즙석봉토분

즙석봉토분

[ 葺石封土墳 ]

석촌동 3호분 전경(1986년)

석촌동 3호분 전경(1986년)

지상에서 인식할 수 있는 뚜렷한 분구 내에 여러 개의 매장주체부가 있으면서, 특히 분구 위에 돌을 덮은 요소를 중시하여 붙여진 묘제명이다. 나무널 3기와 독널 1기가 한 봉토 안에 매장된 서울 가락동(可樂洞) 2호분이 대표적이며, 그밖에 1927년에 조사된 서울 석촌동 6·7호분과 파괴분, 5호분, 3호분 동쪽지역의 즙석봉토분, 가락동 1호분 등이 있다. 일제 때는 석촌동 일대에 돌무지무덤(積石塚)과 봉토분이 각기 수십 기 있었다고 전한다.

이는 백제의 국가 형성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는 묘제로 주목되어왔는데, 그 기원에 대해서는 몇 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 강돌(川石)을 덮는 방법은 돌무덤의 영향에 의한 것으로 토착적인 선주민의 구덩무덤과 결합하여 발생한 복합묘제로 보고 있다. 둘째는 최근에 제기된 것으로 중국 양자강유역의 토돈묘(土墩墓)와 연결되는 것으로서 3세기 전반에 축조되며 3세기 중엽경에 고구려세력의 남하로 돌무덤이 등장하면서 사라진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양자강유역 토돈묘는 하상(夏商)교체기부터 A.D. 5-4세기까지 축조된 것이어서 한강유역의 것과 연결시키기에는 시기적인 격차가 너무 크다는 문제가 있다.

셋째는 한강유역 돌무덤이 4세기 후반에 등장하는 것으로 파악하여 두 묘제 사이의 시기적 관계를 부정하고, 상당한 규모의 봉분과 나무널의 사용을 중시해 목관봉토분(木棺封土墳)으로 개칭하여 부르고 있다. 나아가 이 무덤들은 그 크기로 보아 많은 노동력이 동원되며 가족 관계로 추정되는 피장자들이 한 봉토에 묻히는 것은 특정 가계에 정치권력이 집중된 것을 반영하는 것으로서, 서울지역에만 유독 집중되어 있어 이 지역의 정치·사회적 중심역할을 보여주는 것으로 평가하였다. 또한 그 축조 시기가 가락동 2호분에서 출토된 흑색마연토기로 보아 3세기 중후엽경으로 풍납동 토성 등의 거대 성곽축조 및 백제토기의 형성시점과 일치하고 있으므로, 이를 백제가 국가로 성립된 것을 웅변해주는 표지적(標識的) 묘제로 보고 있다.

가락동 2호분은 분구 크기가 15×12m의 방형(方形) 평면에 높이는 2.2m이며, 석촌동 파괴분은 5기의 구덩이 있고 크기는 길이 38m에 높이 1.5m 정도 된다. 이러한 묘제의 특징은 무엇보다 분구를 확장하기도 하면서 한 분구 내에 다장(多葬)이 이루어지는 점과 즙석 요소를 들 수 있다. 그런데 최근 천안(天安) 두정동(斗井洞) 유적에서는 18×14m 크기의 장타원형 분구에 움무덤 2, 독널무덤 4, 돌덧널무덤 1, 구덩없는무덤 2기 등이 있으면서 분구 주변을 돌로 덮은 분구분이 1기 조사되었다. 또 익산(益山) 율촌리(栗村里) 고분군에서도 방형 평면에 길이 13m 내외의 분구에 독널과 움무덤이 4~5기씩 매장되어 있는 것이 5기 확인되어 금강유역권에도 이 묘제가 분포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한편 영산강유역의 함평(咸平) 예덕리(禮德里) 만가촌(萬家村) 고분군에서는 길이 15m 내외에 분구 평면형이 사다리꼴형(梯形) 등으로 다양하고 주구(周溝)를 공유하고 있는 분구들이 12기 있는데, 분구 내에서 2~3기씩의 움무덤과 독널무덤들이 확인되었다. 이들은 그 축조시점이 대체로 3세기 후반~4세기 전반 무렵에 해당되며, 분구 내의 다장(多葬)이라는 기본적 성격을 공유하고 있는 묘제가 여러 지역에 성립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봉토분은 매장주체부를 덮는다는 의미가 강하여 분구 내 집단 안치라는 이 묘제의 개념과 괴리가 있고, 가락동 2호분 등을 비롯해 나무널과 독널이 혼용되고 있어 나무널만을 중시하는 것도 문화적 상사성(相似性)을 파악하는데 다소 문제가 있다. 한편 즙석 요소도 두정동 분구분과 나주 복암리 3호분에서 나오고 있어 문화전통 보다 분구 유실 방지라는 기능적 측면이 강하게 엿보인다. 다만 그 전통이 한강과 임진강 유역에 분포하는 무기단식 돌무지무덤(無基壇式積石塚) 또는 즙석식돌무지무덤(葺石式積石墓)에서 유래하였을 가능성은 있다. 이처럼 각 지역에서 연문화적 현상을 갖고 있는 이 묘제 양상을 포괄하는 것으로는 분구분(墳丘墳)으로 부르는 것이 오히려 적당할 듯 하다.

한편 천안·익산 지역의 분구분들을 시기적으로 선행하는 한강 유역에서 확산된 것으로 이해하기도 하나, 이들간에 시기적 차이가 거의 없고 토기상에서 둥근밑항아리(圓底壺) 등 재지적 토기문화 전통이 유지되고 있어 한강유역의 일방적 영향으로만 보기는 어려우며 영산강유역 것은 더욱이 백제의 영향으로 설명하기 곤란하다. 이러한 여러 양상들을 감안할 때 분구분은 2세기 후반 무렵부터 낙랑의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사회·정치적 성장을 도모하던 각 지역세력들 가운데, 사회적 통합도를 높여가던 일부 유력한 집단을 중심으로 채용된 묘제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 중 서울 지역에 집중도가 높은 점은 역시 백제의 탁월한 정치적 성장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와 달리 금강유역의 분구분들은 『삼국지(三國志)』에 나오는 목지국(目支國)으로 대표되는 마한(馬韓) 중심세력이 3세기 후반 무렵 백제에 의해 와해된 후, 주변 지역 세력들이 정치적으로 백제에 완전히 장악되지 못한 현상을 반영할 가능성이 있다. 다만 이 지역에서는 3세기 후반~4세기 전반 무렵 짧게 축조되며 지속적인 발달을 하지 못하고, 이 단계 이후 한성백제토기가 이입되고 있다. 이는 지역적 성장을 도모하던 세력들이 한성백제의 구심력 속에 점차 편입되면서 와해되는 현상을 반영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대신 이후에 중국 자기나 금동관 등의 각종 화려한 위신재를 갖고 있는 천안(天安) 용원리(龍院里) 유적의 9호 돌덧널무덤과 익산(益山) 입점리(笠店里) 고분군의 86-1호 돌방무덤 등은 백제 중앙과의 복속 관계를 통해 새로이 지방의 권력을 장악해나가는 수장층의 모습을 반영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에 비해 영산강유역에서는 나주 반남 고분군으로 대표되는 소위 독널고분(甕棺古墳)으로 더욱 고총화되면서 분구분이 6세기대까지도 축조되고 있다. 다만 이러한 영산강유역 정치체의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가족묘적인 분구분이 지속되는 점과 함께, 한 분구 내에서 피장자간의 우열의 차가 두드러지지 않고 탁월한 유력 개인의 무덤이 따로이 등장하지 않는 점에 주목하여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참고문헌

  • 馬韓 墓制의 最近 調査 및 硏究動向(崔完奎, 三韓의 마을과 무덤, 第9回 嶺南考古學會 學術發表會, 2000년)
  • 百濟 漢城期 多葬低墳丘墳과 石室墓에 대한 一考察(成正鏞, 湖西考古學報 2, 湖西考古學會, 2000년)
  • 百濟建國 以前 馬韓社會의 변모(林永珍, 전환기의 고고학Ⅲ, 제24회 한국상고사학회 학술발표대회 발표문, 2000년)
  • 天安 北部 第1·2地區 宅地開發敷地(B지구)文化遺蹟發掘調査略報告書(公州大學校博物館, 1999년)
  • 益山 栗村里 墳丘墓 發掘調査 指導委員 會議資料(圓光大學校 馬韓·百濟文化硏究所, 1999년)
  • 百濟 國家의 形成 硏究(朴淳發, 서울大學校大學院 文學博士學位論文, 1998년)
  • 咸平 禮德里 萬家村古墳과 榮山江流域 古墳의 周溝(林永珍, 第39回 全國歷史學大會 發表要旨, 歷史學會, 1996년)
  • 百濟漢城時代古墳硏究(林永珍, 서울大學校大學院 文學博士學位論文, 1995년)
  • 三國時代 墳丘墓 硏究(姜仁求, 영남대출판부, 1984년)
  • 昭和二年度 古蹟調査報告 第二冊(朝鮮總督府, 193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