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구묘

분구묘

[ 墳丘墓 ]

나주 신촌리 9호분

나주 신촌리 9호분

보통 무덤이라면 지하나 반지하, 혹은 지상에 매장시설을 만들고 그 매장시설 위로 흙이나 돌을 쌓아 봉분을 만들게 되지만, 분구묘의 경우는 미리 흙이나 돌로써 봉분과 같은 분구를 조성하고 그 위에 매장시설을 만드는 무덤양식이다. 둘 이상의 매장시설이 추가로 설치될 때 먼저 축조된 매장시설 위에 1겹 더 쌓고 또 다른 매장시설을 축조하는 경우도 있다.

원래 분구묘는 일본고고학계에서 정의한 개념이고 또한 대륙으로부터의 영향 없이 야요이시대(彌生時代) 이래 일본지역에서 고유의 발전을 보인 묘제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1980년대 이래 한반도지역에서는 많은 고분발굴조사 자료가 축적되어 왔고 지금까지의 고분 및 고분군의 구조적인 양상들을 정의하기에는 지금까지 사용되어 왔던 개념만으로는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그러한 용어 중에 하나가 분구묘이며 한반도 지역에서 분구묘의 전통을 확인하는 일은 어렵지 않게 되었다.

청동기시대로부터 삼국시대에 이르기까지 분구묘의 축조 방식에 가까운 무덤양식은 넓은 지역에서 꽤 많은 예를 찾아 볼 수 있다. 요동반도(遼東半島)의 崗上墓나 樓上墓와 같은 것도 그러하거니와 고구려의 초기 돌무지무덤도 기본적으로는 분구묘 축조 방식을 따른다. 한강과 임진강유역에서 조사된 양평 문호리(汶湖里)나 제원 도화리(桃花里) 돌무지무덤, 연천 삼곶리(三串里) 돌무지무덤도 흙과 냇돌(川石)로 분구를 먼저 조성하고 그 위에 둘 이상의 매장시설을 설치한 것이다.

마한·백제지역에서 가장 일찍 조사된 분구묘는 나주 반남면 신촌리(新村里) 고분군이다. 일제시대 발굴된 신촌리 고분군은 분구의 형태가 일본의 대표적인 고분의 형태인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의 형태를 갖추고 있어 주목을 끌어 왔다. 신촌리 고분군 내 전방후원형 분구묘인 6호분과 9호분이 발굴조사 되었다. 전방후원분이라면 후원부(後圓部)에 매장시설이 있는 것이 보통인데 신촌리 6호분에서는 전방부(前方部)에서만 5개의 독널(甕棺)이 발굴되었다.

신촌리 9호분의 경우는 방대형(方臺形) 분구 안에 대형의 독널이 11개나 발견되었는데 이들이 매납된 시기는 일정한 차이가 있음이 밝혀졌다. 그중 늦은 시기에 매설된 을(乙)호 독널 안에서는 초화형금동관(草花形金銅冠)을 비롯하여 금동제신발(金銅製飾履), 용봉세잎장식큰칼(三葉文裝飾大刀) 등과 함께 각종 무기류가 출토되어 이 지역 수장묘일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으로 인정되어 왔다. 같은 반남면 일대 대안리(大安里) 고분군 내 방대형의 분구묘인 9호분의 경우도 매납의 시기가 다른 9개의 대형 독널이 발견되었다.

전라남도 지역에는 다양한 형태의 분구묘들이 분포하는 가운데 특이한 형태의 봉토분들도 존재한다는 사실이 최근에 활발한 발굴조사를 통해 밝혀졌다. 특히 영산강 중하류역 나주(羅州), 함평(咸平), 영암(靈岩)일대는 분구묘의 분포 중심지이다. 4세기대부터 축조되었다고 보여지는 영암의 만수리(萬樹里) 4호분에서는 독널만이 매장시설로 사용되지 않고 움나무널무덤(土壙木棺墓)도 존재함이 밝혀졌다. 함평 예덕리 만가촌(萬家村) 고분에 대한 조사를 통해 분구의 형태가 방대형과 전방후원형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원형이나 긴 사다리꼴도 존재함이 알려지고 분구묘의 시작이 3세기대까지 올라갈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마한·백제지역에서 또 하나의 분구묘 분포지역은 서울 강남일대의 고분군이다. 이 지역에 있어서 분구묘는 계단식돌무지무덤이 출현하기 전 초기 백제의 토착세력집단에 의해 축조된 무덤의 한 양식이라고 여겨진다. 서울 가락동(可樂洞) 고분군 내 1·2호 분구묘가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 고분의 분구는 방대형에 가깝고 분구 외곽에 도랑(周溝)을 판 흔적이 관찰된다. 점토를 쌓아 그리 높지 않은 방대형의 분구를 조성하고 그 안에 나무널이나 독널 혹은 특별한 시설 없이 시신을 매납하고 토기, 철기 등을 부장했던 것으로 보인다. 가락동 2호분과 같은 경우는 그 분구 위에 돌을 깔아서 덮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러한 분구 조성방식은 석촌동(石村洞) 고분군에서도 많이 드러나 즙석봉토분(葺石封土墳)이라는 명칭을 붙이기도 한다. 그러나 일정규모로 축조된 분구 혹은 봉분이 과연 매장시설을 밀봉하기 위한 것이라면 그러한 명칭이 적절하지만 아직 내부구조는 자세히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가락동 2호분의 경우나 석촌동 고분군에 판축된 분구의 내부상태로 미루어 이들 대부분이 분구묘일 가능성이 높다.

참고문헌

  • 墳丘墓의 認識(李盛周, 韓國上古史學報32, 韓國上古史學報, 2000년)
  • 湖南地域 古墳의 墳丘(湖南考古學會, 1996년)
  • 近藤義郞(前方後圓墳と彌生墳丘墓, 靑木書店, 1995년)
  • 三國時代 墳丘墓硏究(姜仁求, 嶺南大學校出版部, 198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