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림사지

정림사지

[ 扶餘 定林寺址 ]

지역 부여
정림사지 5층석탑

정림사지 5층석탑

정림사지는 백제사찰을 대표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유적의 하나로 부여 시가지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으며, 경내에는 5층석탑(국보) 1기와 석불좌상(보물) 1구(軀)가 남북으로 일직선상에 배치되어 있다. 이 절의 창건은 유구와 유물을 통하여 공주에서 부여로 도읍을 옮긴 직후 얼마 지나지 않는 6세기 중엽으로 추정하나 창건 당시의 절이름은 알 수 없으며, 사지(寺址)의 현재 명칭은 고려시대 때 절의 재건 당시(현종 19년, 1028)에 제작된 기와 가운데 ‘대평8년무진정림사대장당초(大平八年戊辰定林寺大藏唐草)’라는 명문(銘文)이 있어 정림사지(定林寺址)라 하게 되었다.

정림사지에 대한 1차 학술조사는 1942년 藤澤一夫에 의하여 시도되었으며, 그 후 충남대학교에 의하여 1979년 10월 15일부터 120일간에 걸쳐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정림사지의 가람배치는 해방 전에 실시된 1차 발굴조사의 결과에 의하여 그것이 전형적인 일탑식(一塔式)의 사찰지임이 밝혀진 바 있었다. 가람중심부에 배치된 건물들은 남에서부터 중문, 석탑, 금당, 강당의 순서로 일직선상에 세워졌으며 주위를 회랑으로 구획하였다.

석탑(石塔)의 하부기초는 견고하게 다져진 판축토층(版築土層)을 형성하였으며 이 판축토층의 구축시기는 금당지(金堂址)를 포함하여 그 이남의 경내 부지를 조성하기 위하여 광범위하게 축성된 두터운 성토층(盛土層)과 동시에 시공된 사실이 밝혀졌다. 즉 석탑이 그 전후면에 설치한 중문 및 금당과 동일한 시기에 건립된 사실이 확인된 것이다.

그러나 석탑을 제외한 나머지 건물지에서는 기단의 규모를 정확하게 밝힐 수 없었으며 그 모두가 추정에 그치고 말았다. 정림사지의 각 건물지에서 추정된 기단의 규모는 아래와 같다.

중문기단

동서 13.1m

남북 7.1m

금당기단

동서 20.55m

남북 15.6m

강당창건기단

동서 27.05m

남북 13.1m

회랑기단

너비 5.2m

이 건물들은 중심위치가 동일선상으로 똑바로 배열되지 않았으며 약간씩의 오차를 가지고 편재되어 있었는데, 석탑의 남북중심선을 기준으로 삼았을 경우 중문의 중심은 서쪽으로 0.12m, 금당은 0.24m, 그리고 강당의 그것은 동쪽으로 0.5m를 벗어나서 위치하고 있었다. 이러한 편재현상은 금당과 서회랑 사이의 기단간격이 그 반대쪽인 동회랑과의 간격보다 0.48m가 좁아지는 현상을 가져오게 되었다. 각 건물의 중심간의 거리는 아래와 같다.

중간·석탑간 중심거리

19.98m

석탑·금당간 중심거리

25.27m

금당·강당간 중심거리

31.7m

가람중심부를 둘러싼 회랑의 전형이 똑바로 장방형(長方形)을 이루지 못하고 북쪽으로 갈수록 동·서 양 회랑 사이의 간격이 벌어져, 그 평면형이 제형(梯形)을 이루고 있다.

건물의 평면구성은 적심석의 배치에 따라 조사되었는데, 중문(中門)은 정면(正面) 3칸(11.3m), 측면 1칸(5.3m)이며, 금당(金堂)은 정면 7칸(18.75m), 측면 5칸(13.8m)이며, 강당(講堂)은 정면 7칸(24.64m), 측면 3칸(10.7m)이다. 각 건물의 기단은 석조기단이며, 금당의 기단은 상층기단과 하층기단의 구분이 있는 이중기단으로 밝혀졌는데, 하층기단에 배열된 주열(柱列)이 상층기단의 그것보다 한 층 낮은 위치에 배열되어 일종의 퇴칸(退間)이라고도 볼 수 있는 구조로 그 너비는 4면이 같은 1.8m로 설계되었다.

현재 강단지에 자리잡고 있는 석불좌상(石佛坐像)의 좌대(座臺)는 이 건물의 평면상으로 꼭 중앙이 되는 위치를 점유하고 있다. 이 석불의 전체 높이는 5.62m에 달하며 거대한 석조물인 만큼 건물의 지붕고는 상당히 높았다고 생각되며 연등천장으로 가구(架構)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출토유물로는 연화문(蓮花文) 수막새기와가 다량 수습되었고, 서까래 기와, 귀면문(鬼面文)과 당초문(唐草文)이 있는 암막새기와, 수키와, 암키와가 있다. 불상(佛像)으로는 곱돌제삼존불이 있는데 그 조각기법이 시대적인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와질불두(瓦質佛頭)·불신(佛身)조각이 나왔으며 도용(陶俑)이라고 하여 흙으로 빚어서 구워낸 인형을 의미하는 토우(土偶) 또는 니상이 비록 조각들이나마 다량 출토되어 백제미술연구에 획기적인 자료가 되었다.

이 절터에서 출토된 연꽃무늬수막새는 꽃잎 사이의 경계선이 없고 꽃잎 끝을 뾰족하게 장식하였으며 융기된 작은 자방(子房)에는 연자(蓮子)가 없었던 것인지 마모된 것인지 흔적이 뚜렷하지 않으나 소박하면서도 세련된 사비시대 막새기와 예로서는 고식으로 들어갈 것으로 생각된다. 또 다른 막새기와는 8잎의 연꽃잎 뿌리에서 꽃잎 끝쪽으로 급하게 융기시키며 둥글게 만들고 그 가운데를 뾰족하게 장식하였다. 자방은 약간 융기시켜 구획선을 돌렸고 7(1+6)개의 연자를 배열하였다. 꽃잎과 테두리 사이를 넓게 마련하고 있음이 다른 막새기와와 구별되는 특징이다.

백제의 건축예술에 있어서 아마도 새로운 기원을 이루게 한 것 중에 서까래 기와의 등장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서까래기와의 출현은 한성이나 웅진성의 백제 고지에서는 아직 발견 예가 없는 것으로 국도를 사비로 옮긴 뒤 불교문화와 건축중흥이 이루어진 6세기 중반 이후로 추정되고 있다. 이 절터에서는 8잎과 12잎의 반전 처리된 서까래기와가 출토되고 있다.

정림사지 연지에 대한 발굴조사는 1980년부터 1984년까지 3차에 걸쳐 이루어졌다. 정림사지 연지는 자연적으로 유입된 토사에 의하여 매몰되고 말았다. 동지와 서지에서는 각각 매몰과정이 달랐으나 백제멸망 후 얼마 되지 않은 시기를 전후해서 폐허가 되었던 것 같다.

동지의 규모는 동~서의 길이가 15.3m, 남~북의 너비는 11m이다. 서지의 그것은 동~서 11.2m, 남~북 약 11m이며 두 연못 사이에는 너비 2.1m의 중앙통로가 있다. 이 중앙통로를 지나 북쪽으로 5.4m의 지점에 이르러 잡석으로 축조된 석축기단이 발견되었으나 장애물의 존재로 말미암아 기단 전면에 대한 발굴로서 조사를 마쳤다.

연지 내부 특히 동지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거의 전부가 백제시대의 것으로 생각된다. 83년에 실시된 제2차 발굴은 서지의 일부를 제외하면 연못 내부에 도달하지 못하였다. 이 때의 출토유물들은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된 토기들과 어골문 와편 등에 의하여 지배되고 있다. 84년에 연못 내부에서 발굴된 유물들과 서로 비교해볼 때 대조적인 면이 적지 않았다.

연못 내부에서 발견된 중요한 유물로서는 백제시대의 연화문와당(蓮花文瓦當), 인동문전(忍冬文塼)을 비롯하여 기대(器臺), 삼족토기(三足器), 개배(蓋杯), 보주형꼭지 등 백제의 특징이 명백한 토기파편들이 상당수 출토되었다. 그러나 완전한 형태를 유지한 유물은 존재하지 않았다.

모두가 파편들임에 불과하였으나 출토유물의 중요한 일부를 차지한 것이 흑색연질토기이다. 흑색칠은 흡수율이 높은 연질토기의 결함을 보완하기 위하여 탄소를 그릇의 표면에 흡수시킨 것으로 짐작된다.

백제연질토기에 대하여 새롭게 인식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으며, 그에 대한 몇 가지 기형을 밝힐 수 있었던 것은 이번 발굴에서 얻을 수 있었던 중요한 성과의 하나였다.

참고문헌

  • 扶餘定林寺址蓮池遺蹟發掘報告書(尹武炳, 忠南大學校博物館, 1987년)
  • 定林寺(忠南大學校博物館, 198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