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지리 토성

순지리 토성

[ 梁山 蓴池里 土城 ]

지역 양산

순지리 토성은 경상남도(慶尙南道) 양산군(梁山郡) 하북면(下北面) 순지리(蓴池里) 산47-2번지와 답곡리(畓谷里) 산49·55번지(현재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에 해당하는 야산에 위치한 토성이다. 이 성지(城址)가 통도사(通度寺) 골프장 축조공사 구역에 일부 포함되게 되어 동아대학교박물관에 의하여 1982년 12월 20일부터 이듬해 4월 23일까지 약 4개월간에 걸쳐 조사가 이루어졌다.

이 성은 산성산 정상부와 서쪽 사면(斜面)을 성내로 삼고 축조된 포곡식(包谷式)산성으로, 체성 평면 형태는 서쪽 경사면을 지름으로 하는 반월형을 띠고 있다. 지형적으로 동·남·북쪽의 만곡된 지역이 주로 심한 경사를 보이고 서쪽 계곡부분은 완만하여 대부분 성내(城內)로 활용된 듯하다. 조사자는 이 토성의 축조시기가 최소한 5세기 중반 이전이며 그 하부에서 확인된 목책시설은 그보다도 더 앞섰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성의 북벽은 점판암(粘板岩)이 부식된 퇴적층을 이루고 있으며, 그 동쪽은 이 퇴적층 위에 적갈색황토층이 덮여 있는 지반을 기단부로 삼고 있는데, 먼저 저습지에서 운반해 온 흑갈색점토를 20㎝ 정도의 두께로 깔아 견고하게 다지고 그 위에 인접한 성내의 산토를 20∼30㎝ 정도로 쌓아 다시 단단하게 다졌다. 체성(體城)은 비교적 가파른 경사도가 끝나는 능선상에 점토와 산토를 교차하여 판축한 순수토성으로, 높이는 지형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평균 2m 정도이다. 체성의 단면은 기단부의 폭이 8m이며, 상부의 폭이 4m로 사다리꼴(梯形)을 나타내고 있다.

한편 기단부의 판축상태를 확인하는 과정에 바닥층인 생토층 면에서 구덩이 자리가 나타났는데, 이 구덩이는 양쪽에 4m 간격을 두고 체성 기단부 전면에 배치되어 있고 그 간격이 1m 전후로 일정하였다. 그리고 구덩이 내부는 대부분 단단한 흑갈색점토로 메워져 있었는데 간혹 목질이 부식되고 점토가 메워지지 않은 것, 때로는 인접해서 나란히 2중 흔적을 남긴 것, 돌이 깔려 있는 것 등 다양한 형태를 하고 있었다. 또한 2m 이상 높이의 나무기둥을 세웠다가 뽑지 않아 그대로 부식된 흔적을 체성 벽면에 남기고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을 미루어 볼 때 이 구덩이는 단순히 토성의 기단부를 튼튼히 하기 위한 수법이나 판축을 위해 세운 기둥자리가 아니라, 토성 이전에 이곳에 목책이 설치되었던 흔적으로 추정된다. 조사 당시 목책 자리는 직경 45㎝, 깊이 48㎝였다.

동벽은 표토층인 흑갈색부식토층을 먼저 걷어내고 그 아래에 있는 황갈색생토층 위에 흑갈색점토를 깔고 다져 기단부로 삼았다. 그 위에 다시 산토와 점토를 교차하여 다지는 판축수법으로 체성을 구축하고 있는데, 2줄로 된 기둥을 세우고 그 사이 점토와 산토로 메웠다. 그 중 일부는 체성의 유실을 방지하기 위해 내벽 쪽에 막돌을 1벌 덮어두고 있다. 이곳에서도 기단부위에서 목책 자리가 확인되었는데 기둥자리가 2중, 3중으로 중복해서 나타나는 지점도 있었다.

남벽은 지형상 성내에서 가장 높은 곳(표고 213m)으로 체성은 표토인 부식토층을 일단 걷어내고 경사진 생토층면에 회흑색점토를 깔아 다져서 기단부를 형성한 다음, 그 위에 다시 산토와 점토를 교대로 다진 판축수법을 사용하여 축조하였다. 잔존부위에는 2중 목책 자리와 깬돌(割石)을 끼워 목책의 흔들림을 방지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서벽은 동서로 뻗은 계곡을 가로질러 석축 체성을 축조하고 내부에 흙을 채워 수평대지를 만들었다. 체성이 석축인 곳은 여기가 유일한 곳이다.

순지리 토성에는 북쪽을 제외한 동·서·남쪽 3곳에 문지(門址)를 시설하였는데, 동문지의 경우 비교적 지형이 평탄한 곳을 이용하고 있다. 즉 체성이 ‘ㄱ’자상으로 꺾어지는 계곡쪽에 폭 2m 정도를 축성하지 않고, 정면에서 바라보면 ‘U’자형 개구부를 만든 뒤 양 측면에 조잡하게 할석을 덮어 토벽의 노출을 방지한 정도이다. 남문지는 체성을 개구하여 한쪽에만 석축을 배치한 형태로 석열은 체성과 수직되게 1줄로 배치되었으며, 폭 3m인 문지 사이에는 흑갈색 부식토가 메워져 있었는데, 이 문지는 능선과 연결되어 있었다.

이곳에서는 목조 우물터가 확인되었는데, 1.5m 정도 깊이에서 4벽을 판자로 조립한 것이다. 이 유구는 체성으로부터 2m 안쪽에 장방형(長方形) 우물 틀을 조립한 것으로 그 규모는 전면 5.9m, 측면 4.7m, 깊이 2.08m였다. 그 세부 구조를 살펴보면, 장방형으로 기단부를 설치하고 그 위에 전면 5칸, 측면 4칸이 되도록 홈을 파서 방형(方形) 기둥을 세웠다. 그리고 바깥쪽에는 둥근 기둥을 흙 속에 박아 방형 기둥과 나란하게 세운 다음, 그 사이에 판자를 끼워 우물 벽이 되도록 조립하였는데, 보통 1칸에 7~8매의 판자를 올려 쌓았다. 이 경우 판자는 서쪽 전면의 경우 4칸, 북쪽 측면의 경우 3칸에 1매로 끼워질 수 있도록 긴 것을 사용하고, 북서쪽 구석부분은 1칸 크기의 짧은 판자를 전면, 측면 각 1칸에 사용하고 있다. 나머지 동남 2벽은 1매 판자를 사용하였다. 이와 같이 내부는 판자로써 귀틀집 모양으로 축조하고 바깥에는 부식토를 채웠다. 여기에 사용된 목재는 참나무와 도토리나무로 추정된다.

참고문헌

  • 韓國南海沿岸城址의 考古學的 硏究(沈奉謹, 學硏文化社, 1995년)
  • 梁山 蓴池里土城(沈奉謹, 東亞大學校博物館, 198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