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성

산성

[ 山城 ]

산성(山城)의 기원(起源) : 한국에서의 산성의 기원은 『사기(史記)』에 의하면, 위씨조선 말에서부터 그 존재가 기록되고 있다. 즉 한 무제가 위씨조선을 공격할 때에 『왕검성(王儉城)』에서 1년 가까이 저항하게 되는데 “우거(右渠)는 험하고 견고한 것만 믿다가 나라의 대가 끊어지게 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 왕검성이 산성일 가능성만 추측할 뿐이다. 아직 한국 산성의 기원에 대해서는 확언할 수 없는 단계이다.

그러나 『삼국지(三國志)』에 이르면 분명히 그 존재를 살필 수 있다. 즉 부여조(夫餘條)에는 “성책(城柵)은 둥글게 만들어서 마치 감옥과 같다.”고 기록하고 있고, 고구려조에는 “이 성을 책구루(책溝루)라 부른다. 구루란 고구려 사람들이 성을 부르는 말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동옥저에는 “옥저성으로 현도군을 삼았다.”고 하고, “동부도위를 설치하고 불내성(不耐城)에 치소를 두었다.”고도 기록하고 있으며, “북옥저는 일명 치구루(置溝루)라고도 한다.”고 하여 이 시기에 성곽이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

또한 삼한 중 진한조와 변진조에는 “성곽이 있다”고 하여, 성곽의 존재를 알 수 있지만 (마)한조에는 “성곽은 없었다.”고 하고 있어 유독 마한에만 성곽이 없는 것으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마)한조를 잘 살펴보면 뒷부분에 “국중(國中)에 무슨 일이 있거나, 관가(官家)에서 성곽을 쌓게 되면”이라고 하여 성곽이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이 성곽이 어떠한 형태를 나타내고 있으며, 그 규모는 어떠한지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마한에도 성곽이 있었음은 분명하다고 하겠다. 최근에 국립공주박물관에서 발굴조사한 부여 송국리(松菊里)에서는 B.C. 5세기경 집자리를 보호할 목적으로 목책(木柵)을 시설한 유적이 밝혀지고 있어, 상기 기록을 뒷받침한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한국을 대표하는 성곽은 산성이라고 할 수 있다. 산성은 외적의 침입을 방어하고 영토를 보전하기 위하여 지리적 요충지에 축조하는 시설물이다. 산성을 쌓고 지키게 되면 전술·전략적인 측면에서 몇 가지 유리한 점이 있다. 그것은 평지에 성을 쌓고 지키는 것보다는 아군의 단점을 보완할 수 있는 반면에 적군의 장점을 약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적군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우세한 인원과 우수한 장비를 준비하여 가지고 간다 하여도, 힘들여 산 위를 기어올라가다 보면 목적지에 도달하였다 하더라도 이미 기력이 쇠진하여 막상 전투 시에 이를 효과적으로 활용하기가 어려운 점이 있을 뿐만 아니라 성 안에 있는 아군의 사정을 파악할 길이 없어 작전에 어려움이 수반된다.

반면에 아군은 지형적으로 유리한 입장에서 최악의 경우 농성만 한다하더라도 적을 퇴치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한국에서 산성을 중심으로 축조하고 있는 것은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본기〉보장왕 6년조에 “고구려는 산을 의지하여 성을 축조하였기 때문에 쉽게 함락시킬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고, 『고려사(高麗史)』에 “당감(唐鑑)에는 고(구)려에서 산을 이용하여 성을 축조하는 것을 상책(上策)이라 하였으니, 외방(外方)의 평지에 성을 축조하는 것을 마땅히 정파시켜야 합니다.”라고 한 기록에서 그 효용성을 엿볼 수 있다 하겠다.

당시의 산성은 그 용도와 기능면에서 볼 때 단순히 외적의 침략을 방어하는 전략적인 요새로서의 기능뿐만이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지방행정 통치의 중심지로서의 역할도 하였다고 보여진다. 이와 같은 산성의 중요성은 삼국시대 뿐만 아니라 고려·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계속 논의되고 있다. 특히 조선 전기 및 양란(兩亂)을 전후한 시기에 산성에 대한 여러 가지의 논의가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다수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가 있다.

산성(山城)의 형식구분(形式區分) : 산성의 형식에 대하여서는 조선 후기 실학자 중의 대표적인 학자로 꼽을 수 있는 다산 정약용의 저서 『민보의』에서 산성의 축조에 유리한 지형을 고로봉형(고로峰形), 산봉형(蒜峰形), 사모봉형(紗帽峰形), 마안봉형(馬鞍峰形)의 4가지 형태로 꼽았다.

첫째, 고로봉형(고로峰形)은 사방이 높고 중앙부가 낮은 분지형의 지형이다. 산성의 축조에 가장 적합한 지형으로 꼽았는데 그 이유는 산능선을 따라 성벽을 쌓았기 때문에 적의 방어에 용이할 뿐만이 아니라 평지에 축조한 성에서처럼 겹겹이 성을 쌓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성 내부는 오목한 골짜기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성벽 위에서는 적의 움직임을 쉽게 관찰할 수가 있으나 성 밖에 있는 적은 성 안의 사정을 알 수가 없어 전투에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으며, 골짜기 안에는 많은 사람을 수용할 수가 있고, 물을 비롯하여 전투에 대비하기 위한 여러 물자를 마련 보관하기 좋은 지형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산봉형(蒜峰形)으로서 마늘의 모양처럼 정상부가 평탄하고 넓은 반면에 외곽부는 급격한 경사를 이루고 있는 지형이다. 셋째는 사모봉형(紗帽峰形)인데 이는 사모관대의 형태와 비슷하게 전방이 낮고 후방이 높은 지형을 이루고 있는 지세를 갖춘 지형이다. 넷째는 마안봉형(馬鞍峰形)으로서 2개의 봉우리를 연결하여 말안장과 같이 양쪽이 높고 가운데가 잘록하게 낮아진 지형이다.

위와 같은 다산의 분류는 구한말인 고종 연간에 병조판서, 훈련대장 등을 역임한 바 있는 신헌에게 계승되었는데, 그는 부적합한 지형에 대하여도 다음과 같은 9가지 요소를 들고 있으니, ① 적으로부터 관측될 정도로 상대적으로 낮은 지형. ② 한 면은 가파르고 다른 한 면은 경사가 완만하여 적으로부터 배후기습이 우려되는 지형. ③ 인접해있는 보(堡)나 산성과 연락을 취할 수 없는 심산유곡 중에 있는 산. ④ 접근로가 단 하나뿐인 산. ⑤ 수원(水源)이 없는 산. ⑥ 전라도의 입암산성처럼 마을과 멀리 떨어져 있고 매우 높은 산. ⑦ 적의 화공(火攻)이 염려될 만큼 수풀이 연이어 우거진 곳. ⑧ 양쪽 봉우리를 모두 수비할 수가 없는데도 그 양자간의 거리가 궁시(弓矢)의 유효사정거리 안에 있는 산. ⑨ 돌, 나무 등 보(堡)를 축조하거나 방어에 필요한 재료가 없는 산 등을 거론하고 있다.

이를 감안할 때 산성의 형태는 주로 산성이 위치한 입지조건과 성벽의 통과선이 구체적으로 택하는 지형에 대한 이용방법을 기준으로 하여 산정식(테뫼식)과 포곡식의 두 가지 계통으로 크게 나눌 수 있으며, 다시 이 두 가지 형식을 복합한 복합식으로 구분할 수 있다.

1) 산정식산성(山頂式山城) 산정식 산성을 몇 가지 입지적인 특징을 가지고 구분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산중복보다 높은 위쪽에 잡았으며 산봉우리를 둘러싸서 마치 머리에 수건을 동여맨 것처럼 원형으로 성벽을 구축한 것을 테뫼식이라 할 수 있으며, 정약용의 산봉형과 마안봉형이 이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산봉형은 하나의 봉우리를 포용하고 있는 산성의 형식으로, 이 산봉형으로 산성을 구축하게 되면 성벽이 산정상 아래 부분에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적이 공격하기 어렵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외부의 적에게 노출될 염려가 있을 뿐만이 아니라 성 내부에 사람들이 거주할 수가 있는 평탄지를 확보하기가 어렵고, 수원의 확보 등에도 난점이 있어 많은 병력이 장기간 주둔하기에 문제가 있다. 따라서 하나의 봉우리를 포용하고 있는 산성은 대체로 연락용, 감시용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였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마안봉형은 인접하여 있는 두 개의 산봉우리를 연결하여 산성을 축조하는 형식으로 산봉형의 단점을 어느 정도 보완할 수 있는 형식이라 하겠다.

둘째는 평탄하게 생긴 산정상부를 둘러서 구축한 경우는 순수한 산정식이라 할 수 있는데, 정약용의 고로봉식이 이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이 산정식으로서 체성을 축조하게 되면 성벽이 산의 정상부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적의 공격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성 내부의 동정이 적에게 노출될 염려가 적다는 장점이 있다.

셋째는 산정상부에서 성벽이 시작하여 산능선을 따라 내려와 한쪽 산복에 걸쳐 완만하게 경사된 지형을 이용하여 비교적 넓은 면적을 포용하고 다시 산능선을 따라 산 정상부로 올라가며 구축된 것을 산복식이라 할 수 있겠다. 정약용의 사모봉형이 이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이 형식은 테뫼식 및 산정식산성의 단점인 성 내부의 공간 확보 및 수원 확보 등의 문제점들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다고 하겠다. 따라서 산복식산성 내부에는 많은 병력의 장기적인 주둔과 관련된 것으로 보여지는 수 개소의 건물지가 반드시 발견되고 있다.

또한 산복식산성은 거의 대부분이 석축기법에 의하여 축조되었다는 것을 또 하나의 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 따라서 이 형식은 테뫼식이나 산정식산성보다 뒤늦게 출현한 형식이라고 하겠다. 또한 산복식산성은 포용하고 있는 면적의 규모에 따라서 그 내부에는 조그만 계곡을 포용하고 있는 경우도 있어 종종 포곡식산성과 혼동을 일으키기도 한다.

넷째는 평탄한 산정상부를 이용한 산성들 중에는 평지에 고립된 낮은 구릉상에 입지한 것을 볼 수 있으며 이 범주에 속하는 산성의 특징은 낮은 구릉 위에 자연적인 지형을 이용하여 성벽이 축조되어 있으나 문지 및 수구가 평지에 접근하여 시설되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성곽을 평산성(平山城) 또는 구릉성(丘陵城)이라 할 수 있다.

2) 포곡식산성(包谷式山城) 포곡식산성은 성내에 1개 또는 그 이상의 계곡을 포용하고 그 주위를 둘러싼 산줄기의 능선을 따라 성벽을 구축하였다. 따라서 성벽의 통과선은 산 정상부에서 능선을 따라 평지에 이르며 이 성벽은 다시 평지에서 능선을 따라 정상부에 오르게 되며 그 기복에 있어서 보다 변화가 심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포곡식산성의 평면형태는 원형 또는 타원형을 띄고 있는 테뫼식 또는 산정식산성과는 달리 불규칙적인 부정형의 형태를 띄고 있는 경우가 많다.

계곡을 흐르는 수류(水流)는 한곳으로 모아져서 평지에 가까운 위치에 시설된 수구(水口)를 통하여 성외로 유출하게 된다. 따라서 성내에는 연못이 한 곳 이상 설비되게 된다. 이 형식은 내부에 넓은 평탄지와 계곡 및 수원을 포괄한 축성법인 만큼 전자의 산정식보다 훨씬 광대한 규모를 이루고 있어 보다 많은 인원이 성 안에서 장기간 주둔할 수가 있다는 장점이 있다. 고구려 성곽에서 많이 볼 수 있다.

3) 복합식산성(複合式山城) 산정식과 포곡식의 두 형식이 결합해서 성립된 유형을 복합식산성이라고 한다. 이 산성은 규모에 있어서 협소할 수밖에 없는 산정식산성에, 어떠한 목적에 의해서 그것을 크게 확충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바로 인접된 지형에 포곡식산성을 접속하여 개축함으로서 만들어진 새로운 형식의 산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현재까지 조사결과 밝혀진 유적으로는 직산 사산성, 서천 건지산성, 남양 당성, 부여 부소산성·석성산성의 5개를 들 수 있다. 그러나 최근의 발굴조사에서 부소산성은 포곡식산성이 백제시대에 축조되었고, 군창지 소재 테뫼식산성과 사비루 소재 테뫼식산성은 모두 통일신라시대에 축조되었음이 밝혀져, 이에 대한 새로운 평가가 거론되고 있다.

토축산성(土築山城)

1) 삭토(削土)에 의한 축조기법(築造技法) 산정식산성에서 많이 나타나는 방법으로 자연적인 급경사면을 깎아내어 성체로 이용하는 형식이다. 정약용의 고로봉형 산성같이 사방이 높고 중앙부가 낮은 분지형의 지형에서 나타날 수 있는 축조기법이다. 대부분의 삭토는 산 정상부의 외곽에 형성된 경사면의 내·외부를 ‘L’자에 가깝게 깎아내고 다시 그 깎아낸 흙을 이용하여 성토나 도축(搗築)으로 성체의 낮은 부분을 보완하여 바깥쪽은 높고, 안쪽은 상대적으로 낮은 벽면을 구성하게 되는 것이다. 성내에는 수류(水流)로 인한 성체의 유실을 방지하고, 군사들의 이동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내호(內壕)로 보이는 통로가 형성되어 있다. 성벽 상부에는 방어의 효과를 높이기 위하여 목책(木柵)이나 목익(木杙) 혹은 녹각성(鹿角城) 등을 시설하는 경우도 있다. 이 삭토에 의한 축조기법은 공역과 시간을 절약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2) 성토(盛土)에 의한 축조기법(築造技法) 고대 토축산성을 축조하는 방법 중에서는 가장 보편적인 방법으로, 획정된 성기(城基)의 내·외면을 ‘U’자형으로 파내어 그 곳에서 나온 토량을 성토하여 성체를 구축하는 형식으로, 구조상의 특징으로는 내황(內隍)과 외황(外隍)이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것이라 하겠다. 대개 성벽을 2중으로 구축하였다는 기록은 바로 성토법에 의한 토축산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성토법에 의한 성벽 축조방법은 테뫼식산성에서 많이 나타나는 형식이다.

3) 판축(版築)에 의한 축조기법(築造技法) 판축기법(版築技法)은 동양 고대건축사에서 특이하게 발달된 토목공법의 하나이다. 이 공법은 용산기(龍山期)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며 은(殷) 중기의 유적에서 그 존재가 확인되고 있다. 이 방법이 다방면으로 활용되었으며 건축의 기단을 비롯하여 묘광의 전토(塡土), 성벽 등을 축조할 시에 사용되었다.

문헌기록으로 남아 있는 판축기법의 예는 주초(周初)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시경』 대아 문왕지십 면편(綿篇)에는 문왕의 풍경(豊京)건설에 대해 노래하는 내용 중에 판축기법으로 성벽을 쌓는 광경이 묘사되어 있다. “삼태기에 흙을 많이 많이 담아다 축판(築板) 안에 빨리 빨리 쏟아 넣어서 이것을 다같이 다져서 올리고 담이 중복된 곳은 깎아내고 단단하게 하여 모든 담벽을 금방 세우니 역사를 권하는 큰 북이 당하지를 못하더라(구之잉잉 度之薨薨 築之登登 削屢馮馮 百堵皆興 고鼓弗勝)”한 것이 그것이다. 한편 고고학적인 자료상으로 보면 河南城 鄭州 白家莊에서 발견된 상대(商代) 조기(B.C. 1600년경) 성벽의 판축기법이 가장 이른 예로 밝혀져 있다.

『영조법식』에는 이 판축기법에 대하여 서술하고 있는데, 성체의 길이 7자 5촌마다 영정주(永定柱)와 야차목(夜叉木)을 2개씩 사용하며 성벽의 높이를 5자씩 축조하고 그때마다 횡목(橫木) 1개를 사용하는 것으로 이해되며, 협판(夾板)은 매 3자마다 새끼로 묶어서 그 새끼의 한쪽 끝을 판축성체 내부에 박은 쐐기에 고정한다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한국에 이것이 도입된 것은 삼국시대부터이며 특히 백제에서 널리 보급되었다. 판축에 의한 축조기법은 성체를 구축하는데 있어서는, 먼저 지형이 경사면이든 내외의 높이 차가 없는 평지에 있어서든 성벽이 지나갈 통과선을 수평으로 정지하고, 일정한 판축 구간마다 협판을 세우고 기둥으로 고정시킨 후 일정한 두께씩 층을 이루도록 점질토와 사질토를 교차로 다져가면서 수평으로 쌓아 올려서 성체를 수직에 가깝게 이루는 형식이다. 이와 같이 성체를 구축하기 위하여서는 협판(夾板), 목주(木柱)가 구비되어야 하며, 성벽을 보호하기 위하여 기초부에 호성석축(護城石築)이 축조되기도 하고 혹은 석열(石列)이 1단 내지 2단 정도 놓여지기도 한다.

정약용은 『여유당집』에서 협판을 세우는 목적이 판축성체를 구축하기 위한 목적 외에도 하나는 성벽 두께의 기준으로 삼고, 하나는 흙을 쌓는 높이의 기간(基幹)을 삼고자 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그리하여 이 협판의 두 머리를 연결하고 판자 사이에 흙을 한겹 한겹 채워서 목봉으로 두드려 축조하는데, 그 협판의 두 머리를 연결하였던 목재의 흔적이 부소산성 발굴조사시에 확인되었다. 보고자는 이것을 횡장목(橫長木)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중국 河北省 易縣 燕下都의 발굴보고에서는 이 횡장목을 천혼(穿棍)이라고 하며, 그것이 부식됨으로서 생긴 구멍을 혼안(棍眼)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것은 협판의 두 머리를 끈으로 묶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라고 하겠다.

판축토를 목봉으로 다지는데 있어서는, 금강사지(金剛寺址) 목탑지의 예를 보면 그 판축층 상면에 직경 3~4㎝의 막대기 끝으로 두드려 다진 압흔이 남아 있는데, 이 원형의 ‘凹’흔적을 중국에서는 와자(窩子)라고 부르고 있다 한다. 한편 『중국고대건축사』에서는 흙을 다지는 목봉을 항저(항杵)라고 하고 있으며, 원형의 ‘凹’흔을 항와(항窩)라고 하고 이 항와(항窩)의 직경은 3㎝인데, 판축층은 모두 수평이며, 층의 두께는 약 7~10㎝로 상당히 견고하다고 하고 있다.

정약용은 축성에 사용할 흙의 성질에 대하여도 언급하고 있는데, 점질토와 석비레를 교합하여 축조한 토성이 가장 좋다고 하고 있다. 또한 협판의 흔적은 니토(泥土)와 회삼물(灰三物)로 그 겉면을 보축하며, 그렇게 할 수 없으면 큰 석재를 진흙과 같이 쌓고 다시 판자 사이를 흙으로 다진다고 하고 있는데, 판축성곽 조사시에 판축성체 벽면에 피복을 입힌 것이 확인되고 있어 이러한 구축방법은 삼국시대로부터 전래되어 온 것이 반영된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한편, 『통전』 수거법에는 성체의 규모와 공력의 소요인원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는데, 성 기저부 폭은 성 높이의 반으로 하고, 상부 폭은 성 기저부 폭보다 반으로 하면, 성벽의 높이 5장(丈), 기저부 폭 2장(丈) 5척(尺), 상부 폭 1장 2척 5촌(寸)이 된다고 하고, 높고 낮음과 넓고 좁음은 이것으로 기준을 삼는다고 하고 있다. 『통전』이 편찬된 당대(唐代)에는 1척에 28~31.3㎝를 적용하고 있으므로, 성벽의 높이는 14~15.65m, 기저부 폭은 7~7.83m, 상부 폭은 3.5~3.91m로 환산할 수 있다. 또한 이와 같은 규모로 1척(28~31.3㎝)을 축조하는데, 매 1사람의 공력이 하루에 2척의 흙을 쌓는다는 것을 가정하여 하루에 47명의 공력이 필요함을 나타내고 있다.

한편, 세종 3년에 도성수축도감이 보고한 문건에는, 도성을 수축하는데 토성은 매 자(尺)당 각 15명씩의 인력이 소요되며, 석성은 매 자당 각 5명씩의 인력이 소요된다고 하여 토축이 석축보다 3배의 공력이 들고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 물론 이 수치는 수축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축성재료가 이미 준비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기는 하나, 축성재료를 준비하는 과정이 생략된 상태에서는 토축성이 석축성보다 더 많은 공력을 요하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나타내주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현재 판축에 의한 축조기법으로 구축된 성곽유적으로는 몽촌토성, 공주 공산성, 부여 부소산성, 목천토성, 직산 사산성, 결성 신금성, 익산 오금산성, 나주 회진토성(신풍리 토성), 양산 순지리 토성, 울주 화산리 성지, 길림 용담산성, 무순 고이산성 등이 있다.

참고문헌

  • 백제도성연구(朴淳發, 百濟歷史再現團地造成調査硏究報告書, 考古美術分野Ⅰ, 忠淸南道, 1996년)
  • 百濟 泗 都城의 築造時期에 대한 一考察(沈正輔, 東北아시아의 古代都城, 東亞大學校開校50周年紀念 國際學術大會 發表論文集, 1996년)
  • 백제 산성연구(沈正輔, 百濟歷史再現團地造成 調査硏究 報告書, 1996년)
  • 中國古代建築史(劉敦楨 著·鄭沃根 外 共譯, 1995년)
  • 扶蘇山城 發掘調査 中間報告(扶餘文化財硏究所, 1995년)
  • 韓國邑城의 硏究(沈正輔, 學硏文化社, 1995년)
  • 百濟城郭의 類型과 築造技法(孔錫龜, 大田의 城郭大田直轄市, 1993년)
  • 申櫶의 國防論(朴贊植, 歷史學報 117, 1988년)
  • 韓國城郭의 硏究(孫永植,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1987년)
  • 木川土城(尹武炳, 1984년)
  • 民堡議 民堡擇地之法(丁若鏞, 與猶堂全書 遺補 3), 堡制 2(申櫶, 民堡輯說), 《史記》, 《三國志》, 《三國史記》, 《高麗史》, 《通典》守拒法, 《世宗實錄》卷13, 3年 10月 戊午條, 築城堞(丁若鏞, 與猶堂集 卷1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