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토기

백제토기

[ 百濟土器 ]

백제토기는 백제라는 특정 정치체의 시공적 영역 안에서 제작·사용되었던 것으로서, 여타 토기와 식별할 수 있는 일정한 양식적인 공통성을 가지고 있는 토기군을 말한다. 일정 양식 토기의 성립이 반드시 국가의 형성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나, 정치적 긴장상황이 매우 증대되는 삼국시대에 들어오면 고구려나 신라 모두 그 시공적 영역내에서 식별할 수 있는 토기양식이 등장하고 있어 이 무렵 국가와 특정 토기 양식의 성립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므로 백제토기의 형성은 곧 백제라는 국가 형성의 한 산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런데 백제토기의 형성과 발전 시점인 한성기 토기에 대해서는 80년대 중반 이후 서울 몽촌토성과 석촌동 고분군이 조사되면서 겨우 식별이 가능해졌지만, 양호한 편년자료가 적어 논란이 있었다. 최근 경기 이남과 금강유역권의 고분군들이 조사되면서 그 발전양상을 보여줄 수 있는 자료들이 많이 축적되었다.

먼저 백제토기로 인식될 수 있는 한성기의 특징적인 기종들로는 세발토기(三足土器), 검은색으로 마연한 입곧은항아리류(直口壺類)와 굽다리접시(高杯), 합(盒), 뚜껑(蓋), 원통형 그릇받침(圓筒形 器臺), 경부가 비교적 길지 않은 입큰목긴항아리(廣口長頸壺), 몸체에는 새끼문(繩文)이 저부에는 격자문이 타날된 장란형토기(長卵形土器)와 돗자리문양(繩蓆文)이 시문된 깊은바리모양토기(深鉢形土器) 등을 들 수 있다. 이 중 검은간토기는 종래 고구려토기의 영향에 의한 것으로 고구려세력의 한강유역 진출을 시사하는 증거로 해석되어 왔으나, 한성기 백제토기와 고구려토기를 자세히 비교하여 볼 때 기종이나 형태상의 유사성이 발견되지 않아 이는 현재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이 시기 토기에 대한 비교적 체계적인 편년안은 몽촌토성 조사보고서에서, 토기질의 차이를 시기구분의 기준으로 삼아 회색연질 기종군과 회청색경질 기종군이 제작되는 단계를 나누어 전자를 몽촌Ⅰ기, 후자를 몽촌Ⅱ기로 구분하였다. 그 구분 시점은 원주 법천리(原州 法泉里) 2호분에서 4세기 전반대의 동진(東晉)제 청자양형기와 공반된 입곧은항아리가 회색연질이면서 어깨에 사격자문이 시문되는 등 경질의 것과 유사하게 되어 있는 점을 근거로 4세기 중엽 무렵으로 설정하여, 몽촌Ⅰ기는 3세기 중후엽-4세기 중엽, Ⅱ기는 4세기 중엽-475년까지로 하였다. 그리고 몽촌토성에서 출토되는 고구려토기들은 고구려의 한강유역 점령 이후의 소산물로 파악하였다.

이에 대해 몽촌토성에서 유구 내에서 백제토기와 고구려토기가 공반되는 것을 주된 근거로 하여 한성기 토기의 편년을 제시하는 견해들이 있다. 定三은 몽촌토성 85-2호 토광묘에서 출토된 반형세발토기(盤形三足土器)를 형식적으로 가장 이른 것으로 보고 몽촌토성 Ⅰ단계를 5세기 후반으로, Ⅱ단계는 백제와 고구려토기가 공반되는 단계로서 5세기 말-6세기 초로 하였고, Ⅲ단계는 6세기 중엽 무렵 신라토기 출현 이전의 6세기 전반으로 하는 3단계 편년안을 제시하였다. 白井도 이와 거의 동일한 편년안을 제시하였고, 이천 효양산보고서에서도 석촌동 고분군의 층위상과 몽촌토성의 공반관계를 검토하여 백제토기만 출토되는 단계와 475년 이후 백제와 고구려토기가 공반되는 단계로 나누고 있다.

그런데 몽촌토성에서는 백제토기와 고구려토기가 유구 충전토 내에 섞여 출토되고 있어, 이들이 제작·사용 맥락을 공유하였다는 적극적 증거로 해석하기 어렵다. 또 고구려의 한강유역 점령 이후 도성에서의 백제토기 제작전통은 아무래도 중단되었다고 보는 편이 합리적일 것이다. 한편 최근 조사된 서울 풍납동 토성에서 서진(西晉)대의 전문도기(錢文陶器)와 백제토기가 같이 출토되고 있어, 백제토기의 형성 시점이 3세기대로 소급될 가능성이 보다 확실하여 졌다. 이와 함께 4세기 중엽 무렵부터 조영되는 것으로 생각되는 천안 용원리 고분군에서 흑색의 마연된 직구광경호(直口廣肩壺)와 뚜껑, 입곧은항아리, 어깨항아리(有肩壺), 난형호(卵形壺), 입넓은목긴항아리 등의 한성기 백제토기가 공반되어 그 연대를 파악하는데 주요한 근거를 제공해주고 있다.

한편 석촌동 고분군을 7기로, 몽촌토성을 3기로 각기 구분하였는데, 석촌동 Ⅱ기에 검은간토기와 입곧은항아리, 연질의 뚜껑 없는 굽다리접시(無蓋高杯)와 뚜껑 등의 백제토기가 중국 양자강유역의 토돈묘(土墩墓) 영향으로 즙석봉토분과 함께 등장하며 그 시기를 3세기 중엽 무렵으로 파악하였다가 최근에는 그 시기를 3세기 전반까지 올려 잡고 있다. 그런데 양자강유역의 토돈묘는 B.C. 5-4세기까지 성행하는 것이어서 시공적 괴리가 너무 크고, 3세기 무렵 양자강유역에 있던 오(吳)와의 관계도 불명확하여 백제토기 형성과 직접 관련된 것으로 보기 어렵다. 한편 몽촌토성 88-2호 움무덤(土壙墓)을 웅진천도 이후에 조영된 것으로 보아 반형세발토기가 공반되는 석촌동 Ⅶ기를 5세기 말-6세기 초로 편년하였는데, 공주 정지산 유적 등 웅진기의 중심지에서는 배형세발토기만 출토될 뿐 반형세발토기의 출토 예가 없다. 또 이 움무덤은 무덤이 아닌 의례 등에 사용된 특수유구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지적되어, 석촌동 Ⅶ기의 설정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이처럼 그 연대설정은 차이가 있지만, 입곧은항아리와 반형세발토기가 백제토기의 초현 기종이라는 점에는 대체로 의견이 일치되고 있다. 그 형성시점에 대해 백제의 초기 입곧은항아리와 매우 유사한 것들이 2-3세기대의 중국 동북지역에서 출토되고 있어 이 지역의 영향으로 3세기 중후반 무렵 형성된 것으로 파악하였다. 그 계기는 『삼국지(三國志)』에 나오는 270년대 이후 마한주(馬韓主)가 서진의 동이교위부(東夷校尉府)에 사신을 파견하는 교섭 주체를 백제로 보는 것에서 구하고, 입곧은항아리의 검은색을 마연한 칠기의 재질감을 번안한 것이며 세발토기도 같은 맥락에서 등장한 것으로 보았다. 이는 입곧은항아리의 분포권과 백제의 대외교섭 양상으로 보아 대체로 타당한 해석으로 생각된다. 다만 백제를 포함한 한(韓)세력들과 중국 동북지역과의 교류는 요동지역의 공손씨(公孫氏)정권이 3세기 전반에 대방군을 설치할 무렵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기 때문에 백제토기의 형성시점에 대해서는 좀 더 세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웅진으로 천도한 이후 웅진기와 사비기의 백제토기는 한성기 토기의 기종이 대체로 이어지면서 몇 가지 새로운 기종이 추가되고 기형적 변화를 하게 된다. 그릇받침의 경우 한성기의 원통형그릇받침에 이어 장고를 반으로 잘라 놓은 듯한 장식성이 더욱 높아진 그릇받침이 사용되며, 세발토기는 반형(盤形)이 사라지고 뚜껑이 있는 접시모양세발토기만 제작되는데 사비기에 들어와서는 배신 깊이가 현저히 낮아지는 대신 다리 길이가 길어져 형식화된 모습을 보인다. 입곧은항아리도 계속 제작되지만 보다 경질화되어 있고 몸체가 둥글며, 어깨의 문양대가 거의 사라지는 모습을 보인다. 한편 한성기 말에 등장한 뚜껑접시(蓋杯)가 보편적으로 제작·사용되는 것이 이 시기 백제토기의 특징 가운데 하나이며, 낮은 굽이 달린 크고 작은 완(盌)과 합들도 사용된다. 뚜껑에서는 이전의 단추형이나 사다리꼴형(梯形)·보주형(寶珠形)꼭지에 둥근 윤형(輪形) 꼭지가 웅진기에 추가되며, 뚜껑에 턱받침이 있는 것이 많다.

한편 사비기에는 중국 자기의 영향으로 귀가 네 개 달린 긴목항아리(四耳附長頸壺)가 만들어지거나 자기를 모방한 연유도기(鉛釉陶器)들도 실험적으로 제작되고 있다. 이와 함께 사비기에는 제작기법상의 변화도 일어나 탄소흡착기법으로 표면을 흑색으로 만들며 벽심이 연질에 가까운 소위 흑색와질토기가 자배기를 중심으로 만들어지는데, 옆으로 부착된 대상(帶狀)의 손잡이가 달린 점이 특징이다. 이는 한성기의 백제토기에는 없던 것이며 고구려토기에서 많이 나오는 손잡이 형태이다. 그밖에 대부분의 기종에서 회색연질로 제작된 것이 다시 증가하고 있는데, 이는 제작기술이 이미 안정된 단계에서 토기에 대한 사회적 수요의 증가에 부응하기 위해 보다 대량생산한 결과로 생각된다.

참고문헌

  • 艇止山(국립공주박물관, 1999년)
  • 百濟 國家의 形成 硏究(朴淳發, 서울大學校大學院 文學博士學位論文, 1998년)
  • 百濟初期 漢城時代 土器硏究(林永珍, 湖南考古學報 第4輯, 湖南考古學會, 1996년)
  • 利川孝養山遺蹟(湖巖美術館, 1995년)
  • 洪城 神衿城址 出土 百濟土器에 대한 考察(成正鏞, 韓國上古史學報 第15號, 韓國上古史學會, 1994년)
  • 서울·夢村土城出土土器編年試案-いわゆる百濟前期都城論關聯ひて一(白井克也, 考古學硏究室硏究紀要 第11號, 東京大學文學部考古學硏究室, 1992년)
  • 韓國서울地域出土三國時代土器について(定三秀夫, 生産と流通の考古學, 橫山浩一先生退官記念論文集, 1989년)
  • 夢村土城-東南地區 發掘調査報告書(金元龍外, 서울大學校博物館, 1988년)
  • 扶餘官北里百濟遺蹟發掘報告 Ⅰ·Ⅱ(忠南大學校博物館, 198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