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지

사지

[ 寺址 ]

황룡사(皇龍寺) 모형

황룡사(皇龍寺) 모형

사지는 사찰(寺刹)이 있었던 장소로, 사찰은 절 또는 사원(寺院), 그리고 가람(伽藍)이라고도 하는데 가람은 범어 Sangharama의 음역인 승가람(僧伽藍)의 준말로 승려가 수도하고 생활하는 장소를 말한다. 인도에서는 B.C. 2세기경부터 아잔타(Ajanta) 석굴 같은 석굴사원이 경영됨에 따라 예배 대상인 불사리를 안치한 탑이 있는 탑원과 승려의 수도처인 승원은 서로 그 장소와 방향을 구별하여 배치되었다. 중국의 가람은 초기에는 남북축선상에 주건물과 탑을 배치한 1탑식 가람이 이루어졌는데, 수·당(隋·唐)시대에 이르러 쌍탑식(雙塔式) 가람이 이루어졌다고 하며, 이것이 한국에도 전해오게 되었다.

즉, 남북축선상(南北軸線上)에 남향하여 중문(中門), 탑(塔), 금당(金堂), 강당(講堂)의 순서로 배열되고, 중문과 강당을 잇는 회랑(廻廊)을 설치하여 불탑과 금당을 중심으로 한 성역(聖域)이 마련되며, 이 성역 주위에 승방을 비롯한 부속건물 등이 다시 배치되어져 이 전체가 하나의 종합적인 사역(寺域)을 구성하고 있다.

감은사(感恩寺) 전경

감은사(感恩寺) 전경

한국에서 가람이 처음 이루어진 것은 고구려에서 이불란사(伊弗蘭寺)와 초문사(肖門寺)가 4세기 후반에 건립된 것인데, 그 위치나 규모 및 특징에 대하여는 현재까지 알려진 바 없다.

한편 1938년과 1939년에 일인(日人)들에 의하여 밝혀진 평양 부근의 금강사지(金剛寺址), 청암리 사지(淸岩里寺址), 상오리 사지(上五里寺址), 원오리 사지(元五里寺址)와 1975년에 조사된 정릉사지(定陵寺址)에 의하면 모두 팔각탑지(八角塔址)를 중심으로 동·서·북의 3곳에 각각 금당지가 있고, 남쪽 전방에는 중문이 설치되며 북쪽 금당 뒤에는 강당이 마련되어 회랑이 중문에서 나와 강당에 닿거나 금당과 강당 사이를 지나는 독특한 배치양식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예는 일본의 奈良 飛鳥寺址에도 나타나 일본으로 전해졌음을 알 수가 있다.

백제에서는 남북축선상에 중문, 탑, 금당, 강당의 순서인 중국 영령사(永寧寺)의 1탑 1금당식(一塔一金堂式)의 계통을 잇고 있다. 즉 부여 정림사지(定林寺址)와 군수리 사지(軍守里寺址) 등이 이에 해당한다. 군수리 사지는 1935년-1936년에 발굴조사되었는데, 중문, 탑, 금당, 강당을 잇는 가람 중심축이 남북자오선상(南北子午線上)에 배치되고 있는 1탑식 중심축형으로 파악되는데, 탑자리에는 정방형(正方形)의 기단이 있고 기단 위에는 전돌(塼石)이 깔려 있었으며, 이 기단 위에서 목탄구가 발견되어 목탑지로 추정되고 있다. 특히 금당의 좌우에 각각 건물지가 있을 뿐만 아니라 강당 뒤쪽 기단 중앙에서 북쪽으로 뻗어 나간 유구가 있어 일부 학자들은 이것을 청암리 사지의 1탑식 3금당의 가람배치로 보는 견해도 있다.

정림사지는 1942년에 1차 발굴조사가 있었으며, 1979년에 전면적인 발굴조사를 하여 절터의 전모가 드러났다. 가람 중심부에 배치된 건물들은 남으로부터 중문, 석탑, 금당, 강당의 순으로 일직선상에 세워졌으며 주위를 회랑으로 둘렀다. 각 건물의 기단은 석조기단(石造基壇)이며 금당의 기단은 상층기단과 하층기단의 구분이 있는 이중기단(二重基壇)으로 밝혀졌다. 석탑의 기단은 정교한 판축기법(版築技法)에 의하여 조성되었다. 또한 1980년에서 1984년에 이르기까지 제3차에 걸친 사찰 전면에 대한 발굴조사에서 추정 남문지와 동·서의 연지(蓮池)가 밝혀졌다.

동남리 사지(東南里寺址)는 1938년의 발굴조사에서 중앙기단, 북쪽기단, 중간터 및 회랑터가 확인되었으며, 남문터와 북쪽기단 좌우에 있는 방형기단도 이때 발굴되었다. 이 절터는 중문, 금당, 강당은 일직선상에 배치하고 있으나 탑이 없는 특수한 예이다. 부소산성 내에 위치하고 있는 서복사지는 1942년과 1980년에 발굴조사 되었으며 중문, 목탑, 금당, 회랑이 남북 일직선상에 배치되었으며, 강당이 없는 특수 가람임이 확인되었는데, 백제의 왕실이나 귀족층의 원당격인 절터로 가장 유력시되고 있다.

금강사지(金剛寺址)는 1964년과 1966년에 발굴조사가 이루어졌으며, 전형적인 1탑 1금당식의 가람배치로 확인되었는데, 중문, 탑, 금당, 강당 및 승방이 동서축을 이루면서 동향(東向)하여 배치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백제 가람 중에서 공주지방에 있는 서혈사지(西穴寺址)나 남혈사지(南穴寺址)는 석굴사원(石窟寺院)의 형태인데, 서산 마애삼존불(磨崖三尊佛)이나 태안 마애삼존불도 이 석굴사원의 한 형태로서 퇴화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미륵사지(彌勒寺址)는 1980년부터 발굴조사가 진행되고 있는데, 가람의 형태는 백제의 전형적인 1탑식 가람을 확장시켜 동서축(東西軸)에 3구(區)의 1탑식 가람을 병렬시킨 듯한 배치를 보이고 있다. 다만 강당지가 중앙 후면에 하나만 두고 또 주위의 회랑은 이들 세 가람을 기능적으로 연결시키는 배치를 하고 있음이 다른 1탑식 가람과 다른 점이라 하겠다.

특히 동·서원(東·西院)에는 석탑을 각각 하나씩 두고 중원(中院)에는 목탑을 건립한 특수한 가람의 형태를 띠고 있다. 최근에 발굴조사된 능산리 사지(陵山里寺址)는 나성과 능산리 고분군 사이의 협소한 계곡 내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가람은 중문, 목탑, 금당, 강당이 남북축선상에 배치된 1탑 1금당식의 가람배치를 하고 있으며, 목탑지 심초석 위에서 발견된 ‘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으로 보아 왕실에서 발원한 기원사찰(祈願寺刹) 또는 능사(陵寺)로 추정된다. 백제의 1탑 1금당식 가람배치는 신라 황룡사지(皇龍寺址)와 일본의 사천왕사(四天王寺)로 전해지고 있다.

황룡사지(皇龍寺址)는 1976년부터 1983년까지 8년간에 걸쳐 학술발굴조사를 실시하여 전모가 밝혀지게 되었다. 황룡사의 초기 가람은 백제의 1탑식 가람배치를 따른 것인데, 동·서구(東·西區)에 다시 금당을 각 1개씩 나란히 놓아 3금당 1탑식을 이루고 외곽의 동·서·북에 긴 승방지로 구획을 두어 중심곽을 이루었다. 그 후 제2·3차의 가람이 이루어지면서 목탑지 남쪽 전방의 좌우에 종루와 경루로 보이는 건물지가 세워졌고, 또 회랑은 복랑으로 되었는데 강당 및 중문의 좌우에서 나온 회랑은 금당 좌우의 회랑과 서로 만나지 않고 그냥 동서로 뻗어져 있다. 그리고 강당 뒤쪽에 북쪽으로 나아간 유구가 보이고 있어 그 뒤쪽에 승방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그러나 황룡사 중건(重建) 가람의 배치형식은 고구려의 가람배치형식을 신라의 개성에 따라 변형한 신라식의 1탑 3금당식의 가람배치로 보기도 한다.

통일신라시대에 들어오면 금당 앞의 1탑이 동서의 쌍탑으로 바뀌어 쌍탑 1금당식이 되는데 쌍목탑지로 추정되는 사천왕사지(四天王寺址)를 시원으로 하여 9세기까지 유행하게 되었다. 통일신라 초기에 창건된 감은사지(感恩寺址)는 1959년에 발굴조사되었는데, 중문, 동·서 쌍탑, 금당, 강당이 서남향하여 배치되어 있는데, 회랑으로 구획된 가람 중추부의 전체 형태는 남북 길이보다 동서의 너비가 더 넓게 조영되었다. 금당은 2층 기단으로 4면마다 석계(石階)를 하나씩 배치하고 있다. 기단 상면에 석재유구로 구획하였고 그 아래 부분을 빈 공간으로 두고 있는데, 이것은 문헌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용(龍)이 선요(旋繞)할 수 있도록 준비한 것과 통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금당의 양 측면에는 중회랑이 연결되어 경내가 남북으로 똑같이 양분되어 있다.

발해시대의 가람으로 현재까지 확인된 것은 40여 개소에 이르고 있으나, 정확한 배치상태에 대해서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한편, 통일신라에도 고선사지(高仙寺址)를 비롯한 몇 개소의 사원에서 1탑식의 양식이 이어지고 있는데, 고선사지의 경우 1탑식이기는 하나 협소한 지리적인 여건 탓인지 중문 다음에 바로 금당과 강당이 순서대로 배치되고, 이들을 회랑이 감싸고 있다. 탑은 금당과 중문 사이에 해당하는 서쪽 회랑을 넘어서 독립된 회랑을 갖추고 있는 특징을 보여준다. 그리고 탑원(塔院)과 금당원(金堂院)이 만나는 쪽에만 두 회랑이 겹쳐져 복랑이 되고 있으며, 이러한 예는 일본의 국분사(國分寺)로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9세기 이후에 들어서면 선종의 영향으로 산문으로 사찰이 옮겨짐에 다라 경영문제나 지세의 제약 등에 의해서 회랑이 없어지기도 하고 엄격한 가람배치의 규칙이 점점 무너지기도 한다. 그 후 고려와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평지가람이든 산지가람이든 모두 1탑식 가람배치가 되고 있다. 그러나 고려시대의 가람으로 남원 만복사지(萬福寺址)는 중문, 탑, 금당순서의 배치에다 탑의 서쪽에 또 하나의 금당이 있어 서전동탑(西殿東塔)식의 특수한 양식으로 판명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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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송기호, 한국사 10-발해, 1996년)
  • 中國古代建築史(劉敦楨著, 鄭沃根外譯, 1995년)
  • 고고학방면으로부터 본 발해의 불교문화(박용연, 발해사연구 제4집, 1994년)
  • 百濟寺刹建築(張慶浩, 1991년)
  • 百濟 伽藍址의 硏究(朴萬植·李達勳, 百濟史의 理解, 1991년)
  • 中國建築槪說(中國建築史編輯委員會, 梁金石譯, 1990년)
  • 조선건축사(1)(리화선,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1989년)
  • 彌勒寺遺蹟發掘報告書Ⅰ(文化財管理局 文化財硏究所, 1987년)
  • 扶餘定林寺址蓮池遺蹟發掘報告書(尹武炳, 1987년)
  • 新羅皇龍寺伽藍에 관한 硏究(趙由典, 1987년)
  • 伽藍配置(姜舜馨, 韓國考古學美術史要解, 1985년)
  • 皇龍寺遺蹟發掘調査報告書(文化財管理局 文化財硏究所, 1884년)
  • 寺院建築(金正基, 歷史都市 慶州, 1984), 韓國建築史(尹張燮, 1979년)
  • 高仙寺址發掘調査報告書(文化財管理局, 1977년)
  • 金剛寺(尹武炳, 國立博物館古蹟調査報告 第7柵, 1969년)
  • 感恩寺址發掘調査報告書(金載元․尹武炳, 國立博物館特別調査報告 第2柵, 196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