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은사지

감은사지

[ 慶州 感恩寺址 ]

지역 경주
감은사지 가람배치도

감은사지 가람배치도

경상북도 경주시 양북면 용당리에 있는 절터로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681년에 신문왕이 부왕인 문무왕의 뜻을 이어 창건하였다. 문무왕이 불력(佛力)을 빌어 왜구를 격퇴하고자 사찰을 짓기 시작하였는데, 사찰이 자리한 동해안 앞 바다에는 문무왕이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고자하여 묻혔다는 해중릉(海中陵)이 있고, 동해의 용이 된 문무왕을 사찰의 금당에 들어오게 했다는 기록과 부합되는 시설물이 발견되어 유명하다.

사지에 대해서는 1959년 1차 발굴조사에서 대략적인 성격이 밝혀졌고, 1979년과 1980년의 2차 발굴조사로 전체적인 범위가 밝혀졌다. 발굴결과 사찰은 초창(初創) 후 2번에 걸쳐서 중건되었으며 폐사의 시기는 조선시대 초기에서 중기 사이의 어느 시기로 확인되었다.

초창의 사지는 남에서부터 중문(中門), 쌍탑(雙塔), 금당(金堂), 강당(講堂) 순으로 배열된 전형적인 쌍탑식가람(雙塔式伽藍)이고, 중문과 강당을 잇는 사방에 회랑(回廊)을 돌렸고 금당과 양측 동서 회랑 사이로 익랑(翼廊)을 두었다. 이 회랑으로 둘러 쌓인 가람 중심부의 크기는 남북 길이, 동서너비가 74.0×76.0m로 거의 정방형(正方形)이다. 금당은 정연하게 쌓아올린 2중 기단 위에 세워졌으며, 정면 5칸, 측면 3칸이다. 기단의 사방 중앙에는 돌계단이 각각 배치되었고 기단은 턱이 있는 지대석(地臺石) 위에 면석(面石)을 세우고 그 위에 부연이 있는 갑석(甲石)을 얹은 가구식(架構式)이다.

금당의 아래에서는 특이하게 지하공간을 이룬 석조유구(石造遺構)가 조사되었다. 이 구조물은 윗면에 남북으로 홈을 둔 사각형의 돌을 정면 6열, 측면 4열로 놓고 이 홈들에 장대석을 끼워 연결하여 귀틀로 하고, 그 위에 동-서 방향으로 장대석들을 마루널처럼 잇대어 깔아 약 60㎝ 높이의 지하공간을 마련한 것이다. 이 공간은 동해의 용이 된 문무왕을 감은사 금당에 들어오게 했다는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기록과 부합되는 것이다.

강당은 지대석, 면석, 갑석을 수직으로 쌓은 가구식의 기단 위에 세워졌는데, 처음에는 정면 8칸, 측면 4칸이었으나 후대에는 서쪽 3칸이 축소되어 정면 5칸, 측면 4칸이 되었다. 창건 당시에는 강당 좌우에 각각 독립된 건물을 배치하였으나 후대에는 회랑형으로 모습이 바뀌었다. 중문 역시 지대석, 면석, 갑석을 갖춘 가구식의 기단 위에 세워진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정면 3칸에 각각 2짝씩의 출입문을 달았고, 문과 연결되는 계단이 3칸 전후면에 모두 설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회랑 가운데 남회랑은 중문 동·서쪽으로 각각 10칸씩 20칸의 도리칸으로 되어 있으며, 동회랑과 서회랑은 남회랑과 접속되는 칸을 포함하여 각각 20칸의 도리칸인데, 남단에서 12번째 칸에 금당에서 연결되는 각각 7칸의 익랑이 연결된다. 이 회랑들도 지대석, 면석, 갑석을 갖춘 가구식 기단으로 꾸며졌다.

금당 앞 좌우에 남아 있는 석탑은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이 석탑들은 2중기단 밖으로 탑구(塔區)가 돌려져 있는 3중기단의 형식을 취한 삼층석탑이다. 각 부의 구성이 백제의 석탑과 같이 많은 석재를 사용하였고, 옥개석(屋蓋石) 받침을 5단의 층급으로 표현한 것 등이 목조가구를 모방한 흔적으로 판단된다. 건립연대가 확실하여 현존하는 한국 석탑, 특히 통일신라 초기의 석탑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감은사지 발굴조사에서는 지정(至正) 11년(1351) 명문이 있는 청동반자(靑銅飯子), 9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금동여래입상(金銅如來立像) 2구를 비롯하여 많은 기와류, 벽돌류, 토기류, 자기류 등이 4,268점 출토되었다. 그리고 서석탑의 해체 복원시에는 그 내부 사리공(舍利孔)에서 사리각외함과 그 안에 들어 있던 사리기(舍利器), 사리병(舍利甁) 등이 출토되었는데, 여기에 새겨진 조각양식이 특이하여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참고문헌

  • 감은사지 동 삼층석탑 사리장엄(국립문화재연구소, 2000년)
  • 感恩寺發掘調査報告書(國立慶州文化財硏究所·慶州市, 1997년)
  • 感恩寺(金載元·尹武炳, 國立博物館, 196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