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금성

신금성

[ 洪城 神衿城 ]

지역 홍성
西壁 版築 土壘 및 永定柱 露出 모습

西壁 版築 土壘 및 永定柱 露出 모습

신금성은 북에서 남으로 뻗어 내린 평지에 인접한 구릉 말단부의 해발 40~60m 내외의 저평한 지역에 순수한 토축 방식으로 축조되어 있어 평지성에 가까운 입지를 하고 있다. 유적 주변에는 상당한 규모의 충적평야가 넓게 펼쳐져 있으며, 유적 동남편 1㎞ 지점에서는 유적 동편에서 흘러내린 금리천과 서편 들판을 관통하는 금곡천(琴谷川)이 합쳐져 아산만으로 유입되고 있다.

성벽은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축조된 관계로 북벽이 남벽보다 약간 길고 밖으로 만곡(彎曲)하여 있는 역사다리꼴 형태를 하고 있으며, 서벽은 남북일직선에 가깝게 되어 있다. 그런데 이 성은 특이하게 성 내부에 동서로 가로 지르는 또 하나의 토루(土壘)가 있으며, 이 토루에 의해 성은 남북으로 이등분되어 있다. 이처럼 토루에 의해 이등분된 이 성은 북쪽 부분이 남쪽 보다 면적이 넓고 토루도 높게 되어 있다. 이에 따라 북쪽 부분이 성의 중심적인 지역으로 보이므로, 편의상 북쪽 부분을 ‘내성’, 남쪽 부분을 ‘외성’이라 명명하였다. 그러므로 성 내부의 동서로 가로지르는 토루는 내성의 남벽인 동시에 외성의 외벽이 되는 것이다.

성벽의 길이를 내성과 외성으로 구분하여 보면, 정상부를 기준으로 할 때 내성벽의 길이는 북벽이 215m, 서벽이 85m, 동벽이 90m이며, 남벽은 현재 45m 정도만 남아 있으나, 최근 유실된 부분을 측정 복원하면 남벽의 길이는 150m 쯤 된다. 여기에 내성 동남편의 수구지(水口址)로 추정되는 성벽 유실부 20m를 합치면 내성벽의 총길이는 560m 정도가 된다.

한편, 외성의 서벽은 60m 쯤 되며, 추정 남문지 서편의 외성 남벽 토루는 90m이고, 외성 동남벽은 70m 쯤 된다. 이에 따라 성벽의 전체 둘레는 내성 전체길이에서 내성남벽 150m를 제외하고, 여기에 외성벽을 포함하면 645m 정도이다.

한편, 북·서·남벽 등의 성벽이 잘 남아 있는데 비해 동벽 부분은 뚜렷하지 않으며 내부에서 외부로 급경사를 이루면서 15m 이상 높이가 떨어지고 있다. 이로 보아 동벽 부분은 원래 경사진 자연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여 성곽이 아닌 다른 시설물을 설치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신금성은 판축기법으로 축조한 토성이나, 내·외성의 축조기법이 약간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이 중 내성벽은 판축 기저부 석열(石列)을 놓고 영정주(永定柱)를 사용하여 구간별로 순차적으로 축조하였으며, 축성 구간간의 접경지역 단면이 수직으로 되어있다. 이에 비해 외성벽은 판축 기저부 석열이 보이지 않으며, 구간 사이의 경계지점이 수직이 아닌 수평 교차로 되어 있다.

발굴조사시에 수혈유구(竪穴遺構) 2개소와 저장공(貯藏孔) 4~5기가 확인되었는데, 이 내부에서는 세발토기(三足土器) 등 백제시대의 토기가 다수 출토되었다. 이 신금성의 축조시기는 판축토루 내에서 백제시대 토기편을 비롯하여 통일신라시대의 소병(小甁) 파편이 나오는 점으로 미루어 통일신라시대-고려시대 초기인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내성벽(內城壁)의 축조 과정은 서남벽에서 살펴보면 먼저 성벽이 놓일 부분을 정리한 후, 0.3~0.6m 크기의 할석(割石) 또는 판석(板石)을 사용하여 성벽 기저부의 양편에 각각 1열로 판축 기저부 석열을 놓고 본격적인 토축을 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판축 기저부 석열은 기본적으로 축성부분의 성벽 폭을 표시하면서, 성벽을 지탱해 주는 역할도 일부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내성 남벽과 서벽의 접경지점에서는 내성 남벽의 판축 기저부 석열이 서벽 판축 기저부 석열보다 0.5m 정도 낮게 단이 지도록 연결되어 있다. 그밖에 내성 서벽의 경우는 1차 판축이 이루어진 후 내·외부에 보축으로 보이는 2차 판축이 이루어져 있다. 한편 북벽의 경우 북문지 서편 성벽에서는 판축 기저부 석열의 존재가 확인되었으나, 북문지 동편 성벽에는 이 판축 기저부 석열이 없으며 대신 성벽 내부에만 성격이 불확실한 석열이 ‘ㄴ’자형으로 놓여 있다.

내성벽은 판축 기저부 석열을 놓고 영정주를 세운 다음 구간별로 축조하였는데, 판축 구간 사이의 경계에 틈이 없고 영정주 위치가 정확한 대칭을 이루지 않는 점으로 미루어 전 구간을 동시에 구축한 것이 아니라, 한 지점부터 순차적으로 축조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내성의 서벽과 남벽은 단이 지면서 연결되어 있으므로, 이 서남벽 접경 지역부터 성벽 축성을 시작한 것으로 생각된다.

영정주가 세워질 위치에는 대체로 판축 기저부 석열이 끊어져 있으며, 영정주의 직경은 일정치 않으나 대략 23~25㎝ 정도이다.

서벽의 1차 판축의 경우 영정주 사이의 간격이 구간에 따라 일정치 않고 내외부가 다르게 나타나는데, 이는 축성구간이 정확한 방형(方形)이 아니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다만 영정주 사이의 평균 간격이 3.7~3.8m 정도여서 이것을 곧 축성구간의 길이로 볼 수 있으며 이는 성벽 너비와 거의 비슷하다. 그밖에 내성 서벽 1차 판축의 경우 서벽 전체 길이 85m를 구간 길이로 나누면 축성 구간 수는 25개 내외가 된다.

성벽 폭은 내성 서벽의 경우 1차 판축 성벽의 기저부 폭이 3.7m로 균일하게 나타나며, 남벽의 경우는 3.75m로서 두 성벽의 기저부 폭이 거의 동일하다. 이에 비해 N-ⅡTr. 단면에서 확인된 내성 북벽의 성벽 폭은 4.2m여서 서벽과 남벽보다 약간 넓게 되어 있다. 한편 서벽 1차 판축에 덧붙여 축조된 2차 판축은 한정된 구간만 축조되어 있으며, 북쪽으로 가면서 그 폭이 좁아진다. 이중 외부 2차 판축은 확인된 부분의 남쪽 폭이 2.1m, 북쪽이 1.1m이며, 내부 2차 판축은 폭이 1.6m, 북쪽이 0.7m 정도이다.

성벽의 잔존 높이는 각 지점별로 일정치 않은데, 전체 성벽 중 내성벽의 서북벽 모서리 지점 성벽 높이가 가장 높게 남아 있다. 내성 서벽의 경우 남쪽 끝부분의 잔존 높이가 1m이고, 서남벽 모서리 지점에서 북쪽으로 2/3 지점인 N90m 지점의 성벽 높이는 2.15m로서, 북쪽으로 가면서 잔존 성벽의 높이가 높아지고 있다. 이로 보면 서벽은 원래부터 북쪽으로 가면서 성벽이 높아지도록 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밖에 내성 남벽은 W-ⅡTr. 지점의 잔존 높이가 1.4m이고, 북벽은 N-ⅡTr. 지점에서 1.1m 정도이다. 축성당시의 성벽 높이는 내성 서벽 N90m 지점에서 최소 성벽 높이가 4.1m, 남벽 W-ⅡTr. 지점에서는 높이가 2.4m 이상으로 복원된다

성벽기울기는 잔존 양상에 따라 약간씩 다른데 내성 서벽과 북벽은 직각에 가깝게 남아 있고, 내성 남벽의 기울기는 82˚내외이다.

외성벽(外城壁)은 남문지에 인접한 S-ⅠTr. 1개 지점만 절개 조사하였는데, 외성 남벽은 구 지표면을 이용하여 판축 기저부 석열이 없이 축성하였으며, 축성에는 패각(貝殼)이 많이 섞인 흙과 점질토를 주로 이용하였다. 또한 이는 구간에 따라 순차적으로 축조한 것이 아니라 2개 구간을 동시에 1층씩 맞물리도록 교차로 쌓은 것이 Tr. 단면에서 확인되었다.

이 절개 지점의 성벽 기저부 폭은 최소 7.5m이며, 현존 성벽의 가장 높은 부분을 기준으로 할 때 잔존 성벽 높이는 3m이나 4.7m 이상으로 복원된다.

문지(門址)는 내성 북벽과 외성 남벽의 중간부분이 각기 잘리워져 있고, 이곳은 현재에도 성 내외부로 통하는 소로로 이용되고 있어, 이들이 각기 북문지·남문지로 추정된다.

이중 추정 북문지는 조사결과 사방에 주초석 4개가 남아 있어, 정면·측면 각 1칸씩의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남문지의 경우에는 유구를 전혀 확인할 수 없었는데, 남문지의 원래 자연지형이 낮아 현재 성내의 유수(流水)가 이곳으로 배수되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이는 자연침식에 의해 유실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밖에 서문지의 경우는 위치를 확인할 수 없으나, 성벽의 한 부분을 일종의 암문(暗門)과 같은 통로로 이용하였을 가능성은 있다. 이에 비해 동벽 부분은 성 외벽의 자연 경사가 급하여 북문지와 같은 문지가 있었을 가능성은 없다고 생각된다.

성 내부의 유수를 처리하기 위한 수구지는 확인하지 못하였지만 내성 동벽의 성벽이 20m 정도 끊겨 있는 부분이 성 안쪽으로 움푹 패여 있으며 주변에 석재들이 많이 노출되어 있고, 지형상 현재에도 내성(內城)부분의 자연 배수가 주로 이 곳으로 이루어지고 있어 이곳에 배수구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북문지 동편 성벽내에서 암거(暗渠)가 조사되었는데 층위상 북문지와 동일점에 축조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이 암거의 길이는 4m로서, 그 축조방식은 양쪽편에 0.15~0.25m 내외의 막돌을 놓고 그 위에 0.5~0.6m 정도의 납작한 돌을 올려놓았다. 이는 내부에서 외부로 약 5˚정도의 기울기를 갖고 있으며, 북쪽 일단은 성벽 외부로 노출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 神衿城(李康承·朴淳發·成正鏞, 忠南大學校博物館, 1994년)
  • 홍성 신금성지 제3차 발굴조사 약보고서(충남대학교박물관, 1992. 10.)
  • 홍성 신금성지 제2차 발굴조사 약보고서(충남대학교박물관, 1992. 4.)
  • 神衿城南門址 및 周邊貝殼層精密調査(成周鐸, 忠南大學校百濟硏究所, 198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