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성

공산성

[ 公州 公山城 ]

지역 공주

유적은 표고 110m의 공산에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축조된 포곡식산성으로서 북쪽은 곧바로 금강(錦江)에 접하고 있으며 남쪽은 공주시가지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천연적인 요충지로서의 조건을 구비하고 있다. 공산성의 평면형태는 서북과 동남이 장축을 이루는 부정형으로 성벽의 전체길이는 2,660m에 달하는데, 그 중 외성으로 불리는 토성 467m를 제외하면 본성의 길이는 2,193m가 된다.

현재 성벽은 70% 정도가 석축으로 되어 있고 토축부는 30% 정도를 나타내고 있는데, 동남부 외성 부분에 대한 성벽조사 결과를 볼 때, 백제시대 성벽은 토석혼축(土石混築)으로 구축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성벽의 규모는 지형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진남루(鎭南樓) 부근을 기준으로 하면 성벽의 기저부 폭은 4-6m 정도이며, 상부 폭은 1.5m 정도이다. 성벽의 높이는 최고지점에서 약 7m에 달하는 곳도 있으나 지형에 따라서는 2m 정도를 나타내는 곳도 있다. 한편 성벽에 가까운 내부에 호상(壕狀)의 요부(凹部)가 형성되어 있는 곳이 있는데, 이는 성벽 축조시 필요한 토량(土量)을 확보하기 위해 이곳을 굴토(掘土)하였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공산성에는 동·서·남·북 4방향에 각 1개소씩 모두 4개소의 문지가 시설되어 있는데, 이 가운데 남문인 진남루(鎭南樓)와 북문인 공북루(拱北樓)만이 조선시대에 건조된 성문이며, 동·서 2문은 최근에 복원한 것이다. 진남루는 공산성의 정문으로서 평면은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1920년에 해체 복원된 후 다시 1971년에 보수하였다. 공북루는 금강에 바로 인접하여 시설되었으며 평면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2층 누각으로, 1603년에 산성 수리와 더불어 건립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 이후 여러 차례 보수되었다.

서문인 금서루(錦西樓)는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서문루 3칸(西門樓三間)”, 『공주구읍지(公州舊邑誌)』에도 “동문, 서문 2층 3칸(東門, 西門, 二層三間)”으로 되어 있어 당시 문루가 존재했던 점은 확실하나 발굴조사시에 그 흔적을 확인하지 못하였다. 동문은 발굴조사 결과 조선시대 문지가 드러났는데 문폭이 2.46m, 통로 길이가 6.45m였으며, 문지석이 2매 남아 있었다. 1988년에 발굴조사를 토대로 복원한 것이다.

이밖에 성내의 유수(流水)를 성외로 내보내는 수구문지가 저지대인 북쪽 성벽과 고지대인 동남쪽 성벽에 각각 1개소씩 시설되어 있으며, 은밀히 성외로 통하는 암문(暗門)도 1개소에서 확인되었는데 이는 금강으로 통하고 있다. 성내의 백제시대 유구로는 임류각지(臨流閣址), 추정왕궁지(推定王宮址), 지당지(池塘址), 목곽고(木槨庫) 등이 조사되었다.

公山城 臨流閣址 平面圖

公山城 臨流閣址 平面圖

임류각지(臨流閣址)는 공산성의 동남쪽 산정상부에 위치한 광복루(光復樓) 서쪽 약 150m 지점의 산 중턱 경사지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 일대에서 ‘류(流)’명이 새겨져 있는 와편을 수습하면서 임류각지의 후보로 주목되어 온 곳이다. 임류각은 동성왕 22년(500)에 궁의 동쪽에 세워진 높이가 5척에 이르렀다는 장대한 누각으로 기록되어 있다. 1980- 1981년 사이에 실시된 발굴조사 결과 이곳에서 서북-동남 방향의 장축을 가진 5×6칸의 건물지가 확인되었다.

건물의 평면적은 109㎡ 가량으로서 초석배치와는 달리 10.4×10.4m의 정방형을 이루고 있다. 이 건물의 기초는 기반토를 약간 깎아내어 정지한 후 성토나 적심석 없이 생토면에 그대로 초석이나 지대석을 놓은 방식으로 되어 있다. 출토유물은 와당(瓦當), 평와편(平瓦片), 토기, 자기 등인데 이 가운데 백제시대의 유물은 단판8엽연화문와당(單瓣八葉蓮花文瓦當), ‘류(流)’명 와편, 삼족토기편, 토기 뚜껑 등인데, 토기로 본 그 연대가 5세기말-6세기 전반 무렵으로 비정 가능하여 기록상의 임류각 축조연대와 거의 일치한다.

公山城內 遺構 位置圖

公山城內 遺構 位置圖

추정왕궁지(推定王宮址)는 남문인 진남루 북서편의 쌍수정 광장으로 불리워져 온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이 일대는 표고 85m의 고지대에 해당하며, 북으로는 금강이 잘 조망되고 남쪽으로 공주시가지가 한 눈에 들어오는 곳이다. 전체 면적은 6,800㎡ 정도여서 공산성내에서는 가장 넓은 대지에 해당된다. 1985년에 실시된 발굴조사 결과 적심석을 갖춘 건물지 2동, 굴건식건물지(掘建式建物址) 2동, 지당지(池塘址) 1기, 목곽고지(木槨庫址) 1기 등 다수의 건조물터가 확인되었다. 이 가운데 왕궁의 유허로 볼 수 있는 건물지는 적심석을 갖춘 건물지 2동인데, 그 규모는 제1건물지가 6×4칸이고, 제2건물지가 2×5칸이다.

굴건식건물지의 윤곽은 주공(柱孔)의 평면분포가 매우 복잡하여 확실치 않으나 대체로 위의 제1건물지와 평면이 조화되도록 그 북쪽과 서쪽에 각각 1채씩 배치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들 건물지에서 출토된 유물은 와당, 평와편, 토기편 등인데, 평와편 가운데는 앞의 임류각지에서도 확인된 바 있는 ‘류(流)’명이 있는 와편도 포함되어 있다.

지당지(池塘址)는 추정왕궁지로부터 남쪽으로 약 20여m의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그 규모는 상면 직경 7.3m, 바닥 직경 4.78m, 깊이 3m의 대접모양으로서 그 호안(護岸)은 모두 석재로 축조되어 있는데, 대체로 양호한 상태로 남아 있는 편이다. 호안 내부에서 연화문와당, 파상문와당(巴狀文瓦當), 삼족토기, 병, 토제 벼루편, 완(盌), 등잔 등이 수습되었는데 이들 유물들로 미루어 그 시축연대는 대략 5세기 말-6세기 초로 비정된다.

목곽고지(木槨庫址)는 추정왕궁지 제1건물지의 서쪽으로 약 25m 지점에서 조사되었다. 이 목곽고는 기반토인 풍화암반토를 평면 4.6×4.2m, 깊이 약 2.9m 정도의 넓이로 굴광(掘壙)한 뒤 그 속에 3.1×1.45m 규모의 목곽을 시설한 것인데, 굴광과 목곽 사이에는 판축기법으로 흙을 채워 놓았다. 목곽의 구조는 두께 3-5㎝, 폭 13-15㎝되는 목판재를 목곽의 장·단변 만큼의 길이대로 잘라 이은 것인데 판재 사이에는 결구가 없이 목곽 4모서리와 양장변(兩長邊)의 가운데 지점에 각각 직경 24㎝ 가량의 통나무 기둥을 박아 세움으로서 판재를 지탱하도록 하였다. 조사 당시 목곽 바닥으로부터 약 0.4m에 이르는 높이까지는 참나무 목재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 목곽고 내에서는 연화문와당, 파상문와당 등 와당류와 토기편 등이 출토되었다.

그밖에 공산성 내에는 원형 또는 방형의 구덩이들도 확인되었는데, 저장혈 또는 함정들로 추정된다.

참고문헌

  • 百濟都城硏究(朴淳發, 百濟歷史再現團地造成調査硏究報告書, 考古美術分野Ⅰ, 忠淸南道, 1996년)
  • 公山城 城址 發掘調査報告書(安承周·李南奭, 公州大學校博物館, 1990년)
  • 公山城 百濟推定王宮址 發掘調査報告書(安承周·李南奭, 公州師範大學博物館, 1987년)
  • 公山城(安承周, 公州師範大學 百濟文化硏究所, 198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