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산성

사산성

[ 稷山 蛇山城 ]

지역 직산
蛇山城 平面 및 發掘區域圖

蛇山城 平面 및 發掘區域圖

사산성은 표고 176m인 성산의 주봉에 약 750m 규모의 산정식산성이 있고, 이 산정식산성 동서 양단에서 북으로 연장해 북향하여 흐르고 있는 작은 계곡을 포용하여 축조한 길이 1,030m의 포곡식산성으로 구성된 복합식산성이다.

사산성은 내곽인 산정식산성에서 석축 성벽이 조사되었고 외곽인 포곡식산성에서 석축의 기단석열을 가진 판축성벽이 확인되었다.

산정식산성(山頂式山城)의 성벽구조는 동벽과 북벽에서 확인되었는데, 동벽에서는 외측의 석축과 내측의 판축토루의 2가지 성벽이 나란히 존재하고 있었으며, 북벽에서는 석축의 성벽이 나타났다. 이 석축은 거의 수직으로 기단이 없이 쌓아 올린 것이다. 동벽 석축의 특징은 생토면 위에 놓이는 기초석과 제2, 3단의 석축이 거의 직립하면서 수평적되어 있다는 점이다. 내측으로는 석재나 석재편으로 적심하였다.

북벽에서는 주혈(柱穴)이 있었는데, 이 주혈들의 간격은 1.6m였다. 석축은 아래에서 위로 오르면서 평균 8㎝씩 안쪽으로 물려 쌓았으나 할석을 치석하여 정연히 맞추어 쌓은 점에서는 동벽과 동일한 양상이다. 또 바깥으로 1.5~1.95m 나아가 일렬의 석열을 만들고 거기에도 불규칙한 주혈이 있었다. 이러한 모습에서 내곽인 산정식산성이 구축되었는데에 있어서도 지형적 조건에 따라 방법상의 차이가 있었을 것임을 알 수 있다.

동벽 내측의 판축토루는 본래의 동벽 성체를 파괴하고서 외곽인 포곡식산성 축조시에 구축된 것으로 시기적으로 늦은 것이라 하겠다. 동벽의 판축유구 하부에서는 적갈색과 황갈색의 연질 격자문 와편과 평행집선문이 시문된 와편과 함께 목탄과 회(灰)가 섞인 층위가 있었는데, 본디 산정식의 내곽에 있었던 표토의 일부가 판축식의 외곽을 쌓을 때 심부(心部)로 밀려들어갔음을 알 수 있다.

외곽인 포곡식산성(包谷式山城)의 판축이 가장 잘 남아 있는 곳은 동문지의 북측으로, 이곳에서는 성벽의 외면이 북측 옹성(擁城)으로 인하여 다른 부분에 비하여 훼손이 덜하였다. 이 곳에서 파악된 특징은, ① 판축의 외측면 하단에 석축기단석열을 두고 있으며, 이 석열은 단면이 계단식이다. ② 판축의 외측면 하단의 석축기단석열은 주간(柱間)에서 사직선을 이룬다. ③ 판축의 외측면에는 일정한 구간마다 주혈(柱穴)이 남아 있고, 주혈은 각재를 사용하되 수직으로 세웠다. ④ 판축의 외측면 하단 외측에는 원형의 주혈이 1개 혹은 2개씩 존재한다. ⑤ 판축의 외측면 기단석열 상단과 판축의 첫 번째 다짐 부분은 적갈색 점질토로 하고, 사질(砂質)의 석비레와 점질토(粘質土)가 교대로 판축된 것이라 하겠다.

이밖에 판축성벽 외측의 기단석열에서 바깥으로 일정한 너비에 부석(敷石)을 깔은 곳이 있으며, 판축의 하부에 있는 기단석열은 또 다른 판축토에 의하여 덮여진 상태를 보이고 있는데, 이것은 판축성벽의 기단 석축부의 노출을 의도적으로 막으려는 기단 외피부를 시설한 것이라 하겠다.

판축의 외면에 비하여 내면의 시설은 빈약한 편이다. 내측면의 경우 주혈이 원공식(圓孔式)으로 존재하고 있는 곳이 있고, 배수를 위한 ‘U’자형 단면의 홈이 길다랗게 이어진 곳도 있다. 경사를 이용하여 쌓여진 성벽은 성벽의 기초를 이룬 지형 자체가 내면보다 외측이 낮기 때문에 내면의 우수를 일정한 방향으로 유도하여 배출시킬 필요가 있었다고 여겨진다.

판축은 외면의 상태로 보아 4m 높이로 남은 곳이 있으므로 매우 높고 견고할 뿐만 아니라, 그 하부쪽으로는 판재 나무결의 흔적이 2곳에서 확인된 바 있다. 따라서 원형의 커다란 기둥을 세우고, 그 안쪽에 일정한 간격으로 각재를 세워 좌우를 연결하는 판목을 대고 판축했음을 짐작케 한다. 각재로 된 기둥이 있었던 기둥 홈은 정확히 남아 있으나 내심방향(內心方向)으로는 할석편이 박혀 있다. 이는 판축 하나의 구간마다 세워진 각주(角柱)가 내측의 기둥과도 연결되고, 그 구간마다 약간의 석재를 넣어 판축 사이가 구분되었음을 뜻한다고 여겨진다.

판축구간은 대략 4가지로 구분된다. 즉, 2.7m, 3.42~3.5m, 3.66~3.7m, 4.3m의 4가지로 구분되어 질 수 있다. 2.7m의 구간(區間)은 완경사에서 급경사로 이어지는 북벽 동단의 일부에서 보이고 있는데, 이곳이 판축의 시작과 종착의 연접부가 아닌가 의심하고 있다. 3.42~3.5m의 길이 차는 구간의 간격을 측정함에 있어 사직선화 된 것이므로 사직선의 수평점을 기준하는 것과 사직선상의 간격을 감안한 측치이고, 3.66~3.7m도 마찬가지이다. 동벽은 대략 전자이고 북벽이 후자여서 주목된다. 4.3m는 치성(雉城)에 적용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기본적인 간격은 3.42m와 3.66m으로 보며, 치성과 같이 부대시설의 경우 전체의 기단을 둘로 나누어서 판축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문지(門址)는 동문지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동문지는 산릉선이 거의 평탄하게 낮아진 곳인 동시에 가지능선이 갈라지는 위치에 있는데, 좌우의 측벽과 좌우의 옹성(擁城)이 시설되었는데, 북측의 문구 측벽은 이미 유실된 상태였다.

문구부는 전면에 바짝 붙여서 원형의 주초적심이 나타났는데, 그 중심간의 거리는 4.8m이고 각각의 적심은 직경 1.4~1.6m이다. 또한 4.8×4.8m의 각각 1칸인 문이 존재했다고 판단된다.

문의 개구부 측벽은 남측에서 너비 8.8m로 넓으나, 이 넓어진 부분은 최대의 길이가 5.4m로 추정되고 현존하는 석축기단은 3.6m만 남았다. 그리고 이 측벽은 기단기준 1.6m가 외향으로 좁혀져 길이 2.4m를 나아가고 있다. 이 부분은 계단식의 석축을 이루고 있다.

동문의 외면 좌우에 있는 옹성은 문의 좌우측벽에서 바깥을 향하여 직교하여 치성(雉城)처럼 장방형으로 축조된 것이다. 북측의 것은 석축의 기단이 길이 9.8m, 너비 7.4m이며 동문의 북측 주초적심에서 북으로 제2구간 판축에서 제4구간 판축 사이에 붙은 것이다. 경사진 외사면은 계단식의 석축기단을 쌓고 판축하였는데, 판축의 수법은 성체와는 차이가 있다. 이 북옹성(北擁城)은 윗부분의 판축이 대부분 유실된 상태였다.

남측의 옹성은 북측과 대칭 모양으로 되어 있으나, 동문의 남측 북벽에서 두 번째 판축구간을 기준하였다. 판축의 수법은 성체와 동일한 양상을 보여주고 있지만, 기단의 구성에 있어서는 수평을 원칙으로 한다는 점에 차이가 있다. 판축 구간은 3.42m이지만, 동쪽 선단부에 있어서는 2.25m이고, 기단 외의 원주혈(圓柱穴)은 있으나 성벽에 붙여 세운 기둥 흔적이 없는 점에 있어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남북의 옹성(擁城)은 18m의 간격을 두고 있으며, 북측은 주초적심에서 6m, 남측은 8m나 떨어져 문 밖의 정부(庭部)는 거의 평탄한 평면을 구성하고, 바깥으로 능선을 따라 길이 나 있다. 이들 옹성은 체성이 만들어질 때 동시에 만들어진 것이 아님을 유구, 특히 기단부의 결구(結構)와 판축방법의 차이를 나타내는 주혈의 상이점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시설의 옹성은 『화성성역의궤』에 의하면 적대로 표현되고 있어 참고된다.

동벽과 북벽의 연접부인 동북모서리에서 치(雉)가 확인되었다. 동북모서리의 치는 동벽의 북단에 잇대어서 연장된 형태를 취하므로, 북벽의 동단부에서는 직교하듯 내민 형태로 장방형의 것이다. 치성(雉城)이 있는 곳의 체성 내면은 동문지 남측 문구부 측벽에서 나타난 것과 매우 유사한 계단식의 석축이 나타났다.

치성은 판축의 단위 구간이 4.3m인 2칸의 판축이다. 판축의 기단은 선단부에서는 경사도가 심한 지면 때문에 견고한 계단식의 석축을 7~8단으로 축조하였다. 이 기벽(基壁) 석축은 길이가 7.5m이고 너비가 1.2~1.6m로 쌓았으며, 그 상면에 보다 안쪽으로 들여서 2단의 판축기단 석열을 놓았다. 그리하여 거의 수평을 이룬 판축기단 상면을 조성하고 있다.

판축은 원주(圓柱)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서 다른 체성과 달리 원주를 세웠고, 다시 외측으로 또 다른 주혈이 있다. 따라서 이곳에서는 판축의 또 다른 형식으로서 기단보축에 의한 판축상면의 수평화가 확인되고 있으나, 판축기둥과 그밖에 기둥을 세우는 방법에는 변화가 없고, 다만 각주가 원주로 바뀌었을 뿐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사산성의 치성은 옹성보다는 짜임새 있는 기단석축과 판축하단의 구조를 가지고 있는 점에서 부여 부소산성(扶蘇山城)의 치와도 비교됨직 하나, 그 축조시기와 세부적인 짜임새에는 차이가 있을 것이라 여겨진다.

사산성은 북향한 계곡으로 성내의 우수가 거의 집수되고 배수된다. 현재 성내의 우수가 모여 나가는 중심부 수로에 대한 조사에서는 이곳에서 성벽이 내측으로 보다 두텁게 축조되었음만 확인되었다. 거기에는 바닥에 원형의 적심처럼 할석을 견고히 다진 중심에 목재의 원주와 각주가 박혀 있음이 확인되었다. 다만, 수구 부근의 성벽이 후대의 다른 성에서 흔히 보는 바와 같이 내만한 성벽이 아니라는 사실이 주목된다.

그 밖의 시설로서는 내곽인 산정식산성의 성벽의 내측에 근접하여 수혈식의 저장공(貯藏孔)이 조사되었는데, 이 갱내에서 나온 유물상은 주로 토기편이다.

사산성의 출토유물은 토기류와 와류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토기류 중 보시기류나 호류(壺類)는 5세기 내지 6세기 전반의 백제-고구려의 영유기와 관련되고, 단각고배(短脚高杯)를 비롯한 신라계 유물들은 6세기 후반 신라 진흥왕의 영유팽창 이후에 속하는 유물들로 보고 있다. 와류는 선조문(線條文), 격자문(格字文), 어골문(魚骨文), 복합문(複合文)들로 다양한 편이다. 이 가운데 선조·격자문이 보다 앞선 시기의 것으로, 어골문과 복합문은 보다 늦은 시기의 것으로 보고하고 있다.

참고문헌

  • 稷山 蛇山城(成周鐸·車勇杰, 百濟文化開發硏究院, 199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