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암리 3호분

복암리 3호분

[ 羅州 伏岩里 3號墳 ]

지역 나주
복암리 3호분 조사후 전경

복암리 3호분 조사후 전경

1996년부터 1999년에 걸쳐 국립문화재연구소와 전남대학교박물관에서 조사한 고분으로 영산강유역 고대문화 연구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중요한 유적이다.

분구는 방대형(方臺形)이고 규모는 동서 중앙 36m, 동서최대폭(분구 남편)이 38m, 남북중앙 37m, 남북 최대폭(서편) 42m로 나주 대안리 9호분(44.3×34.94m)에 버금가는 규모이다. 구지표에서부터 성토된 높이는 분정(墳頂) 서남부분이 6.0m이다. 중앙평탄지는 400㎡ 정도로 넓은편으로 돌이 1-2겹 깔려 있었다. 분구의 주변에는 주구(周溝)가 돌려져 있었으나 경작으로 유실되었고, 방대형 분구 이전의 선행분구 주구만이 남아 있다.

복암리 3호분 출토유물, 각종대도(大刀)

복암리 3호분 출토유물, 각종대도(大刀)

단일 분구에서 독널무덤(甕棺墓) 22기, 구덩식돌덧널무덤(竪穴式石槨墓) 3기,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墓) 11기, 앞트기식돌덧널무덤(橫口式石槨墓) 1기, 앞트기식돌방무덤(橫口式石室墓) 2기, 돌덧널독널무덤(石槨甕棺墓) 1기, 나무널무덤(木棺墓) 1기 등 영산강유역에서 나타날 수 있는 모든 형태의 묘제 총 41기의 매장시설을 확인하였는데 이는 영산강유역의 다장(多葬)·복합묘적(複合墓的) 성격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이다.

그 중 1996년도 조사 석실은 영산강유역의 토착묘제인 대형옹관이 4기 매납된 초기의 횡혈식석실묘로 금동신발, 마구류 등이 출토되어 옹관고분을 조영하던 집단이 석실분을 주체적으로 수용하였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이와 같이 한 분구내에서 비교적 선후 관계가 분명한 각양각색의 묘제를 확인함으로써 이지역 묘제의 변천과정을 심도 있게 논의할 수 있는 좋은 자료를 얻은 것은 물론이다. 이러한 다장·복합묘로서의 중요성 이외에도 주구(周溝)와 분구(墳丘)의 토층조사를 통하여 석실분이 주로 쓰인 현재의 방대형분구(方臺形墳丘) 조영 이전에 옹관묘를 매장주체로 하는 2-3기의 선행분구가 존재함을 알게 되어 영산강유역이 대형분구묘의 조영방법 및 성격을 해명하는데도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게 되었다.

방대형분구의 조영과정과 층위관계 등으로 살펴본 복암리 3호분은 3단계로 크게 나뉜다. 현 분구 조영 이전의 선행기인 옹관묘 전용기, 96석실묘 등이 만들어진 방대형분구 조영기, 그리고 조영 이후 성토층을 되파고 만든 석실분 성행기로 분기가 되는데, 전용옹관 발생기인 3세기의 옹관부터 7세기의 사비백제기 석실분까지 동일 집단에 의해 조영되고 있어 각 단계별로 이 지역 집단의 성격이 주변 집단 또는 외부의 힘에 적응하면서 변화해 온 것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복암리 3호분 조영집단은 백제의 성장 및 지방지배의 확대와 밀접한 관련을 맺으며 지속적으로 변화해 왔지만 토착적인 문화 및 이 지역에서의 지배집단으로서의 위상은 끝까지 유지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정치적으로는 6세기 중후엽 이후로 백제의 직접 지배하에 들어간 것으로 보이지만 규두대도(圭頭大刀) 등의 유물은 일본열도와의 관계도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어 다원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금동신발, 은제관식, 장식대도 등 중요 유물이 출토되어 3호분 축조집단 자체의 성격뿐만 아니라 백제, 일본과의 관계 규명에도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게 되었다. 특히 석실묘에서 출토된 규두대도 및 귀면문삼환대도(鬼面文三環頭大刀)는 일본에서도 드문 예로 중앙정부의 지방지배확대라는 문제와 더불어 한반도와 일본열도를 하나의 무대로 한 역사전개과정을 살피는데 귀중한 자료이다.

참고문헌

  • 羅州 伏岩里 3號墳(國立文化財硏究所, 200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