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암리 사지

청암리 사지

[ 平壤 淸岩里 寺址 ]

지역 평양

평양시 대성구역에 있는 고구려시대의 사지로, 청암리 토성 내에 있으며, 청암리 토성 인근에는 대성 산성, 안학궁터와 많은 고구려 고분이 분포하고 있다. 청암리 토성지 내부에 대한 1938년과 1939년도의 발굴조사에서 절의 규모가 확인되었는데, 청암리 사지는 여러 개의 건물들로 이루어졌고, 건물은 서남향을 장축으로 서로 대칭 되도록 배치되어 있었으며, 남쪽으로부터 중문(中門), 탑(塔), 금당(金堂)이 있고, 탑의 좌우에 동·서 금당을 배치하고, 북금당 뒤쪽에 강당(講堂)지가 있었다.

탑지는 평면 8각형이며, 한 변 길이 10.2~10.4m이며, 폭은 24.7m이다. 탑의 기단은 자연암반을 8각으로 다듬어 만들었고, 둘레에 다듬은 돌을 돌렸다. 탑의 초석은 8면 중 동, 서, 남, 북 4면은 5칸이고, 그 사이 나머지 4면은 4칸이다. 기단 밖으로는 지붕에서 떨어지는 빗물이 흐르도록 냇돌(川石)을 깔은 수구(水溝)가 있다. 수구의 폭은 0.7m이다. 탑의 동, 서, 남, 북 네 방향에 냇돌을 깔아 보도(步道)를 만들었다. 보도의 폭은 약 2m 정도이다. 탑의 계단 자리는 남면과 서면에서 발견되었다.

금당지는 탑의 북쪽에 자리하며, 탑의 북쪽 기단과 금당 기단의 남쪽 면 사이는 14.65m 정도 떨어져 있다. 금당지는 동~서 길이 32.1m, 남~북 폭이 18.8m로 큰 규모이며, 기단 자리가 있는 곳에는 냇돌을 깔았다. 탑의 동쪽과 서쪽에서도 금당지로 보이는 건물의 기단 유구가 발견되었다. 동쪽 금당지의 남북 길이는 24.48m이고, 동~서 폭은 13.33m로 큰 규모이다.

문지는 탑의 남쪽에 있고, 탑과 문지 사이의 거리는 12.2m이다. 문지 좌, 우에 회랑지로 생각되는 건물지가 있다.

청암리 사지의 각 건물은 탑을 중심으로 건물과 건물 사이는 기하학적 비례로 배치되었다. 북쪽의 금당지 남쪽 면을 밑변으로 정삼각형의 정점이 탑지의 중심과 일치하고, 탑지의 중심점에서 중문까지의 거리를 반지름으로 원을 그리면 원 안에 동금당, 서금당지의 안쪽 면과 북금당의 계단 남쪽면을 통과한다. 또한 배치 및 건물 크기는 기본 단위척을 응용하였는데, 이는 탑 너비의 1/2을 단위 척으로 삼았다.

청암리 사지의 가람배치는 탑을 중심으로 동·서·북쪽 세 방향에 금당이 있고, 탑의 남쪽에 중문이 있는 1탑 3금당식이다. 1탑 3금당식 가람배치는 청암리 사지뿐만 아니라 상오리 사지와 정릉사지에서도 확인되어 고구려시대 가람배치의 특징으로 추정된다. 일본 飛鳥寺址도 청암리 사지와 같은 1탑 3금당식이다. 1탑 3금당식 가람배치는 중국 『사기(史記)』 「천관서(天官書)」에 나타난 오성좌(五星座)의 구성을 그대로 적용하여 지상에 재현시킨 중국 궁전의 배치와 유사한 원리를 가졌다.

청암리 사지에는 많은 기와편과 금동제 작은 방울과 금동제 악천소상(樂天小像)이 출토되었다. 특히 출토된 기와편 중에 ‘寺’라는 명문이 있는 기와편이 있어 사지였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북한 학자들은 청암리 사지를 고구려 문자왕 7년(498)에 지은 금강사(金剛寺)로 비정하고 금강사지로 부르고 있다. 그러나 청암리 사지에서 출토된 기와편은 장군총 출토 기와보다 늦고, 장안성 출토 기와보다는 앞서고 있어, 청암리 사지의 축조도 5세기 이전으로 올라가지 않는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고구려 시대의 금강사(金剛寺)는 아닐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고려 숙종 7년(1102) 9월에 왕이 평양의 금강사에 와서 옛 탑을 보고 갔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청암리 사지를 고려사에 등장하는 금강사로 비정하고 있다.

참고문헌

  • 고구려 금강사와 그 터자리 구성에 대하여(리화선, 조선고고연구 1986년년 4호, 1986년)
  • 高句麗淸岩里廢寺址の調査(小泉顯夫, 佛敎藝術 33, 1956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