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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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릉 출토 문양벽돌

무령왕릉 출토 문양벽돌

전(塼) 혹은 벽돌이란 것은 건축용 자재의 하나로, 점토를 틀에 넣고 찍은 다음 건조시키거나 소성시켜 만든 것이다. 벽돌로 축조된 건축물은 원래 서남아시아에서 발달해 온 것으로 그리스의 역사가 헤루도투스는 바빌론의 도시가 벽돌로 건축되었다고 이미 말하고 있다. 사실 근동지역에서 벽돌의 사용은 선사시대까지 올라가는 것으로 적어도 B.C. 4000년 무렵에는 흙과 돌을 대체하여 노천에서 자연 건조된 벽돌을 건축부재로 쓰고 있다.

중국에서는 은(殷)·주(周)시대까지 벽돌이 쓰였다는 증거가 없다. 전국시대(戰國時代)에 들어와서야 유적에서 장방형(長方形) 혹은 방형(方形)의 소전(小塼)과 함께 공심전(空心塼)이 처음 보이게 된다. 전한(前漢)시기에는 이미 궁실건축이나 바닥을 까는데 벽돌이 보편적으로 쓰이게 되며 후한대(後漢代)에는 서민들도 벽돌을 사용한 건축물을 쓸 수 있게 되었다. 공심전이 무덤을 축조하는 데 쓰인 것은 전국시대부터이나 소전을 사용하여 본격적으로 전축분을 만들기는 전한(前漢) 말부터이다. 후한대와 육조시대를 거치면 전축분의 축조가 아주 유행하게 되는데 그에 따라 후한대부터는 전에 문양이 들어간 화상전(畵像塼)이 발달하게 된다.

전은 우선 형태에 따라 장방형의 조전(條塼), 방전(方塼), 그리고 공심전으로 나눌 수 있고 사용처에 따라 일반적으로 벽을 축조하는 벽전(壁塼)과 바닥을 까는 부전(敷塼)이 있고 묘실전(墓室塼), 탑전(塔塼) 등이 있다. 조전(條塼)은 궁실이나 일반가옥, 담장, 묘실 등을 축조하는데 일반적으로 쓰이는 벽돌이며 측면에는 목리문이 있거나 각종 문양이 시문되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제작처, 사용처, 제작연도나 날짜 등이 적혀 있기도 하다. 부전(敷塼)은 바닥을 깔거나 벽을 장식하는 데 쓰이며 보상화문이나 연화문이 시문되어 있기도 하다. 공심전(空心塼)은 전국시대 이후 진한시대 일부지역에서 무덤을 축조하는데 주로 사용하였으며 크기가 1-2m가 넘는 것도 있으며 화상전의 형태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한국에서 벽돌의 사용은 삼국시대로 올라가지만 그 예는 많지 않다. 낙랑지역에는 후한대부터 많은 수의 벽돌무덤이 축조되었고 실제 조사가 이루어진 예도 많다. 뿐만 아니라 낙랑토성지에서는 관가 등의 축조에 사용되었으리라 추측되는 벽돌이 많이 발견되고 있다. 하지만 이 지역을 점령했던 고구려인들에게는 이와 같은 벽돌의 사용이 적극적으로 계승되지는 않은 것 같다. 고구려지역에서 벽돌무덤이 축조된 사례는 전무할 뿐 아니라 기타 성곽과 궁실 유지에서 벽돌이 발견된 예도 그리 많지 않다. 中國 吉林省 集安에 소재한 太王陵과 千秋塚에서 ‘현태왕릉안여산고여악(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 또는 ‘천추만세영고(千秋萬歲永固)’라는 문자가 양각된 벽돌이 발견된 적이 있다.

백제는 고구려나 신라에 비하면 중국 남조계의 벽돌무덤이 2기나 축조되어 있는데다 그 외에 여러 성격의 유적에서 벽돌이 출토된 바 있다. 공주 송산리 고분군에 소재한 2기의 벽돌무덤 중에 송산리 5호분의 벽돌은 측면에 사릉격문과 대각사선의 2가지 기하문으로 장식되어 있다. 이와 같은 문양벽돌은 중국 남조의 양나라 때 유행했던 것으로 공주에서 출토된 벽돌 중에 ‘양양구위사의(梁良口爲師矣)’라는 명문벽돌이 있는 것을 보면 공주지방에 축조된 벽돌무덤은 남조의 양나라와 문화교류를 통해서 가능했던 일이라 여겨진다. 무녕왕릉의 벽돌에는 연화문과 방격내사격자문 등이 새겨져 있고 특히 어떤 벽돌에서는 ‘급사(急使)’, ‘중방(中方)’이란 문자가 새겨져 있어서 벽돌무덤의 축조 벽돌의 제작이 벽돌무덤의 완전한 설계도면에 의해 이루어졌음이 분명해졌다.

부여 능산리 고분군에서는 더 이상 벽돌무덤이 축조되지 않고 있지만 무덤의 바닥에 벽돌을 깔거나 입구를 벽돌로 폐쇄하는 등 벽돌의 사용은 중단되지 않고 있다. 이러한 고분축조 외에도 정확한 용도는 알 수 없지만 백제에서는 특이한 형태의 벽돌이 발견된 일이 많다. 부여 군수리 사지(軍水里 寺址)에서 출토된 일종의 공심전에는 2개의 원형구획 안에 연화문과 인동문이 정교하게 양각되어 있다. 그밖에 부여 규암리에서 발견된 문양벽돌 중에는 귀면문(鬼面文)과 산수문(山水文)이 시문된 것 2점을 포함해 연화문, 사자문, 봉황문 등이 새겨진 8종의 방형 문양벽돌이 출토되어 주목을 끌고 있다. 신라에서는 황룡사지(皇龍寺址)의 일부 구간에 무문양벽돌(無文樣塼)이 바닥에 깔려 있는 유구가 발견된 바 있으나 아직까지 고신라시대에 벽돌이 사용된 예는 찾아보기 어려운 편이다.

벽돌이 폭넓게 사용되고 형태와 규격, 제작 수법, 문양 등에서 중요한 변화가 있었던 것은 통일신라시대에 들어와서의 일이다. 통일신라시대의 벽돌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은 8엽보상화문이 시문된 방형의 문양벽돌이다. 이 방형벽돌은 바닥에 깔기 위해 만든 것으로 보이며 중앙에 8엽보상화문을 두고 네 귀에는 4매가 합쳐져 하나의 문양단위를 이루도록 한 무늬가 새겨져 있다. 그 외 통일신라시대 유적에서는 보상화문과 연화문을 소재로 한 장방형벽돌이 많이 출토되고 신라 영묘사지에서 출토된 사냥문전, 사천왕사에서 출토된 사천왕전 등은 미술사적으로도 주목할만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 武寧王陵 및 宋山里6號墳의 塼築構造에 대한 考察(尹武炳, 百濟考古學硏究, 學硏文化社, 1992년)
  • 中國古代建築史(劉敦禎 編, 中國建築出版社, 1984년)
  • 朝鮮瓦塼圖譜(井內古文化硏究室, 1976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