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성

궁성

[ 宮城 ]

궁성은 평상시 왕이 거처하는 궁궐을 에워싸고 있는 성벽이나 담장을 의미한다. 그러나 궁궐, 궁전, 궁실이 혼용되어 불리고 있으며, 이들 용어는 넓은 의미로 볼 때 같은 뜻으로 해석되고 있다. 궁궐이란 용어는 궁과 궐의 합성어로서 궁(宮)이란 천자나 제왕, 왕족들이 살던 규모가 큰 건물을 일컫고, 궐(闕)은 본래 궁의 출입문 좌우에 설치하였던 망루를 지칭한 것으로, 제왕이 살고 있던 건축물이 병존하고 있어서 ‘궁궐(宮闕)’이라 일컫게 되었다.

궁성은 도성(都城)이 축조되지 않은 곳에도 있을 수 있어 반드시 도성 내에 위치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궁성은 기능별로 정사(政事)를 위한 정무건축공간과 일상생활을 위한 생활건축공간, 그리고 휴식과 정서를 위한 정원건축공간으로 구획하고 있다. 배치형식은 고대로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정사를 목적으로 한 건축군을 앞에 배치시키고, 일상생활건축군을 뒤편에 배치하는 방법인 전조후침(前朝後寢)의 배치형식이 통례로 되어 있었으며, 이러한 배치법은 중국이나 일본의 궁궐배치에서도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

고구려 궁성(高句麗 宮城)은 국내성(國內城)과 안학궁성(安鶴宮城)으로, 배치형식이 밝혀진 것은 안학궁성이다. 안학궁성 내에는 총건평 31,458㎡에 달하는 궁전터들이 있으며, 남북 중심축을 따라 외전, 내전, 침전이 차례로 놓이고 그 양 옆에는 나란히 대칭되게 동·서외전과 동·서내전이 배치되어 있었고, 침전 좌우에는 창고와 기타 보조건물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동북모서리에는 동궁이 위치하고 있었으며, 그 남쪽에는 길게 궁중정원이 펼쳐져 있었다.

안학궁의 전체 평면계획에는 대각선 전개비(展開比)를 널리 도입하였으며 정삼각형의 정점에 주요 대상을 배치하는 등 여러 가지 배치수법들이 적용되었다. 대개 궁전의 기본 건물들은 중심축 상에, 다른 건물들은 그에 대칭되게 배치하여 위엄을 나타내게 설계하였으며 모두 회랑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또한 침전 뒤편 북쪽에는 인공의 조산을 만들어 후원(後苑)시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백제 궁성(百濟 宮城)은 웅진도성(熊津都城) 내에서 임류각지(臨流閣址), 추정왕궁지(推定王宮址), 지당지(池塘址), 목곽고(木槨庫) 등 왕궁유적이 확인되고 있으며, 사비시대의 왕궁유적은 부소산성(扶蘇山城) 남록에서 궁성의 최북단에 축조된 석축시설(石築施設)과 함께 ‘북사(北舍)’가 새겨진 항아리편이 출토된 건물지(建物址)와 후원(後苑)시설로 추정되는 방형연못(方形蓮池)이 확인되었다.

신라 궁성(新羅 宮城)은 문헌에 의하면 금성(金城)과 만월성(滿月城)이 나타나고 있으나 그 유지를 확인하기 힘든 상태이며, 월성(月城)이 궁성의 역할을 하였는데 성의 형태가 흡사 초생달 모양으로 생겼다고 해서 ‘신월성(新月城)’이라 불렀으며, 왕이 거처하는 성이라 하여 ‘재성(在城)’이라고도 하였다. 월성의 둘레는 1,841m이며, 성내 면적은 55,000여 평에 달하며, 9개소의 문지가 남아 있다. 성내에서 현존하는 유구는 아직 상세하게 밝혀지지 않은 상태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문무왕 때부터는 월성의 범위가 훨씬 넓게 확대된 것 같으며, 강무전(講武殿), 좌사록관(左司祿館), 동궁(東宮), 고문(庫門), 귀정문(歸正門) 등 많은 전각과 궁문 등이 이 때를 전후하여 세워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신라 궁성(宮城)의 범위를 첨성대(瞻星臺) 부근과 월성의 남동쪽 국립경주박물관 자리까지를 포함하여야 한다는 견해가 대두되고 있다.

발해 궁성(渤海 宮城)은 남-북으로 놓인 장방형으로 전체 둘레는 2,680m이며, 동서성벽의 길이는 720m, 남북성벽의 길이는 620m이다. 궁성 내에 궁전터와 우물터 등의 유지가 남아있다. 궁전터는 7개소가 확인되고 있는데, ‘오중전(五重殿)’이라 불리우는 5개소의 궁전은 궁성 남문과 북문을 잇는 중심축선상에 놓여 있으며, 그 규모도 매우 웅장하다. 그 중 제1궁전터와 제2궁전터가 가장 웅장한데 제1궁전터는 길이(동-서), 너비(남-북), 높이가 56×25×3m이며, 제2궁전터는 가장 규모가 큰 것으로 길이, 너비가 82×28m에 달한다.

제4궁전터는 중심에 있는 본채와 그 좌우에 있는 곁채의 3개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본채는 21.6×15m로 밖으로는 회랑을 두르고, 안에는 동서로 이어지는 3개의 방이 있다. 좌우 곁채의 규모는 같으며, 27×15m의 9칸짜리 건물이다. 본채와 마찬가지로 동서로 이어지는 3개의 방으로 이루어졌는데 모두 온돌장치를 하였으며, 구들의 골은 2개이고, 높이는 0.33m이다. 또한 제2궁전터의 동쪽과 서쪽에서 2개소의 우물터가 확인되었는데, 횡단면이 8각형을 이루고 있는 8각정(8角井)으로 그 입구의 직경은 약 0.66m이며, 현존 깊이는 5.6m이다.

고려시대 궁성(高麗時代 宮城)은 개경에 정궁, 이궁, 별궁이 건설되었고, 서경이 중시되어 대화궁이 건설되었으며, 몽고의 침입 시에는 고종 19년(1232) 초에 강도(江都:강화도)에 궁궐을 건설하여 도읍을 옮겼으며 1270년까지 정궁과 같은 기능을 수행하였다.

개경의 궁성 정문은 도시의 기본 간선축과 일치하지 않고 주요 간선가로와 직각으로 꺾여지는 도로의 축상에 배치되었다. 궁궐의 중심이 되는 외전·내전·침전 등의 건물군도 남북의 동일 중심축에 배치되지 않았다. 만월대의 궁궐 특징은 평지가 아닌 구릉지대에 건물을 배치한 점이며, 정전까지는 기하학적으로 구성하면서 주변 건물들은 비교적 경사지에 자연 지형에 따라 자유롭게 배치하였다.

그리고 고려 초부터 유행된 지리도참설에 따라 건물의 규모는 작았으나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한편 고려시대에는 궁중원림이 크게 발전하였다. 인공으로 물을 끌어들여 못을 만들고 시냇물과 폭포를 만들었으며, 누정을 짓고 가산을 만들었으며, 대를 쌓고 기묘한 송죽과 화초를 심어 원림을 조성하였다.

조선시대 궁성(朝鮮時代 宮城)으로 대표적인 것은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경운궁) 등이다. 경복궁은 이들 중 정궁(正宮)으로서 주위에 궁장을 쌓아 전체 평면이 남-북을 장축으로 하는 장방형을 이루고 있으며, 정남 중앙에 광화문(光化門)을 설치하고, 동쪽에는 건춘문(建春文), 서쪽에는 영추문(迎秋門), 북쪽에는 신무문(神武門)을 배치하였다. 광화문에서 근정전과 사정전, 강녕전, 교태전까지의 중요 건물이 남북 중심축상에 배치되고 좌우 일곽들이 대칭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경복궁의 후원은 궁역 서쪽의 경회루지역과 궁역 북쪽의 향원정지역으로 나누어 조영하였다.

창덕궁(昌德宮)은 태종 5년에 창건되었으며, 경복궁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고 하여 일명 동궐(東闕)이라 하였다. 임진왜란 때 전소된 것을 광해군 3년에 중건하였으며, 정전(正殿)인 인정전(仁政殿)이 순조 3년에 재차 화재를 입어 그 이듬해(1804)에 중건된 것이 현재 남아 있다. 창덕궁은 다른 궁궐과는 대조적으로 자연적인 지형과 산세에 따라 전각을 배치하고 자연과 인공의 융합을 무리 없이 조화시킨 점에 그 특징이 있다. 후원(後苑)인 비원은 누각과 정사들이 자연 경관과 조화를 이루고 있어 조선시대 궁궐의 대표적인 정원으로 꼽히고 있다.

창경궁(昌慶宮)은 1483년 고려 수강궁지(壽康宮址)에 세운 궁궐로 창덕궁 동측에 위치하며, 임진왜란 때 전소한 것을 1616년 다시 중건한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창경궁은 정전인 명정전(明政殿) 일곽이 궁궐배치의 기본형식인 남향배치가 아닌 동향이고, 중심축인 동서축보다 남북축이 더욱 길어 특징적이다. 그러나 그 밖의 건물들은 이 주축과는 관계없는 비대칭의 배치를 이루고 있다. 밝고 높은 언덕인 통명전 언덕과 북쪽의 환취정을 중심으로 후원이 형성되어 있다.

덕수궁(德壽宮)은 처음부터 궁으로 조성된 것이 아니고 왕족의 사저로 쓰이던 것을 궁으로 개조한 것이다. 이 궁이 본격적으로 궁의 모습을 갖춘 것은 고종이 궁궐로 사용하면서부터이다. 덕수궁의 배치를 보면 남북 중심축 상에 정전인 중화전(中和殿)을 비롯하여 석어당, 즉조당, 대한문 등이 있는데, 다른 궁궐에 비하여 궁장을 두른 기지나 내전의 여러 전각배치가 산만한 감이 있다. 이는 덕수궁이 원래 민가 가옥이었던 것을 궁궐로 용도를 변경시킨 이유와 임진왜란의 피난에서 환도하여 일시 궁궐로서 거처하였던 탓이라 생각된다.

이를 볼 때, 한국 궁성의 공간 배치와 건물형태는 발해의 예를 제외하고는 중국에서의 인위적인 공간 구성과는 다르게 자연 지형에 순응하면서 조화를 이룬 독창성이 발휘된 것이라 하겠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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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건축사 1(리화선,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198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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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公山城(安承周, 公州師範大學 百濟文化硏究所, 1982년)
  • 韓國建築史(尹張燮, 197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