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륵사지

미륵사지

[ 益山 彌勒寺址 ]

지역 익산

미륵사지(彌勒寺址)는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에 위치하는 백제시대 최대의 사찰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백제 무왕(600-641)이 왕비의 청을 받아들여 축조한 절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미륵사지에 대한 조사는 1974-75년도에 동탑지를 시작으로 하여, 본격적인 조사는 1980년도에 착수하고 1996년에 이르기까지 17여 년간 계속되었다. 발굴결과 미륵사지는 초창기의 사찰은 백제시대에 완성되었으나 현재의 가람배치는 통일신라시대에 완성된 것으로 판명되었다.

가람배치

가람배치

미륵사지에서 조사된 대표적인 유구로는 금당지, 탑, 회랑지, 강당지, 승방지, 수로, 연못지 등이 있다. 금당지(金堂址)는 각 탑의 북편에 1동씩 터를 잡고 있었다. 중원은 중금당지, 동원 및 서원은 각 동금당지, 서금당지라는 명칭을 부여하였다. 중금당지는 규모가 정면(동서) 26.2m, 측면(남북) 20.6m로 163평에 이른다. 초석의 칸은 정면 5칸, 측면 4칸이다. 동·서 금당지는 대칭으로 놓여 있으며 규모나 모든 구조에서 동일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 규모는 정면 18.5m, 측면 15m로 84평이다. 초석 칸 수는 정면 5칸, 측면 4칸이다.

금당지의 구조는 기본적으로 중·동·서금당지가 동일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기단은 하층 및 상층기단으로 이루어진 이른바 2중 기단으로 구축되었다. 건물지 내부는 초반석이라 부르는 지름 1.05m 내외의 정방형의 편평한 석재를 놓고, 그 위에 덤벙초석이라 부르는 높은 초석을 놓았다. 초석과 초반석은 방향을 서로 일치시키지 않고 다른 방향으로 놓았는데, 이는 건물지 하중을 분산시키기 위한 배려로 이해된다. 중금당은 지하에서 적어도 2.5m 이상 되는 호박돌과 점질토를 섞어 층층이 다져 올려 기초부를 조성한 후 초석을 놓았던 것으로 조사되었다.

미륵사지의 탑 중 발굴 당시 지표상에 남아 있던 것은 국보 11호인 서탑 뿐이었다. 서탑은 현재 6층이 남아 있으나 서탑과 동탑지 주변에 무너져 내린 탑재석을 연구 검토한 결과 처음에는 9층으로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서탑은 양식상 백제 석탑의 시원양식으로 불려지는데, 이는 목탑을 석탑으로 번안한 형태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탑의 기단너비는 한 변이 12.5m 내외이며, 현존 6층 높이는 12.945m이다.

미륵사지 석탑. 높이 14.24 cm

미륵사지 석탑. 높이 14.24 cm

동탑은 발굴 당시 탑 지하부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다. 이 주변은 연못지를 두께 2.5m를 매운 후, 다시 탑을 조성할 부분은 탑의 너비보다 약 0.4-1.1m 정도 넓게 되파기를 하였다. 이 되파기를 한 부분은 큰 머리돌과 왕모래 및 자갈 등을 차례로 교차하면서 26단의 다짐층을 성토한 후, 그 위에 초반석과 초석을 차례로 놓고 탑을 올린 것이다. 또 주변조사 및 무너져 내린 석재조사에서 서탑과 같은 규모와 층수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구조상 서탑과 다른 점은 서탑의 경우 우석(隅石)과 면석(面石)이 모두 서로 다른 별석(別石)으로 구성되었으나, 동탑은 우석과 면석이 같은 돌로 만들어진 석재가 확인되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전체 층수와 높이 규모에서 동일하고, 발굴 당시 9층 옥개석(屋蓋石) 위의 노반석(露盤石)과 이 노반석을 덮는 덮개석이 발견됨으로서 그 면모를 알 수 있게 되었다.

중앙의 탑은 목탑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목탑지의 대부분은 파괴되었으나, 서편 일부와 북편은 기단 및 계단시설이 잘 남아 있었다. 목탑지의 북편은 기단외부에 구지표층이 남아 있었다. 목탑의 처마선 밑에는 목탑이 불에 타면서 그대로 무너져 내린 암막새 및 수막새가 세트를 이루면서 드러났다. 목탑지의 하부구조는 판축공법이라는 특수한 다짐에 의하여 형성되어 있었다. 이 판축은 백제시대 건물 하부나 토성을 쌓는데 필수적인 방법으로 조사되고 있다. 이 판축은 일반적으로 생토나 매운 흙을 되파기한 후, 점질토와 석비레를 두께 2-3㎝ 내외로 교대해가면서 층층이 다지는 기법이다.

회랑지는 백제시대에 중원과 동서원을 에워싼 이외에 동서 승방지에서 강당지까지 이르는 구간에 접랑(接廊)으로 잇고 있다. 통일신라에 들어와 당간을 둘러싼 남회랑과 동서회랑지는 ‘┗┛’형태로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다. 백제 회랑지는 동서 2칸인 복랑(複廊)이며, 통일신라 회랑지는 동서 1칸인 단랑(單廊)이다.

강당지는 지금까지 발굴조사한 사원 중 가장 큰 규모이다. 정면 13칸, 측면 4칸이며 내부는 통칸으로 큰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이러한 구조는 강당기능을 충실하게 따른 것이다. 강당지의 중앙은 초석을 좌우로 2기를 배치하고 있는데 이는 통로를 두었던 듯하다. 강당지 남측기단에는 중앙과 동서 양측에 대칭의 계단을 두고 있는데 계단의 너비는 5.1m에 이르며 세 계단지의 너비는 동일하고 각 5단을 설치하였다.

승방지는 중심부 좌우측인 동·서 회랑지 북편에 이어져 있다. 이 승방지는 동서너비 14m, 남북길이 65.2m로 각 276평에 이른다. 이외에 강당지 북편에는 낮은 공터가 동서로 길게 형성되어 있고 이 공터의 북단은 석축이 1.2m 내외로 구축되었다. 이 석축과 접하여 동서로는 긴 배수로를 두어 서편으로 물을 유도하고 있다. 석축 바로 북편에는 133m 내외의 백제 승방지 기능을 했을 것으로 보이는 단일 건물지가 조사되었다. 동서 회랑지에 접한 두 승방지는 각 변 4m의 정방형 방을 8개씩 배치하고 있다. 특히 동승방지에서는 대형 토기호(土器壺), 중형토기호(中形土器壺)에서 곡식(穀食)이 일부 잔존한 상태로 있거나, 기단토(基壇土)에서 탄화미(炭化米)가 1되 이상 출토되기도 하였다. 또 이곳에서는 중국 당(中國 唐 : 9세기경)의 정요계(定窯系)의 백자완(白瓷완) 편이 많이 출토되었고, 바로 위층에서는 10세기경의 ‘관(官)’명 중국백자, 앵아문 백자잔편(鸚鵡文 白瓷盞片) 등이 출토되어 이 건물지의 성격을 잘 알려준다.

수로는 미륵산에서 흘러내리는 토사를 해결하기 위하여 미륵사지의 동서 양단(兩端)의 능선 기슭과 접한 곳에는 지형을 따라 암반을 넓고 길게 파서 만들었다. 동편의 수로는 남측으로 가면서 깊고 넓어져 깊이 3.5m에 이르며, 너비는 12m나 되었다. 서편 수로 역시 산 아래 자락 암반을 깊이 2.5m 이상 파서 수로를 마련하고 있다. 이러한 대수로는 중심부의 초기 건물지 내부에 고인 물을 암거시설 등을 통하여 이곳으로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연못지는 통일신라 회랑지를 기준으로 그 남쪽에 자리 잡고 있다. 회랑지 정면 앞쪽은 동서 연못지 중앙에 해당한다. 이 중앙에는 너비 50m의 사찰 진입로가 마련되었는데, 남북향의 이 직선 도로는 1m 정도 확인되었다. 연못지는 중앙에 진입로를 사이에 두고 동서 양편에 축조되었다. 동 연못지는 정방형에 가까우며 너비는 50m 내외이며, 서 연못지는 동서 60m, 남북 40m 내외의 직사각형이다. 이들 연못지의 특징은 가장자리에 지름 0.3m가 넘는 왕버들 그루터기가 남아있어, 연못의 가장자리를 따라 왕버들을 심었던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연못지의 둑은 석재를 사용하지 않고 검은 찰흙과 모래 섞인 점토질을 다지거나 적당히 배치하여 호안으로 이용하였다. 연못지는 통일신라에 들어와 완성되었으며 통일신라 말경에는 기능이 상실되면서 늦어도 고려 초기에는 발굴 전 당시의 경작지 높이로 메워졌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미륵사지에서 출토된 대표적인 유물로는 기와류, 토기, 자기, 석재, 목재, 금속 등이 있으며, 기능에 따른 분류는 사찰 건물지용부터, 생활용품, 불상, 무기류 등 매우 다양하다. 시기는 초창기인 백제 말경부터 조선시대 중기까지이다.

기와류는 백제 수막새, 인장와(印章瓦), 통일신라와 고려 및 조선시대의 수·암막새, 명문와가 있다. 특히 미륵사지에서는 녹유연목와(綠油椽木瓦)가 특징적이며, 기와에 도장을 찍어 글자를 남긴 인장와가 많이 출토되었다. 이 인장와는 당시 백제 행정 지역 단위인 5부를 나타낸 것, 정사(丁巳)와 같이 간지를 나타낸 것 등 다양하지만 아직 무슨 의미를 나타내는지 확인할 수 없는 사례가 많다.

토기는 백제부터 통일신라, 고려, 조선시대의 질그릇까지 출토되었으며, 자기는 중국 당의 월주요계 청자, 정요계 백자완으로부터 송 이후의 북방계 자기, 원의 청화백자편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고려자기는 “태평흥국5년경진유월일(太平興國五年庚辰六月日)”(980년) 명문기와가 확인되는 가장 빠른 반출유물에 속한다.

고려청자는 초기의 해무리굽 등 순청자, 음양각접시, 상감청자, 분청사기 및 조선의 백자 등 다양하다. 백자 중에는 조선시대 법당지에서 백자연봉이 출토되기도 하였다.

동금당지와 중금당지에서는 소상(塑像)편들이 많이 출토되어, 백제부터 통일신라에 이르기까지 미륵사지 주불상은 소조로 빚었을 가능성이 높다. 서금당지 내부에서는 소조불상의 나발이 출토되었다. 금속류 불상은 금동제교각판불, 소형의 금동제여래입상이 출토되었을 뿐 불상은 미미한 출토량을 보였다.

미륵사지는 건물지 및 출토유물로 종합하면 백제 말경에 처음 지어졌고, 통일신라,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법등이 끊어진 것으로 조사되었다.

참고문헌

  • 彌勒寺Ⅱ(國立扶餘文化財硏究所, 1996년)
  • 彌勒寺Ⅰ(國立文化財硏究所, 1988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