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릉사지

정릉사지

[ 平壤 定陵寺址 ]

지역 평양
복원된 정릉사지 가람배치도

복원된 정릉사지 가람배치도

평양시 력포구역 무진리에 위치한 고구려 사지로, 동명왕릉으로 추정되는 고분에서 남쪽으로 120m 가량 떨어진 산기슭에 있다. 1974~75년에 발굴 정리된 건축지의 전체 면적은 남북 132.8m, 동서 223m로 29,614.4㎡이고, 여기서 건물터 18개, 회랑터 10개, 벽돌의 원형 구조물 2곳, 정방형(正方形) 적석시설물 1곳 등이 확인되었다. 주변에는 동명왕릉을 포함한 크고 작은 고분들이 산재되어 있어 왕릉을 수호하기 위한 사찰로 보인다.

건물 전체의 방향은 거의 정남향으로 뒷산을 배경으로 남향한 건물을 지은 방식이다. 건축군 전체를 회랑으로 둘러막고, 그 내부를 6개의 남북향 회랑과 10개의 동서향 회랑으로 구획하고 있다. 건물터는 크게 남북 회랑에 의해 5개 구역으로 나뉘며, 팔각건물터를 중심으로 동서 대칭으로 배치되어 있다.

I구역은 건물의 중심부로 목탑지로 추정되는 팔각건물터와 금당지, 강당지 등 모두 9개의 건물터와 회랑, 2개의 회랑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Ⅱ구역에는 2개의 건물터와 원형의 벽돌시설 1곳이 있으며, Ⅲ구역에는 원형의 벽돌시설 1곳이 있다. Ⅳ구역에서는 건물터가 드러나지 않았으며, Ⅴ구역에서는 3개의 건물터와 1개의 회랑터로 구성되어 있다.

건물군 동쪽과 북쪽에서 수구(水口)의 일부가 원상태로 확인되었다. 이밖에도 할석(割石)으로 다져 쌓은 5.8×5.4m의 방형(方形) 적석시설이 있으나, 원상 파괴로 무엇을 위한 시설인지 확실하지 않다. 또한 남북 24m, 동서 14m의 바위산은 정원 조성에 이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대부분 암·수키와편으로 대체로 적색이다. 건물지 제일 아래층에서는 회색 기와편도 수습되었다. 지붕 장식품으로 치미와 귀면와도 출토되었다. 모두 700여 점에 해당되는 토기편이 수습되었으며, 이 중 22점이 복원되었다. 종류로는 옹, 호, 동이, 시루, 발, 완, 접시, 잔 등 다양하다. 토기 표면에는 ‘사(寺)’·‘정(定)’·‘정릉(定陵)’·‘만(卍)’·‘비(飛)’·‘상승(象僧)’·‘소옥(小玉)’·‘혜감(惠堪)’·‘약원(弱元)’·‘귀미(歸未)’·‘임목(林木)’·‘고구려(高句麗)’ 등이 새겨진 것도 있다. 이외에도 ‘☆’ 등의 기호도 새겨져 있다.

벽돌은 대체로 청회색이며, 문양은 크게 능형문, 사선문, 타래문, 이깔나뭇잎무늬 등 4가지로 구분된다. 이밖에도 못, 연결고리쇠, 고리못, 꺾쇠, 창, 화살촉, 망치, 화로, ‘ㄴ’자형 쇠조각, 주철관, 문고리쇠, 칼집 등 10여 종의 철제품과 ‘부흥(復興)’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청동칼집과 꽃 모양의 금동제품, 구슬, 벼루 등도 출토되었다.

정릉사지의 평면구조는 중앙에 팔각목탑지를 중심으로 좌우에 건물이 마주하여 배치되고, 탑지 북쪽으로는 회랑을 경계로 하여 동·서에 있는 건물보다 큰 금당을 배치한 1탑 3금당식이다. 평양시 대성구역 청암동의 금강사지와 비슷해 주목되며, 당시 백제나 신라와 다른 고구려 특유의 가람배치 양식이다.

이곳에서 출토된 명문과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에 따라 392년 평양에 지은 9개의 사찰 중 하나로 추정된다. 또한 이 건물지의 구조와 배치는 삼국시대 건축술의 발전 수준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고구려 사원이 전면적으로 발굴된 것은 이 유적이 처음이다.

참고문헌

  • 정릉사건축의 평면구성에 대하여(한인호, 과학·백과사전출판사, 1981년)
  • 정릉사건축의 평면구성에 대하여(한인호, 력사과학 81-2, 1981년)
  • 동명왕릉과 그 부근의 고구려유적(김일성종합대학, 김일성종합대학출판사, 1976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