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성

도성

[ 都城 ]

도성(都城)은 왕이 평상시 거주하는 궁성과 관부 및 그 주위를 에워싼 성곽(城郭)으로, 군사적인 목적 외에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중심역할을 하고 있었다. 문명의 발달과 더불어 유통경제의 발전은 인구의 집중화 현상을 수반하였고 이에 따라 도시가 형성 되었는데, 이 도시에 성벽을 둘러싼 것을 ‘읍(邑)’이라 하였다. 이 읍은 곧 행정체제(行政體制)를 갖추어 원초적인 ‘국(國)’을 형성하였으니 읍과 국을 막론하고 성벽으로 둘러 쌓인 도시란 점에서는 같은 것으로 인식되었으며, 이러한 발전 단계에서 큰 읍을 구분하여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이 있는 것을 ‘도(都)’라 하고, 그렇지 않은 것을 읍으로 칭하게 되었다.

‘國’이란 자를 살펴보면 ‘口’를 ‘戈’로 지키고 ‘口’와 그 주위를 곽(郭)으로 에워싸고 있는 모습의 상형(象形)으로서, 중국의 경우 국의 등장은 곧 내성(內城)과 외성(外城)을 구비한 성곽을 수반한 도성으로부터 출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의 도성들은 왕이 머무르고 있는 궁전(宮殿)을 둘러싸고 있는 ‘궁성(宮城)’과 관부가 밀집되어 있는 ‘내성(皇城)’과 병사, 농민, 수공업자 등의 집락이 있는 외부 공간을 둘러친 ‘외곽(外郭)’으로 구성되어 있는 하나의 성곽도시형태였다.

중국의 도성은 기본적으로 정전(井田)계획의 모형에 따라서 구성되었으며, 궁성을 주체로 중심구를 확립하고 대칭적으로 앞에는 조정(朝廷), 뒤에는 시장(市場), 좌측에는 조(祖)를, 우측에는 사(社)를 안배하였다. 그리고 궁성의 남북 주축선을 도성 계획의 주축선으로 하고, 이를 중심으로 도로망을 채용하였는데 구경구위(九經九緯)로 조성된 3개의 큰길을 주간(主干)으로 하여 그와 평행하게 남-북·동-서의 간선도로를 배치하고 외곽의 성벽을 따라 순환도로를 결합해서 구성하였다.

한국 도성의 기원은 위만조선의 도성으로 우거왕이 거주하였던 왕검성이 『사기(史記)』 조선전에 등장하고 있는데, ‘왕검성(王儉城)’은 바로 ‘왕성(王城)’을 의미하는 것으로 “우거(右渠)는 산세가 험하고 견고한 것만 믿다가 나라의 대가 끊어지게 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당시의 도읍이 산성에 있었음을 파악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도읍을 산성에 둔 것은 고구려, 백제, 신라, 고려의 예에서도 확인할 수 있어, 평지에 도성을 배치하고 있는 중국과는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1) 고구려(高句麗)
고구려 도성의 특징은 산성과 평지성이 서로 혼합된 것이라 하겠다. 평지성은 왕을 비롯한 지배계층의 평상시 거성(居城)이고 산성은 전시(戰時) 등 군사적 비상시에 지배계층 뿐 아니라 국인(國人)들이 모두 들어가 수성하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동명왕이 환인(桓仁)의 오녀산성(五女山城 : 흘승골성, 紇升骨城)을 도성으로 삼았을 초기에 대해서는 평지에 위치하고 있는 하고성자고성(下古城子古城)의 연대가 아직 확정되지 않아 논하기 어렵지만 서로 3㎞의 거리에 있어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40년 후인 유리명왕(琉璃明王) 22년(A.D. 3)에 집안(集安)으로 도성을 정할 때인 중기부터는 이 특징이 선명히 나타난다. 환도성(丸都城)은 산에 축조되어 있고 국내성(國內城)은 산 아래의 평지에 있으면서 거리가 서로 얼마 떨어져 있지 않다. 환도성은 몇 차례의 개보수로 인하여 규모가 크고 시설이 잘 구비되어 있으며 지세가 가파르기 때문에 방어하기에 용이하다. 그런데 425년이라는 기간 중에 고구려왕이 진정으로 이곳을 도성으로 삼은 것은 40년을 넘지 않기 때문에 절대 다수의 시간은 국내성에 머물렀을 것으로 보인다.

장수왕(長壽王) 15년(427)에 평양성(平壤城)으로 천도하였을 시에는 대성산성(大城山城)과 평지의 안학궁(安鶴宮)이 세트형식을 띠고 있으나, 양원왕(陽原王) 8년(552)에 축조하기 시작하여 평원왕(平原王) 28년(586)에 천도를 단행한 장안성(長安城)은 하나의 성 내부에 북고남저형(北高南低形)의 지세를 갖추고 북성, 내성, 중성, 내성 왕실, 중성 치소, 외성 주민지역을 순차적으로 나누어 나갔고 그 중에서도 외성은 중국의 조방제를 채용하여 일정하게 십자로로 구획한 발달된 도성형태라 하겠다.

2) 백제(百濟)
한성시대의 도성은 하북위례성(河北慰禮城)→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한산(漢山)→한성(漢城)으로 변천되었는데, 이제까지의 위치비정은 다음과 같다.

  初都地
(河北慰禮城)
河南 慰禮城 漢 城 漢 山 遷都 經過 出 典
丁若鏞 三角山
東麓
廣州宮村
(現 春宮里)
    河北慰禮城→河南慰禮城→漢城 《與猶堂全書》彊域考 卷3 慰禮考, 1936
李丙燾 洗劍洞
一帶
春宮里 (春宮里) 南漢山城 河北慰禮城→河南慰禮城(漢城)→漢山→漢城 慰禮考,《韓國古代史硏究》1981 및 〈近肖古王拓境考〉, 同上書
尹武炳   二聖山城       〈漢江流域에 있어서의 百濟文化硏究〉,《百濟硏究》15, 1984
李基白   夢村土城       百濟文化 學術會議錄,《百濟文化》7 8合輯,1975
千寬宇 서울
江北
江南南漢山 北麓     河北慰禮城→河南慰禮城
(以後 蓋鹵王21年까지 都城)
三韓考 第3部, 《古朝鮮史·三韓史硏究》, 一志社, 1980
成周鐸 漢江
以北
夢村土城
(前期都城)
春宮里一帶(後期都城) 南漢山城 河北慰禮城→河南慰 禮城→漢山→漢城 〈漢江流域 百濟初期 城址硏究〉《百濟硏究》14, 1984 및 〈都城〉《韓國史論》15
車勇杰 中浪川
一帶
夢村土城·二聖山 사이     河北慰禮城→河南慰 禮城(漢城)→漢山→河南慰禮城 〈慰禮城과 漢城에 대하여(Ⅰ)〉《鄕土서울》39, 1981
崔夢龍
權五榮
中浪川
一帶
夢村土城 春宮里 一帶 二聖山城 河北慰禮城→河南慰 禮城→漢山→漢城 〈考古學的 資料를 通해본 百濟初期의 領域考察〉《千寬宇先生還曆紀念 韓國史學論叢》, 1985
李道學 漢江 以北 夢村土城
(王城)
風納土城
(離宮城)
左同 北漢山城內 重興洞古城 河北慰禮城→河南慰 禮城(漢城)→漢山→河南慰 禮城(漢城) 〈百濟 漢城時期의 都城制에 관한 檢討〉《韓國上古史學報》9,1992

이상을 보면 한성시대는 근초고왕 때 고구려 고국원왕을 사살한 후 고구려의 보복에 대비하기 위하여 도성을 산성인 한산으로 천도한 예 외에는 대체로 구릉성인 몽촌토성을 도성으로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웅진도성(熊津都城)은 문주왕 1년(475) 고구려에 의한 한성의 함락으로 천도한 이후 538년 사비로 천도할 때까지 머물렀던 도읍지이다. 차령산맥으로 1차적인 자연방어선을 갖추고 있는 웅진도성(공주 공산성)은 표고 110m의 공산에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축조된 포곡식산성으로서 북쪽은 곧바로 금강(錦江)에 접하고 있으며 남쪽은 공주시가지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천연적인 요충지로서의 조건을 구비하고 있다. 왕궁은 산성 내에 위치하고 있다.

사비도성(泗沘都城)은 성왕(聖王) 16년(538)에 웅진(熊津)으로부터 천도하여 의자왕(義慈王) 20년(660) 나·당 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하기까지 약 120년간 지속되었던 도읍지이다. 사비도성은 포곡식산성인 부소산성(扶蘇山城)과 외곽인 나성(羅城)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도성의 축조시기에 대하여서는 아직도 논의의 대상이 되고 있으나, 사비도성으로의 천도는 성왕 16년(538)에 이루어졌지만 그 준비과정에 있어서는 동성왕(東城王) 8년(486)에서 동왕(同王) 23년(501)까지 부소산성 및 나성 등의 방어시설에 대한 축조가 거의 완비단계에 이르렀을 것으로 판단된다.

사비도성은 기본적으로 한성시대 이래 백제도성이 가지고 있던 문제점들을 보완해 배후 산성인 부소산성과 왕궁과 시가지를 포용한 나성으로 구성한 것으로 보아야 하겠으나 ‘항(巷)’과 같은 도시 설계상의 운용과 관련된 부분에서는 중국 남조 도읍의 제도를 일부 수용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결국 부소산성에서의 포곡식산성은 웅진성에서의 포곡식산성의 축조술을 응용하여 발전시킨 것이며, 웅진시대에 왕궁이 웅진성 내에 있음으로 해서 불편했던 점을 감안하여, 사비시대에는 왕궁을 부소산성 밖에 시설하게 됨으로써 당시 백제로서의 독특한 나성을 축조하게 된 것으로 판단된다.

3) 신라(新羅)
신라 도성은 시종일관 경주를 벗어나지 않았으며 파사이사금(婆娑尼師今) 22년(101)에 월성(月城)을 축조하고 정궁(正宮)을 이 곳으로 옮겨 궁성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자비마립간(慈悲麻立干) 18년(475)에 명활성(明活城)으로 잠시 이거(移居)하였다가, 소지마립간(炤知麻立干) 9년에 월성을 수리하고 그 이듬해인 488년 1월에 다시 월성으로 이거하여 계속 정궁으로 이용하고 있었다. 도성내 조방제의 실시는 자비왕 12년(469)에 이루어졌는데 360방(坊) 35리(里)로 구획되었는데, 그 규모는 동서 160m, 남북 140m의 방안이었다.

신라는 고구려나 백제와 같이 왕경을 둘러쌓은 외곽(나성)이 없는 반면에 사방에 산성을 축조하여 도성 방위를 시도하였다. 즉 동에는 명활산성(明活山城)이, 서에는 서형산성(西兄山城)과 부산성(富山城)이, 남에는 남산신성(南山新城)이, 동북에는 북형산성(北兄山城)이 축조되어 나성(羅城)의 역할을 하였다. 통일 직후 문무왕(文武王)은 즉위 21年(681)에 도성을 크게 건설하려다가 의상법사(義相法師)의 만류로 그 역사(役事)를 중지한 바 있다.

4) 발해(渤海)
발해의 첫 도읍지는 성산자산의 중턱에 타원형으로 축조된 동모산성(東牟山城)이며, 그 후 중경과 상경 등 도성을 몇 번 옮기고 있는데 그 중 약 200여 년에 걸쳐 도읍한 곳은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이다. 상경의 평면은 장방형으로 성벽의 길이는 16,295m이다. 성문은 동·서에 각 2개소, 남·북에 각 3개소로 10개소가 설치되었고, 성내 북측 중심에 궁성이 자리하고 있으며, 11조(條)의 대도(大道)를 중심으로 구획된 방리(坊里)가 시설되었다. 내성의 남문에서 외곽의 남문을 연결하는 주작대로의 너비는 110m에 달한다. 외곽의 바깥쪽에는 호(濠)가 둘려져 있다.

5) 고려(高麗)
고려의 도성은 개경으로 태조 2년에 도읍을 여기에 정하고 개주(開州)라 하였으며, 광종(光宗) 11년에 황도(皇都)라 하였다가 성종(成宗) 14년 다시 개성부(開城府)라고 하여 500여 년간 번성하였다. 개경에는 궁성(宮城)과 황성(皇城) 외에는 성벽을 축조하지 않고 천험(天險)에 따라 방위하려고 하였으나 현종(顯宗) 때에 거란의 침구(侵寇)로 궁궐과 민호가 모두 분탕(焚蕩)하여, 강감찬의 요청에 따라 왕가도 등에 명하여 나성(羅城)을 축조하여 현종 20년(1029)에 완성하였다.

그리고 우왕(禑王) 3년에 개경이 바다에 가까워서 왜구의 피해가 우려되어 도읍을 내지(內地)에 옮길 것을 의논시켰는데, 최영이 제안하기를 도성이 너무 넓어 10만 병력으로도 방어하기가 쉽지 않으니 내성을 축조하여 불의의 우환에 대비하여야 한다고하여 내성(內城)을 축조하기로 하고 배극렴으로 이를 감독케 하였다. 그러나 얼마가지 않아 중지되었다가 조선조 태조 2년에 완성되었다. 이리하여 개경은 궁성, 황성, 내성과 외곽을 갖춘 도성체계를 갖추게 되었으며, 자연 지형에 따라 축조되어 전통적인 산성의 형태를 띠게 되었다. 성문은 궁성에 승평문, 동화문, 서화문, 현무문 등 4개소, 황성에 광화문 등 11개소, 내성에 남대문 등 8개소, 외성에 동대문(숭인문) 등 25개소가 설치되었다.

고려중기 말엽에는 몽고(蒙古)로부터의 병화를 피하고 장기적인 항전을 하기 위하여 강도(江都:강화도)로 천도하였는데, 강도의 도성은 내성(內城), 중성(中城), 외성(外城)의 3중으로 축조되었으며, 개경의 만월대와 방불한 지형을 택하여 궁궐을 건축하였다.

6) 조선(朝鮮)
조선왕조를 개창한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는 재위 3년(1394)에 한양(漢陽)으로 천도하여 궁궐(宮闕), 종묘(宗廟), 사직(社稷) 및 관아(官衙) 등을 건설하고, 1395년에는 도성조축도감(都城造築都監)을 설치하고 정도전을 책임자로 하여 도성을 축조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태조 5년(1396) 1월 9일에 59,500척의 성기(城基)를 1구간 600척씩 총 97구간으로 나누고, 민정(民丁) 118,070명을 동원하여 축성공사를 진행하여 2월 28일까지 49일 동안에 끝내게 되었다. 그러나 흥인문(興仁門) 부근에는 지형이 낮고 웅덩이로 되어 있어 공사가 완성되지 못하였으며, 7월의 폭우로 도성 수구(水口)및 옹성(甕城)과 성벽이 무너져, 그 해 8월 6일부터 민정(民丁) 79,400명을 동원하여 권중화 등으로 감독케 하는 제2차 공사를 시작하여 9월 24일에 공사를 완성하였다.

도성의 평면은 궁성을 중심으로 대체로 원형을 이루고 있는데 성벽은 북악(北岳), 낙산(駱山), 남산(南山), 인왕산(仁旺山)의 능선과 평지를 연결하여 축조한 평산성의 형태이다. 8개소에 성문(城門)을 시설하였으며, 정연하지는 않지만 지형조건에 따라 직선대로가 얼마간 ‘十’자형을 이루고 있다. 그 후 세종(世宗)과 숙종(肅宗)때에 대대적인 수축이 이루어졌으며, 특히 세종 때에는 도성수축도감(都城修築都監)을 두고 8도 장정 322,400명을 동원하여 토축부분을 모두 석축으로 고쳐 쌓았다.

이와 같이 역대 한국의 도성은 산성을 이용한다든지 또는 평지도성과 산성을 결합시키는 형태를 띠고 있다든지, 평산성을 축조하고 있는 것은 자연지형을 이용한 방어의 극대화를 꾀한 것으로 전통적인 산성축조의 영향에서 연유된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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