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리 성지

화산리 성지

[ 蔚山 華山里 城址 ]

지역 울산

화산리성지는 울산광역시(蔚山廣域市) 울주군(蔚州郡) 온산읍(溫山邑) 화산리(花山里) 산195·196번지에 있는 해발 48m의 야산 정상에 축조된 포곡식성지(包谷式城址)이다. 이 성지는 남쪽과 동쪽이 남해안을 관망하기에 편리한 지형에 입지하여 있다. 성벽은 성내에 좁은 계곡을 포용하면서 산 능선상에 축조되어 있으며, 성의 기저부 폭은 축조 당시 5.2m, 현존 성 높이는 2.5m 정도이며, 전체 둘레는 450m 정도였다.

체성(體城)은 대부분 야산의 산 능선부를 내벽으로 삼고 그 바깥쪽은 폭 5.2m 지점까지를 성폭으로 삼아 판축기법에 의하여 축조하였다. 초축의 토성(土城)은 북쪽에 줄지어 나타난 3.8m 간격의 기둥구멍(柱穴)을 작업구간으로 하여 산토와 점토를 교차하여 판축하되 기단부는 산탁하여 외벽 높이가 내벽과 수평이 될 때까지 계속하였다. 이렇게 내외벽이 일단 수평이 된 뒤부터는 동일 폭으로 협축하였는데 그 높이는 위치에 따라 차이가 있다. 즉 남쪽과 같이 지형이 낮은 지역은 3m 이상의 높이로, 고지인 북쪽 산지는 1.0m 정도의 높이로 작업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1차 보수는 토성이 유실된 후 다시 수축하였는데 이때는 기둥구멍 위에 판석(板石)으로 겉쌓기를 하여 기단부를 보강하고 위에는 기와를 덮어서 토성의 유실을 방지하였다. 그리고 2차 보수는 동벽과 북벽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판석열 외부에 석축을 배치한 단계로, 위치에 따라 약간씩 성 폭에 차이가 생기며 기와편들이 석축 아래에서도 출토되고 있다. 3차 보수는 판석열 위에 막돌로 된 석축들이 놓여지는 단계이며 폭이 좁고 겉쌓기한 내부에 흙과 막돌이 혼입된 시기로, 체성 상단에는 주로 회청색경질의 기와를 덮었다. 이렇게 보수시 내외벽의 석축수법은 위치에 따라 차이가 있는데, 비교적 성 높이가 높은 남쪽이나 같은 체성이라도 외벽쪽은 석재를 많이 사용하고, 낮은 내벽쪽이나 북쪽의 산지에는 석재를 적게 사용하였다. 한편 체성 축조시에 사용된 토량은 먼 곳에서 운반해 온 것이 아니고 대부분 성 내외의 구상유구(溝狀遺構)나 연못터에서 운반하여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 성은 정문인 남문 하나만을 계곡부의 서쪽 끝단에 배치하였다. 남아 있는 초석으로 미루어 남문은 정면 1칸, 측면 2칸의 목조건물로 추정된다. 초석은 기둥 사이의 거리가 정면 3.8m, 측면 각각 1.9m 크기의 정방형(正方形)에 가까우며 주변에 산재한 기와편으로 미루어 보아 건물에 기와를 사용하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초석에 맞물려서 좌우 체성이 연결되어 있으므로 지붕은 맞배형 또는 누층건물일 가능성이 있다. 이 성은 3∼4차에 걸친 보수작업으로 성 폭이 변하였으므로 그 흔적으로 보아서는 거의 마지막 보수단계에 현재의 남문 초석이 놓여진 것으로 추정된다.

그밖의 구조로서는 성 안팎에 축성시 흙을 채취한 구상유구가 해자(垓子)처럼 남아 있다. 그리고 동벽과 북벽 및 남문 동쪽에서 각각 배수시설이 일부 확인되었는데 남문쪽의 것은 인공적으로 고랑을 파고 그 속에 자갈을 채운 형태의 것이나, 동벽과 북벽의 출수구(出水口)는 인공적이라고 할 수 없고 어느 시기에 장기간 물이 고여 있다가 빠져나간 것이 아닌가 한다.

이 성의 최초 축조시기는 6세기 이후 신라시대이며 그 용도는 지리적 환경을 고려해 볼 때 왜구방비가 주목적이었다고 판단된다. 그러나 이 성을 주로 이용한 시기는 성내에서 출토된 유물로 보아 고려시대이며, 조선시대에는 폐성된 것으로 추측된다.

참고문헌

  • 韓國南海沿岸城址의 考古學的 硏究(沈奉謹, 學硏文化社, 1995년)
  • 蔚州華山里城址(沈奉謹, 東亞大學校 博物館, 199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