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와

기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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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옥의 지붕을 덮는 옥개용(屋蓋用)의 건축부재를 말한다. 양질의 점토를 재료로 모골(模骨) 및 와범(瓦範) 등의 제작틀을 사용하여 일정한 모양으로 만든 다음, 가마에서 높은 온도로 구워서 제작한다. 원래 목조건물의 지붕에는 이엉이나 볏짚, 그리고 나무껍질 같은 식물성 부재를 사용하였는데 내구력이 약하여 자주 교체해야 하기 때문에 방수효과나 강도가 높은 반영구적인 점토소성품(粘土燒成品)인 기와가 출현하게 되었다.

목조건물에 기와를 사용하여 지붕을 이는 풍습은 고대 동양건축의 주요한 특징의 하나이지만, 그 기원에 대해서는 아직 규명되지 않고 있다. 중국의 문헌인 고사고(古史考)에 “하나라 때 곤오씨가 기와를 만들었다(夏時昆吾氏作瓦)”고 기록하고 있다. 기와의 발견 예는 주말(周末) 연(燕)의 하도(下都)인 역현(易縣) 또는 제(齊)의 국도인 임치(臨淄) 등의 출토품이 있다. 한대(漢代)가 되면 궁원, 관아, 능묘, 사당은 물론 일반 가옥에까지 원형의 수막새기와가 널리 사용되며, 남북조(南北朝)시대가 되면 문자와 함께 주연(周緣)에는 문양이 없고 높으며, 연판은 중앙의 자방(子房)을 중심으로 만개한 형태의 연판문(蓮瓣文)이 등장하며 녹유(綠釉)를 입힌 와당이 출현한다. 이러한 흐름은 당대(唐代)가 되어도 계속되며, 당대 이후에는 수막새 주연에 연주문(聯珠文)이 첨가되고 암막새에도 문양을 조각하였다. 송대(宋代) 이후에는 유리와(琉璃瓦)를 사용하였으며, 명대(明代)에서는 암막새기와의 하단이 중앙으로 갈수록 처지고 궁궐의 수막새에는 황유(黃釉)의 용문(龍文)이 시문되었다.

한국에 기와가 언제부터 사용되었고 와당이 언제부터 나타났는지는 정확히 밝힐 수 없으나 한국에 기와가 들어온 시기는 한사군(漢四郡) 설치 전후로 추정된다. 그러나 한국적인 자연환경과 인문환경의 조건에 맞게 구조가 변형되어, 이른바 한국적인 양식으로 발전을 보게 된 것은 3세기말 이후로 생각할 수 있다. 즉, 삼국시대 건물자리에서 비로소 와당이 발견되고 있는데 고구려의 장군총, 신라의 황룡사지, 백제의 미륵사지 등에서는 각 국의 특징이 있는 와당이 발견되고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궁궐 및 사찰의 건축 조영을 담당하는 관서(官署)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백제에는 나라에서 쓰는 기와만을 전담하는 와박사(瓦博士)의 직제(職制)가 있었고, 백제 위덕왕 35년(588)에는 일본에 와박사를 파견할 정도로 발전되었다. 신라에는 특별히 와당만을 제조하는 와기전(瓦器典)이란 마을이 있었으며, 중국 문헌인 『신당서(新唐書)』의 고구려전(高句麗傳)에는「高句麗唯王室及府佛-瓦」라 하여 “고구려는 왕실과 관부 또는 불사(佛寺)에 기와를 사용하였다” 라는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기와는 지붕에 씌워 눈과 빗물의 침수를 차단하고 이를 흘러내리게 하여 지붕 재목의 부식을 방지함과 동시에 건물의 경관과 치장을 위하여 사용된다. 기와 지붕은 기본적으로 용마루, 내림마루, 추녀마루, 그리고 처마로 구성되어 있다. 지붕은 먼저 수키와(圓瓦, 夫瓦)와 암키와(平瓦, 女瓦)로 이어 덮게 되는데, 대부분의 수키와와 암키와는 원통형의 목제 모골의 외측에 마포나 무명 등의 포목을 감고 양질의 진흙을 다진 점토판(粘土板)을 씌워 고판(叩板)으로 두들겨 얼마 동안의 건조기간을 거친 다음에 와도(瓦刀)로 2분하거나 3분 또는 4분하여 제작한다. 형태에 따라 기와의 끝에 언강이라고 부르는 낮은 단(段)이 있어서 미구를 내밀고 있는 유단식(有段式)과, 언강과 미구가 없는 토시형의 무단식(無段式)으로 구분되고 있는데, 대부분 그 표면에 선(線)·승석(繩蓆)·격자(格子)·화엽(花葉) 등의 고판무늬가 장식되고 있다.

이렇게 이어진 기와는 처마 끝에 와서 각기 끝막음을 하게 되는데, 막새(瓦當)는 지붕의 추녀 끝에 사용되는 대표적인 기와로 수키와 끝에 원형의 드림새를 부착한 수막새(圓瓦當)와 암키와 끝에 장방형의 드림새를 부착한 암막새(平瓦當)로 구분되고 있다. 암·수막새는 여러 가지 무늬가 음각된 목제 또는 도제(陶製)의 와범에서 찍어 낸 것으로, 연꽃, 당초(唐草), 보상화(寶相華), 귀면(鬼面), 금수(禽獸) 등의 다양한 무늬가 드림새에 새겨져 각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채로운 변화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일반형의 기와 이외에 용마루의 양쪽 끝에 높게 장식된 치미(鴟尾), 각 마루 끝에 벽사(邪)의 의미로 사용되는 귀면기와(鬼面瓦), 그리고 각 마루를 쌓아 올리는 적재기와(堤瓦), 마루 밑의 기왓골을 막는 착고기와(着固瓦), 서까래의 부식을 방지하고 이의 치장을 위한 서까래기와(椽木瓦), 각 마루의 추녀 밑의 네모난 서까래에 사용되는 사래기와 등이 있다. 또한 암막새 2매를 접합하여 제작한 모서리기와(隅瓦), 지붕의 처마가 ‘ㄱ’자 모양으로 꺾인 회첨에 사용되는 타원수막새(楕圓瓦當)와 이와 조합되는 특수한 암막새, 귀면기와의 상단에 얹혀져 건물의 곡선미를 강조시켜주는 굽은 형태의 특수기와, 건물내부의 닫집이나 조그만 건물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소형막새, 그리고 1매의 암키와를 대각선 방향으로 2분시키거나 종횡으로 여러 번 분할하여 제작한 왕지기와(三角平瓦)와 사변형의 방형기와(方形瓦)가 있고, 장식용으로 사용된 특이한 형태의 녹유기와(綠釉瓦) 등이 있다.

이와 같이 다양한 기와의 종류 가운데 일반화된 암·수키와와 막새를 제외한 대부분의 장식기와·특수기와들은 방수성이나 내구성을 지닌 본래의 기능 외에 기와집의 경관과 치장을 돋보이게 하려는 새로운 건축의장의 발달에서 생겨난 것으로 볼 수가 있다. 특히, 고대의 목조건축에서 용마루의 양끝에 높게 부착하던 대형의 장식기와인 치미(鴟尾)는 용마루에 얹혀질 수 있도록 하단부의 중앙에 적새(積瓦)와 연결할 수 있는 반원형, 또는 방형의 홈이 가로로 파여 있어 고정시킬 수 있게 되어 있다. 측면은 몸통과 깃 부분을 구획하는 굵은 돌대가 설정되어, 그 내측에는 침선(沈線)이나 꽃무늬를 배치하고 외측에는 봉황의 날개깃과 같은 단열(段列)이 층을 이루면서 호형(弧形)으로 길게 뻗어 있다.

앞면은 굴곡된 능골이 반전되고 있으며 뒷면은 무늬가 전혀 없는 공백상태이거나 연꽃무늬 등이 새겨져 있는 경우가 일반적인 형태이다. 치미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으나 길상(吉祥)과 벽사(邪)의 상징으로서 의장(意匠)된 상상의 새인 봉황에서 비롯하였다고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중국 한나라 때는 반우(反羽), 진나라 때는 치미(鴟尾), 당나라 때는 치문(鴟吻), 통일신라 때는 누미(樓尾) 등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불리어왔다.

기와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뚜렷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고구려의 기와 문양은 그 구성 형식으로 볼 때 전체적으로 한계(漢系)인 낙랑시대 와당의 영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수막새 기와의 주문양(主文樣)은 연화문 형식으로 구성된 것이 대부분이며, 그 외에 인동문, 초문(草文), 차륜상문(車輪狀文) 등이 부조·장식되었다. 이러한 와당 문양은 고구려 미술 전반에 나타나는 특징이라 말할 수 있는데, 간결하며 강건하고, 도식적이며 도안화된 기하학적인 화문 형식이 다른 두 나라에 비해서 독특한 양상을 보인다. 고구려 와당 중에는 백제·신라 와당의 유형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반원형(半圓形) 수막새와 와당이 있는데, 중국 고식(古式)의 훼룡문계(虺龍文系) 당초 형식과 초문, 와문(渦文), 그리고 특수한 예로서 두꺼비 문양 등이 나타나고 있어서 주목된다. 연화문계 와당은 삼국이 다 같이 공통적으로 주류를 이루고 있지만, 고구려 와당에서는 독특한 내구(內區)의 분할과 연판의 표현으로서 강건한 느낌을 준다.

백제 문화는 초기의 한성시대(漢城時代)와 후기의 웅진성시대(熊津城時代, 公州), 사비성시대(泗城時代, 扶餘)로 이전하면서 여러 분야에서 커다란 변화를 보였다. 따라서 백제 미술의 초기에는 약간의 한대계(漢代系)의 요소를 비롯하여 고구려적인 성격도 보이지만, 한성고지(漢城故地)에서는 북위적(北魏的) 영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후 백제가 남천(南遷)한 이후에는 해상 교통을 통한 남조계(南朝系) 문화의 수용으로 말미암아 세련된 미술의 바탕 위에 불교 문화의 꽃을 피울 수 있었다.

백제 와당의 문양에서 연화문계(蓮花文系)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것은 역시 불교 문화의 성격을 말하여 주는 것이다. 연화문 와당은 8엽으로 이루어진 것이 일반적인 특징이라 하겠으며, 판내에는 무늬가 장식되지 않은 이른바 소판(素瓣) 연화 형식으로서 자방을 중심으로 해서 방사상(放射狀)으로 구성한 것이 기본 형식이다. 그밖에 백제 기와의 특징적 형식인 파상와(巴狀瓦)를 비롯하여, 주연을 돌출시켜 오목한 내구(內區)를 형성하고 아무런 장식이 없는 소문원와(素文圓瓦)가 있다. 연화문 와당에 있어서도 종래에는 8엽 연화문 와당이 통식을 이루던 것이 4엽, 6엽, 7엽, 9엽 등이 나타나고, 판내(瓣內)에도 꽃술 모양의 초문(草文) 형식이 가식되어 양상이 많이 달라진다.

신라의 기와 무늬는 연화문계, 당초문계, 금수문계(禽獸文系), 비천문계(飛天文系)로 크게 구분하여 볼 수 있다. 암막새, 즉 평와당(平瓦當)에서는 당초문계 와당과 금수문 와당, 비천문, 운문의 4가지 유형을 볼 수 있으며, 수막새, 즉 원와(圓瓦) 또는 타원와당(楕圓瓦當)에는 연화문계 와당과 금수문계 와당의 2가지 유형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암막새는 당초문계 문양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그 종류는 인동 당초문, 포도 당초문(葡萄唐草文), 보상 당초문이 있고, 이 외에 화엽문류(花葉文類)로 구분된다. 수금문계 문양으로는 대개 쌍봉문(雙鳳文), 쌍앵문(雙鸚文), 소금문(小禽文), 쌍아문(雙鵝文) 등이 있고, 쌍룡문(雙龍文), 쌍린문(雙麟文) 등은 영수류(靈獸類)를 대칭 형식으로 구성한 것이며, 또 비천보운문와당(飛天寶雲文瓦當)의 경우도 대개 대칭 형식을 보이고 있다.

고려는 통일 신라의 문화적 요소를 계승하여 불교가 성행하여 개성(開城)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 많은 가람(伽藍)이 조영되었다. 발견된 기와의 종류에는 암·수막새와 치미(鴟尾)가 있고, 문양전도 다수 발견되었다. 또한 평양 부근의 고려 유적인 대화궁(大花宮)과 주궁(珠宮)에서도 기와 파편이 다수 발견되어, 고려시대의 건축 미술 양식과 성격을 짐작할 수 있다. 고려 중기에는 원(元)나라의 간섭을 받아 문화의 양상도 많이 달라지는데, 기와에 있어서도 원나라식의 수막새가 나타나고 있다. 수막새에는 그 유형이 10여 가지가 되며, 또한 문양도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고려 초기에는 신라·백제의 양식과 고구려적인 단순한 도안이 함께 나타난다.

이른바 눈박이 문양의 기와는 사목문(蛇目文) 또는 일훈문(日暈文)이라 불리는 것인데 쌍눈박이와 외눈박이 기와가 있다. 그 형태는 신라 와당에서도 보이지만, 고구려와 백제 와당에서도 유사성을 찾아볼 수 있다. 연화문은 고려 와당에서도 주류를 이루는데, 대개 8엽으로 이루어져 중앙에 자방이 구성되어 연자가 들어 있는 것이나 또는 자방 주위에 화예(花예)가 둘려져 있는 것 등 통일신라시대 와당 양식의 여운이 짙다. 이 연화문은 차츰 변화되어 가면서 간략한 양식을 나타내고 판단이 뾰족해진다.

조선시대의 성곽, 궁궐, 객사, 묘사(廟祠), 불교, 사원, 주택 등은 대체로 고려시대의 양식을 계승하고, 그 구성면이나 장식면에서만 약간의 변화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불교를 억제하고 유교를 숭상하던 터라 유교의 검소 질박한 기풍의 장려는 건축에까지 그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조선시대에는 종6품(從六品) 아문(衙門)에 해당하는 와서(瓦署)를 두었다. 공전(工典)의 잡령(雜令) 조목에는, “기와를 법의 규정대로 하지 않고 조제남조(粗製濫造)하여 품질을 열악(劣惡)하게 한 자는 엄중 처벌한다-단, 사영(私營)의 와요(瓦窯)이면 처벌한 뒤 그 기와는 관에서 몰수하고 삭목(木型)은 전낙(篆烙)을 찍어 표를 하여 놓는다-” 라는 법령이 있는 것을 보아 당시의 문란하였던 건축제도를 규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초기의 기와는 후기보다는 훨씬 양질의 것이 생산되었다 하나 그 조만(租漫)하고 형식적인 문양 처리 등을 보면, 고려시대의 것에 미치지 못한다. 와당의 문양으로는 수막새에는 연화문, 귀면문, 범자문, 봉황문 등, 대체로 고려적인 요소가 계승되지만, 솜씨가 옛것에 미치지 못하며, 암막새의 경우에는 당초문, 초화문(草化文), 반룡문(蟠龍文) 등을 사용하였다. 또한 궁전이나 성문의 옥개(屋蓋)에는 중국풍의 용마루 양단(兩端)에 취두(鷲頭), 즉 망새라 불리는 기와를 두었으며 내림마루에는 잡상(雜像) 등을 두었으나, 대체로 그 수법이 면밀하지 못하다. 궁전에는 푸른빛을 내는 청기와(淸氣瓦)의 일종인 벽료와(碧料瓦)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막새의 문양은 연화문이 후퇴한 뒤로는 민간도안이 속출하는 등 조잡하여졌고, 암막새는 첨형(尖形)의 반월형(半月形) 또는 다릉반월형(多菱半月形)으로 통일된 것이 하나의 특색이라 할 수 있다. 그 문양으로는 용, 봉황, 약화된 귀면문, 당초문, 초화문 등의 여러 가지가 있으며, 그 문양의 성격이 철사자기(鐵砂磁器) 등에 나타나는 괴이한 추상적 문양과 상통하는 점을 느낄 수 있다. 또한 이러한 문양 와당 이외에 연대(年代)와 건축물명(建築物名)등이 양각된 유명와(有銘瓦)와 범자와(梵字瓦)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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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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