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와 문양

기와 문양

[ 瓦 文樣 ]

기와문양은 2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지붕에 얹는 가장 기본적인 암·수키와의 등에 시문된 것과, 처마에 올려지는 암·수막새의 드림새에 나타난 문양이다. 우선 삼국의 암·수키와에 시문된 문양 중 승문(繩文), 격자문(格子文), 선문(線文)은 삼국의 공통문양이다. 평기와 문양은 타날구(打捺具)가 따로 마련되는데, 삼국시대에는 손잡이 있는 약간 장방형(長方形)의 4∼7㎝ 내외의 작은 것이 사용되었던 것으로 조사되었다. 다만 승문은 짧은 것과 긴 것의 변화가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통일신라이후에는 긴 장방형의 나무에 문양을 넣어 사용하게 된다.

고구려는 위의 세 문양 이외에 능형문(菱形文), 거치문(鋸齒文), 석문(蓆文), 어골문(樹木文, 魚骨文)이 더 등장하는데, 이는 중국과 접하면서 직접적인 영향과 함께 더욱 다양하게 발전시킨 것으로 보인다. 능형문은 사격자문(斜格子文)과 유사하지만 겹무늬이거나 문양 내에 또 다른 작은 마름모문, 반호문(半弧文) 등 여러 가지 유형이 나타난다. 삼국에서 통일신라 중기 경까지는 기와에 드러난 문양이 기와의 제작과정 중 밀도를 위한 충분한 두들김 기능에 큰 비중을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점토대 소지(粘土帶 素地)의 경우 충분한 두들김 작업이 수반되지 않으면 기와성형에 문제가 큰 것으로 해석된다. 이 점은 백제 한성도읍기(漢城都邑期) 평기와에서 확인된 경우 예외 없이 점토대 소지가 사용되었던 점을 반영하고 있다.

통일신라에 들어와 9세기 경에 어골문이 등장하는데, 이 시기에는 기존의 문양과 서로 혼용문(混用文)이 함께 사용되는 사례가 많아진다. 통일신라 말 경에 이르면 기존의 문양과 함께 어골문의 등장, 어골문과 다른 문양과의 혼용문이 함께 사용되면서 100여 종 이상으로 다양해진다. 고려에 오면 어골문과 혼용문이 주류를 이루면서 200여 종 이상으로 복잡한 문양이 확인되는데, 이는 문양이 본 기능뿐만 아니라 보다 도식화(圖式化)된 결과로 여겨진다. 조선시대에는 수파문(水波文, 靑海波文)을 중심으로 어골문의 잔재가 아직 남아 있으며, 짧은 단선과 곡선 등 이전의 문양을 응용한 변화가 일어난다.

막새 문양은 평기와와 함께 중국의 한·낙랑(漢·樂浪)에서 도입되었던 것으로 보고 있는데, 문양 역시 중국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4세기 경의 고구려 수막새는 운문(雲文, 怪雲文, 蕨文, 蕨手文)을 주로 채용하고 있으며, 점차 연화문(蓮花文)이 주류를 이루면서 5세기 이후 괴면문(鬼面文), 보상화문(寶相華文) 등이 등장한다. 고구려 연화문은 볼륨이 높고 날카로우면서 강건한 느낌을 주는데, 백제 및 신라, 일본에까지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백제 한성도읍기에는 고구려의 일부 문양과 아직 도식화되지 않은 소박한 초화문(草花文)과 수목문(樹木文) 형태에 작은 형태의 ‘ ’, ‘  ’ 와 같은 문양을 도입하고 있는데, 고구려와 상통하는 점이 관찰된다.

백제 사비기(泗批期) 이후에도 일부 유적에서는 볼륨이 높고 풍기는 뉘앙스가 고구려풍의 문양이 있지만, 부드럽고 세련된 연화문을 위주로 발전되어 간다. 이는 중국 남북조(南北朝)의 여러 국가와 교류에 의한 영향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듯 하다. 그밖에 백제 특유의 소문(素文), 태극문(太極文)이 공주, 부여, 익산지방에 등장한다.

신라는 초기에는 고구려풍의 볼륨이 높고 날카로운 양식이 경주를 중심으로 나타나고, 백제의 부드러운 연화문과 상통하는 문양도 관찰된다. 고신라 말과 통일 초부터는 각종 보상화문, 동물문(瑞鳥文), 귀면문, 인동문(忍冬文), 당초문(唐草文) 등이 출현하는데 이시기를 전후하여 연화문은 복엽(複葉)과 복판(複瓣)으로 변화하면서 통일신라 막새의 주 문양으로 자리잡는다. 이 시기에 인면와(人面瓦)가 보이기 시작하며 정형화된 암막새가 등장하는데, 인동문이나 당초문이 가장 널리 애용되고 다른 문양이 혼용되는 것이 나타난다.

고려에 들어오면 문양이 조잡해지고 연화문이 형식적으로 배치되는데 이는 9세기 경에 이미 보이는 현상이다. 이 시기에는 문양의 수량이나 종류는 통일신라와 비슷하지만, 전체적으로 퇴보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암막새의 가장 큰 변화는 귀목문(鬼目文)이 등장하는 것이다. 암막새는 인동·당초문과 다른 문양이 혼용되는 사례가 많다. 이 시기 후기부터는 막새문양과 함께 제작년대와 제작장소를 새긴 명문이 등장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암·수막새의 모양이 변화하고 드림새와 등기와의 접합각도가 지금까지 수직에서 더 크게 벌어지는 특성을 보인다. 조선초기에는 용문(龍文), 봉황문(鳳凰文), 귀목연화문(鬼目蓮花文), 귀목·초화문(鬼目·草花文), 범어·초화문(梵語·草花文) 등이 주류를 이루면서, 드림새에 제작년대, 제작자, 제작장소를 나타내는 명문이 삽입되는 사례가 많아진다. 후기에는 위 문양외에 거미문, 박쥐문, 귀면문, 화문(花文), 완자문, ‘壽’字文’, ‘喜’字文’ 등이 성행하였다.

참고문헌

  • 風納土城Ⅰ(국립문화재연구소, 2001년)
  • 新羅瓦塼(國立慶州博物館 外, 2000년)
  • 고궁 건물막새 등 문양조사(명지대학교부설 한국건축문화연구소, 문화재청, 2000년)
  • 漣川 瓠蘆古壘(심광주 외, 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 1999년)
  • 龍井里寺址(扶餘文化財硏究所 外, 1993년)
  • 彌勒寺(文化財管理局 文化財硏究所, 1987년)
  • 皇龍寺(文化財管理局 文化財硏究所, 198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