 있으며 돌방 안에 4개의 합구식독널(合口式甕棺)을 안치하였다. 이와 같이 전남지방의 후기 고분문화를 대표하는 매장시설로서 굴식돌방의 출현은 백제 중앙 지배계층의 고분문화를 적극 수용한 결과로 볼 수 있지만 이 지역의 강한 전통과 융합되어 독자적인 고분문화로 전개됨을 알 수 있다.

신라·가야돌방무덤(新羅·伽耶石室墳) : 신라·가야지역에서는 앞트기식돌방이 먼저 시작되고 굴식돌방이 뒤에 채용되었다. 그러나 이 두 무덤양식은 먼저 시작된 지역이 서로 상이하기 때문에 확산되는 방향이 다르다. 그래서 일부지역은 앞트기식보다 굴식이 먼저 시작되는 경우도 예상된다. 앞트기식은 낙동강에 면한 동안지역에서 시작되어 이동지역으로 먼저 확산되고 다시 낙동강을 건너 서안지역으로 들어오게 된다.

그러나 굴식돌방은 영남지역 내에서도 먼저 시작되는 지역이 둘로 나뉘어져 있다. 한쪽은 마한·백제지역으로부터 가까운 진주를 비롯한 서부 소백산맥 근처가 하나의 출발점이다. 이에 비해 고구려 무덤양식의 영향을 받는 낙동강동안 지역에서는 굴식돌방이 최초로 채택되는 지역이 동북부일 가능성이 높다. 경주의 신라 중앙지역을 중심으로 생각한다면 앞트기식이 낙동강유역에서 출현하여 경주지역에로 확산된다면 굴식돌방은 경주 지역에서 먼저 채택하여 낙동강유역으로 퍼져나간 것 같다.

영남지방 앞트기식돌방무덤의 초기형은 구덩식돌덧널무덤(竪穴式石槨墓)과 많이 닮았으나 추가장이 가능한 일종의 굴계고분(橫穴系古墳)이다. 방을 여유 공간이 있고 문을 가진 구조로 보고, 덧널을 그렇지 않은 것으로 본다면 영남지방의 앞트기식 초기형은 앞트기식돌덧널무덤(橫口式石槨墓)으로 볼 수 있으나 대개는 그냥 이것까지 돌방무덤으로 부르고 있다. 이것은 고구려나 낙랑 혹은 백제의 굴계무덤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축조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기원지역 중 어느 곳에서도 앞트기식돌방무덤이 발생하였다고 볼 수 없기 때문에 이 무덤양식은 신라·가야인의 발명품이 아닐까 한다. 물론 충남과 전북지역, 즉 금강유역권에서 앞트기식돌방무덤의 존재가 확인되지만 이들은 영남지방 초기형과 비교하여 규모도 훨씬 작을 뿐만 아니라 연대가 이르다고 볼 수 없기 때문에 이 지역을 앞트기식돌방무덤이 발생한 지역이라고 하기 어렵다.

최초의 앞트기식돌방무덤은 재래식 돌덧널의 한쪽 벽을 입구로 삼은 구조를 하고 있다. 창녕 교동 3호분과 같은 예가 그것인데 고구려나 백제 굴식돌방무덤의 영향을 받아 구덩식돌덧널무덤을 변형시킨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교동 3호분과 같은 것은 돌방 내부에 덧널 구조의 흔적 요소도 확인된다. 교동 3호분은 긴 장방형의 돌방 북쪽 단벽을 터서 입구로 만들었는데, 돌방은 물론 석축한 것이지만 내부에는 덧널의 가구처럼 기둥을 세우거나 기둥모양의 목재를 몇 개 바닥에 깔았던 흔적이 확인된다. 봉분 밖으로 무덤길(墓道)을 낸 흔적이 분명하며 마치 굴식돌방무덤처럼 무덤길을 석축하였지만 뚜껑돌을 덮은 널길(羨道)이라고 할 수는 없다.

낙동강중류역에서 지배자집단의 무덤으로 출현한 앞트기식돌방무덤은 동남쪽으로 확산되고 6세기 전반경에는 경주지역에서도 채용하게 된다. 5세기 중·후엽 경에 출현한 앞트기식돌방무덤은 6세기대에 접어들면서 주검받침(屍床)이나 널받침(棺臺)의 구조도 가지게 되고 평면형도 방형에 가까워지는 등 굴식돌방무덤의 구조에 가까워진다. 주검받침은 6세기 전반에 속하는 양산 부부총(梁山夫婦塚) 단계부터는 확인되며 그 이전부터 사용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런데 낙동강 서안의 가야지역에서는 신라지역에서 이미 상당한 발전을 이룬 앞트기식돌방의 형태가 유입된다. 낙동강서안지역에 신라의 세력이 침투한 이후에 만들어진 합천 저포리 고분군, 창리 고분군, 삼가 고분군 등의 앞트기식돌방무덤은 창녕과 같은 신라지역에서 완성된 형태라고 추측된다. 굴식돌방무덤이 쓰이게 된 6세기 전반 이후에도 앞트기식돌방무덤은 굴식돌방무덤보다는 하위무덤의 매장시설로서 여전히 유행한다.

굴식돌방무덤은 낙동강 동안과 서안 양쪽에서 거의 비슷한 시기에 발생한 듯하다. 굴식돌방으로 신라지역에서 가장 이른 고분 중 하나는 6세기 중엽에 가까운 전반의 냉수리(冷水里) 고분의 예가 있고 일찍부터 고구려의 영향이 미쳤던 신라 동북부의 순흥(順興)지역에서 발견된 어숙술간묘(於宿述干墓)와 읍내리 고분 등이 있다. ‘기미중묘(己未中墓)’라 불리우는 읍내리(邑內里) 고분은 묵서명(墨書銘) 중에 나오는 기미년(己未年)의 연대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이 경상북도 북부지역은 가장 이른 시기에 신라지역으로 굴식돌방이 확산되어 들어오는 후보지역 중 하나이다.

냉수리 고분의 경우 장방형의 널방 평면에 터널형의 입체구조를 가지며 중앙널길식(中央羨道式)이다. 널길의 길이가 매우 길고 널방 네 벽 모두 두껍게 회를 발라 놓았다. 구조적인 면에서 특이한 점은 널방 입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위치에 널길의 측벽으로 통하는 긴 장방형 옆방을 설치하였다는 사실이다. 이와 같은 특징들은 고구려의 굴식돌방무덤과 관련시키지 않을 수 없는 요소가 아닐까 한다. 이에 비해 읍내리 고분은 널방 평면이 장방형이고 장벽의 우측편에 짧은 널길을 낸 구조이다. 냉수리 고분과는 달리 몇 단을 석축하여 만든 널받침이 널길 반대쪽 공간에 마련되어 있다.

낙동강서안의 가야지역에는 진주의 수정봉(水精峯) 2호분, 옥봉(玉峯) 7호분과 함안(咸安) 도항리(道項里) 고분군에서 발견된 터널형 중앙널길식(中央羨道式)이 가장 이른 시기의 예이며, 고성(固城) 연당리(蓮塘里) 고분군과 의령(宜寧) 중동리(中洞里) 고분군에서도 발견되었다. 이들은 장방형 널방 평면에 단벽쪽으로 널길을 내었고 널길 입구의 좌우에는 문설주와 같이 큰 돌기둥을 세워 놓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와 같은 굴식돌방무덤이 경남 서남부지역으로 확산되는 시기는 대체로 6세기 초를 전후한 시기로 추정된다. 공주지역으로부터 시작되는 터널형에 중앙널길을 가진 굴식돌방무덤과의 관계성을 가정해 볼 수 있고 가까운 전남지방에서 발견되는 예처럼 널길 입구에 문설주를 세우는 특징을 고려한다면 경남 서남부지역의 초기 굴식돌방무덤은 백제지역으로부터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고령 대가야의 중심지에 남아 있는 고아동(高衙洞) 벽화고분(壁畵古墳)과 절천장총(折天障塚)의 예가 있다. 널방 평면은 방형에 접근하는 장방형이고 천장은 네 벽을 내경시킨 궁륭형(穹窿形)이며, 좌측으로 편재한 널길은 매우 긴 편에 속한다. 김해(金海) 삼산동(三山洞) 굴식돌방무덤의 예도 크게 보아 고령지역의 굴식돌방무덤의 구조와 상통하는 면이 있다. 특히 고아동 벽화고분은 현실 좌우에 널받침을 나란히 설치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고령 고아동 벽화고분은 공주 송산리 5호분과 구조적으로 매우 닮았을 뿐만 아니라 부여지역의 벽화무덤에서 보는 것 같은 연꽃무늬가 그려져 있다. 결국 고령지역 굴식돌방무덤의 예는 한성지역으로부터 형성되어온 백제지역 굴식돌방무덤의 형식과 관련성이 농후한 편이다.

신라·가야지역의 초기 굴식돌방무덤의 기원과 특징을 검토해보면 가야지역에 속하는 낙동강서안의 경우 백제지역의 영향이 강하고 신라지역의 것은 역시 고구려의 영향이라고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경주분지 내에서도 6세기 중엽경으로 연대가 추정되는 보문리 부부총(普門里夫婦塚) 부묘(婦墓)의 단계부터 굴식돌방무덤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6세기 말이나 7세기대에 접어들면 상위묘제의 주류를 이루지 않았나 싶다.

7세기 초를 전후한 충효동(忠孝洞) 돌방무덤, 동천동 와총(東川洞瓦塚) 서악동(西岳洞) 고분 등의 예들은 신라지역화하고 신라식의 전통으로 발전된 굴식돌방무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 굴식돌방무덤들은 고구려의 영향을 끌고 간 것이 아니라 신라가 가야지역을 점령하고 그 지역의 고분문화 요소를 흡수함으로서 백제계통의 특성들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고신라의 굴식돌방무덤들은 통일기를 거쳐 더욱 발전하게 되며 통일신라시대 왕릉의 기본 묘제로 정착하게 된다.

참고문헌

  • 백제 횡혈식석실분의 전개과정에 대하여(강현숙, 한국고고학보 34, 한국고고학회, 1996년)
  • 百濟石室墳硏究(李南奭, 學硏文化社, 1995년)
  • 고구려석실봉토분의 변천에 관하여(강현숙, 한국고고학보 31, 한국고고학회, 1994년)
  • 嶺南地方 橫口式古墳의 硏究Ⅰ(曺永鉉, 伽耶古墳의 編年 硏究Ⅱ-墓制-, 嶺南考古學會, 1994년)
  • 嶺南地方 橫口式·橫穴式古墳의 型式分類와 編年(洪潽植, 嶺南考古學報 12, 嶺南考古學會, 199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