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룡사지

황룡사지

[ 慶州 皇龍寺址 ]

지역 경주
황룡사지 가람배치도

황룡사지 가람배치도

경상북도(慶尙北道) 경주시(慶州市) 구황동(舊皇洞)에 있는 신라시대의 대표적인 절터로,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황룡사는 신라칠처가람지(新羅七處伽藍址)의 하나로 규모나 사격(寺格)에 있어 신라 제일의 사찰이며, 신라의 사상과 예술에 있어서도 차지하는 비중이 아주 컸다. 황룡사는 528년 불교가 공인된 후 처음으로 세워진 흥륜사(興輪寺, 535~544년에 조영)에 이어 조영된 신라의 국찰(國刹)이다.

기록에 의하면 황룡사는 7세에 왕위에 오른 진흥왕(眞興王)이 21세 되던 해인 553년 월성(月城)의 동쪽에 새로운 궁궐을 짓게 하였는데, 그 곳에서 황룡이 나타나자 사찰로 고쳐 짓게 하고 절의 이름을 ‘황룡사(皇龍寺)’라 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짓게 된 황룡사는 착공한 지 14년만인 566년에 대략의 건물을 완공하고 569년에 주위에 담장을 둘러 1차적인 공사가 완료되었다.

그 후 574년 신라 삼보(三寶)의 하나인 황룡사장육존상(皇龍寺丈六尊像)이 만들어졌으며, 584년(眞平王 6년) 이를 안치한 중금당(中金堂)과 그 좌우의 서금당과 동금당이 완공되었다. 이후 60년이 지난 645년(善德女王 14년)에 신라 삼보의 하나인 황룡사목조9층탑(皇龍寺木造九層塔)이 조성되었다. 이 탑은 백제의 아비지(阿非知)를 초청하여 세운 것으로 643년에 세우기 시작하여 3년에 걸쳐 완성된 것이다. 이와 같이 진흥왕때부터 시작된 황룡사의 조성은 4대왕 94년에 걸쳐 목조구층탑이 완공됨으로써 명실공히 신라호국대찰의 위용을 갖추게 된 것이다. 그 후 745년(景德王 13년)에는 황룡사종(皇龍寺鐘)이 주조되었다.

이러한 황룡사는 특히 상륜부(上輪部)가 시작되는 철반(鐵盤)을 기준으로 위로 42척(약 15m), 아래로 183척(약 65m), 총 높이 225척(약 80m)인 거대한 목탑이 벼락 등으로 피해를 입어 수 차례 수리되었고 경문왕(景文王) 때인 872년에는 탑을 헐고 다시 세우는 등의 중수(重修)가 있었고, 고려시대에도 몇 번의 수리가 있었으며, 1105년(고려 睿宗 원년)에는 황룡사를 전체적으로 크게 수리하였다. 그러나 1238년(고려 高宗 25년) 몽고병의 칩입으로 인해 가람 전체가 불타버렸다. 결국 황룡사는 9층탑이 최초로 조성되고 신라, 고려 두 왕조에 걸쳐 6차례의 중성(重成)과 함께 593년 동안 호국사찰로 숭앙받아 오다가 병란으로 완전히 없어지게 된 것이다.

이 황룡사에서는 신라시대의 유명한 대사인 자장(慈藏)이 『보살계본(菩薩戒本)』을 강설하고, 원효(元曉)가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을 연설하기도 하였다. 또 많은 백고좌(百高座)가 베풀어지는 등 호국법회가 이루어지는 장소로 이용되었으며 고려시대에도 중요사찰로 유지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이 사찰의 금당에는 신라의 화성(畵聖) 솔거(率居)가 그린 벽화가 있었다고 한다.

황룡사지는 1976년부터 1983년까지 8년에 걸쳐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소 경주고적발굴조사단에 의해서 발굴되었다. 그 후에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 의해서 주변이 발굴되었다. 발굴결과 황룡사는 담장 내의 사역(寺域)이 동~서 288m, 남~북 281m로 정방형(正方形)에 가깝고 총 면적은 80,928㎡임이 밝혀졌다. 사찰은 기록과 같이 늪지를 매립하여 대지를 마련하였다. 가람 배치는 중문(中門), 탑(塔), 금당(金堂), 강당(講堂)이 남~북으로 배치된 이른바 일탑식가람배치(一塔式伽藍配置)를 기본으로 하였으나, 금당의 좌우에 다시 각 1개의 금당을 배치하여 3개의 금당이 동~서 1열로 배열된 일탑삼금당식의 특수한 형식이 되었다.

탑의 전방 좌우에는 각 1동의 건물을 세워 종루(鐘樓)와 경루(經樓)로 삼았고, 강당의 좌우에도 독립된 건물을 배치하였다. 사역의 외연 사방에는 회랑(回廊)을 돌렸는데, 동서남북의 것이 연결되지 않고 독립된 상태로 조성되었다. 금당은 외진(外陣)이 정면 9칸, 측면 4칸, 내진(內陣)이 정면 7칸, 측면 2칸의 크기이고, 내진 중앙부 후면에 장육존상의 대좌석(臺座石)이 놓이고, 그 양편에 협시불(脇侍佛)의 대좌석이 각각 놓여 있었다. 이 삼존불 대좌를 중심으로 양편에 각각 8개의 불대좌(佛臺座)가 배치되어 총 19개의 대좌가 내진에 배치되었다. 목탑지(木塔址)는 정면과 측면 모두 7칸의 정방형으로 초석이 배치되었고 기단에는 남측에 3개, 동·서·북측에 각 1개의 계단을 두었다. 이 목탑지의 중앙에 심초석이 있는데, 이것은 다른 육중한 돌로 덮여 있었다. 이 안에 있던 사리함은 도굴꾼에 의해 유출되었으나 후에 당국에 의해 회수되었다. 중금당의 좌우에 배치된 동금당과 서금당은 각각 정면 7칸, 측면 4칸, 강당은 정면 10칸, 측면 4칸, 중문은 정면 5칸, 측면 2칸, 종루와 경루는 각각 정면 5칸, 측면 5칸의 건물이었다.

이와 같은 황룡사지는 대략 4번에 걸쳐 큰 변화를 보이면서 완성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먼저 창건가람은 중문, 탑, 금당, 동서의 승방(僧房)으로 추정되는 긴 건물 등으로 이루어 진 것으로 후대에 완성된 가람보다는 사역의 규모가 작았다. 다음 9층의 목탑이 완성된 후의 중건가람(重建伽藍)은 강당은 정면 10칸, 측면 4칸으로 하고, 강당 좌우에는 각각 정면 11칸, 측면 3칸의 남향한 건물을 배치시키고 중문은 창건 중문보다 6m 더 앞쪽에 세웠다. 중문은 정면 4칸, 측면 4칸이었다. 중문의 안 중앙 남측에 9층의 목탑을 배치하고, 북쪽 중앙에 정면 9칸, 측면 4칸의 중금당을 놓고, 그 좌우에 중금당보다 작은 정면 7칸, 측면 4칸의 동금당과 서금당을 배치하였다.

그리고 중문 좌우와 창건가람 중 동서의 긴 건물이 있던 곳을 개조하여 복랑(復廊)의 회랑을 설치하였다. 세 번째의 변화는 종루와 경루가 배치되면서 바뀐 것이다. 종루와 경루는 각각 정면 5칸, 측면 5칸이나 장방형(長方形)으로 세워졌다. 이 때 중건 중문은 다시 남쪽으로 이동되어 정면 4칸, 측면 2칸의 2차 중건 중문이 되었다. 이에 따라 남회랑도 남쪽으로 이동되었으며 이 2차 중건 남회랑은 앞의 것보다 더욱 길어져 동서회랑과 마주치는 범위를 벗어나게 꾸며졌다. 그리고 남회랑은 남쪽으로 이동되면서 동서회랑의 남단과의 사이 공간에 남북으로 2칸의 복랑이 삽입되었다. 마지막으로 종루와 경루가 각각 정면 5칸, 측면 5칸이나 앞의 것과는 달리 정방형으로, 중문은 2차 중건시의 그 자리에 정면 5칸, 측면 2칸의 건물로 개조되었다. 그리고 중건가람의 강당이 정면 9칸으로 축소되었으며 강당 좌우의 건물도 같이 축소되었다.

이 황룡사지에 있었다던 장육존상을 비롯한 기록상의 유물은 남아 있지 않았으나 4만여 점에 달하는 유물이 발굴조사 때 출토되었다. 유물은 와전류(瓦塼類), 금속류, 토기류, 자기류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와전류 중에는 특히 측면에 용을 새긴 보상화문벽돌(寶相華文塼)이 출토되었는데, 이것은 통일신라시대의 우수한 작품으로 손꼽히고 있다. 또 높이 182㎝, 최대너비 105㎝나 되는 치미(鴟尾)가 출토되었는데, 일본이나 중국에서도 아직 발견된 바 없는 동양최대의 것으로 황룡사의 위용을 알려준다.

금속류로는 금동제불상, 풍탁(風鐸), 금동제귀고리, 청동거울 등이 있다. 이 가운데 금동제 불상 1점은 높이 10㎝에 지나지 않는 작은 것이나 여래입상(如來立像)으로 도금이 매우 찬란하고 화려하여 신라의 우수한 공예술을 전해 주고 있다. 자기류 가운데 목탑지의 심초석 아래에서 출토된 백자소호(白磁小壺)는 당나라의 작품으로 밝혀져 당시의 문물교류의 일면을 보여준다. 그리고 토기류 가운데는 황룡사를 축조하기 위해 늪지를 매립할 때 들어간 것들이 있는데 이 토기들은 황룡사의 창건 이전이라는 하한연대를 지적해 주는 유물로 신라토기나 고분편년에 중요한 기준이 되고 있다.

참고문헌

  • 皇龍寺遺蹟發掘調査報告書Ⅰ(文化財管理局 文化財硏究所, 198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