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활성

명활성

[ 慶州 明活城 ]

지역 경주

경주시 동쪽의 보문저수지 남쪽편에 위치한 명활산(明活山)의 북쪽 봉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둘레 약 4.7㎞의 포곡식석성과 남쪽 산 정상부를 감싼 길이 약 5㎞의 테뫼식토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성은 금성(金城), 월성(月城)과 함께 신라시대의 왕들이 거쳐했던 궁성(宮城)으로 알려져 있으며, 남쪽의 토성을 제외한 석성만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명활성의 초축연대는 실성왕(實聖王, 405년) 이전이며 이때의 성곽은 토성이었음이 밝혀졌는데, 성체의 구성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는 아직 조사된 바가 없어 현재로서는 불명이다. 그러나 1988년 명활성 축조의 결정적인 자료인 명활산성작성비(明活山城作城碑)가 발견되어 석성으로 개축한 것이 명활산성작성비의 신미년(辛未年)에 해당하는 진흥왕 12년(551)으로 밝혀졌다. 이 성에 대한 조사는 1988년 9월 태풍으로 인하여 붕괴된 북벽부분의 성벽을 복원함과 동시에 배수시설을 마련하여 성벽의 재붕괴(再崩壞)를 방지하기 위하여 1989년 6월 문화재연구소 경주고적발굴조사단에 의하여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명활성의 석축산성은 북쪽 산정의 속칭 ‘흰등산(해발 252m)’과 그 서쪽에 별도로 솟아 있는 ‘장군봉’을 감싼 포곡식으로, 그 길이는 4,741m, 성 내부의 전체 면적은 760,625㎡에 달한다. 성벽은 대부분이 무너졌는데 장군봉 부근 성벽은 현재 높이 11.0m, 폭 3m, 길이 8m 정도가 남아 있으며, 흰등산 북쪽 성벽은 현재 높이 1.8m, 폭 3.7m, 길이 3m 정도 남아 있다. 성석(城石)은 25-55㎝×20-45㎝ 크기의 화강암 석재를 약간 가공한 것인데 남산 신성(南山 新城)과 같이 정연하지는 않으나 대충 단을 이루면서 내외면을 쌓고, 안쪽 속채움은 토사가 전혀 없는 잡석만을 이용하여 구축하였다. 그리고 성벽의 내측에는 폭 약 4m 내외의 통로를 두었다.

명활성의 체성(體城)은 협축(夾築)에 의한 축조기법으로 구축하였으며, 북편의 서쪽측벽에서 노출된 외벽의 잔존상태는 대부분이 붕괴되어 일정하지 않았는데 조사갱의 동편 확장 부분의 약 2m 범위에 걸쳐서는 성체 외벽이 약 1.5m 높이로 7단 정도의 층급이 남아 있었다. 외벽의 축조는 모양이나 크기가 일정치 않지만 대개 15-30㎝ 정도 높이에 30-70㎝ 정도 길이의 장방형(長方形) 깬돌(割石)을 이용하여 바깥 면을 잘 맞추어 거의 수직(垂直)에 가깝게 바른층쌓기로 축조하였으며, 벽석(壁石) 사이의 생긴 틈에는 쐐기돌과 점토(粘土)를 채워 마무리하였다. 그리하여 성체의 안쪽으로는 적심부에 채웠던 깬돌과 모래 섞인 점토층이 노출되었다.

내벽의 기저부는 외벽보다 1m 정도 높은 위치에서 나타났으며 외벽과는 달리 사질토 위에 지대석을 놓고 그 위에 성벽을 축조하였는데, 약 3.5m 높이의 21단까지는 토층에 묻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내벽은 대체로 높이 10-30㎝, 길이 30-40㎝ 크기의 깬돌을 이용하여 바른층쌓기로 수직에 가깝게 축조하였으며, 그 틈 사이는 깬돌 조각과 진흙으로 메웠는데, 그 높이는 45단 이상으로 8m에 달하였다. 깬돌 사이의 틈에 쐐기박음처럼 깬돌 조각을 넣었던 것은 수평을 조정하는 목적과 틈을 메우는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고 여겨진다. 성벽의 규모는 붕괴부분 서편의 내벽 정부(頂部)에서 노출된 점토피복층(粘土被覆層)의 상부를 기준으로 외벽은 약 10m, 내벽은 약 9m 높이로 추정되며, 성벽의 두께는 12.3m로 보축벽을 포함하면 15.3m로 확인되었다.

북벽의 서쪽측벽에서 확인된 기단보축은 석벽의 하단부에서부터 성체 외벽에 연결되는 부분까지의 높이가 3.9m로 확인되었는데 지상에 노출된 보축벽의 높이는 2m에 달하였다. 기초부는 수직으로 축조되었으며 그 윗 부분부터는 50-55˚ 정도의 경사를 이루고 있어 제형단면(梯形斷面)을 형성하고 있다. 보축벽의 두께는 노출된 성체 외벽의 하단부를 기준으로 하단부에서 2.8m, 지상에 노출된 중간부분에서 2.2m, 상단부에서 0.8m를 나타내고 있다. 북벽 동쪽측벽의 이중으로 보축된 부분에서는 벽면의 축조수법이 서쪽측벽의 수법과 서로 다른 양상임을 파악할 수 있다.

즉, 가장 바깥쪽의 보축에서는 석재 자체의 외면이 기울기를 갖는 석재가 아니고 대략 장방형의 면을 가지는 석재로 다듬어진 모습이 완연하고, 축석에 있어서도 아랫단에서 윗단으로 오르면서 약간씩 내측으로 들여서 축조하여 벽면의 기울기를 형성하였다. 체성의 하단에는 체성에 잇대어서 저면 너비 3m, 높이 3.64m의 보축이 시설되어 있으며, 벽면의 기울기는 동쪽측벽의 토층상에서 83-84˚인데 반하여 보축부분은 기울기가 69-70˚를 나타내고 있다.

명활성에서는 집수시설(集水施設)로 보이는 석축유구와 이곳에서부터 성벽을 통해 성 밖으로 배수처리가 되도록 설치한 수구의 일부를 확인하였는데, 집수구(集水口) 2개소는 모두 타원상으로 장경(長徑) 3m 내외, 단경(短徑) 1.5m 내외, 깊이 2.5m 정도의 규모이다. 이 집수구는 네모난 깬돌과 냇돌을 이용하여 9-10단을 쌓고 북쪽으로 폭 0.3-0.4m, 깊이 1m 크기의 사다리꼴 모양의 입수구(入水口)를 각각 만들었다. 조사 당시 입구는 돌과 흙으로 막혀 있었으며 입구의 바닥은 내벽의 밑뿌리보다 약 2.5m 정도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 성벽 중간을 통과하여 계단식으로 경사를 이루며 성벽 밖까지 설치된 것으로 판단되나 외벽에서는 출수구(出水口)가 확인되지 않았다.

한편, 북벽의 붕괴부분 서쪽측벽의 외벽부분에 설정한 조사갱을 외벽의 보축벽에서부터 28m 북쪽으로 연장하여 조사한 결과, 해자(垓字)의 흔적이 일부 확인되었다. 조사갱 안에서는 성벽 외벽의 보축벽 하단부에서 북쪽으로 약 16m 떨어진 지점에서 해자의 호안석축(護岸石築)으로 추정되는 천석열(川石列)이 일부 노출되었는데 이 석열을 중심으로 성벽쪽으로는 잔자갈이 조밀하게 깔린 사질토층이 노출되었으며 바깥쪽으로는 흑색의 뻘층이 노출되어 있었다. 이 뻘층의 북쪽 한계를 확인하지 못해 전체 폭은 알 수 없으나 성 바깥쪽으로 상당히 넓은 폭으로 해자가 형성되어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발굴조사가 성벽의 붕괴지점을 중심으로 좌우 성벽부분에 한정하여 실시된 관계로 성벽 축조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고, 성벽 주위에서 작은항아리(小壺) 1점, 굽다리접시(高杯) 1점, 굽다리바리(臺附小鉢) 1점, 작은바리(小鉢) 1점 등의 토기와 자기소완(磁器小盌) 1점 외에 다량의 기와편 및 토기편과 성벽 내부에서 형태를 알 수 없는 쇠편(鐵片)들이 수습되었다.

명활성 내벽 입면도

명활성 내벽 입면도

참고문헌

  • 慶州 南山新城考(朴方龍, 東亞大學校大學院 碩士學位論文, 1993년)
  • 明活城-緊急發掘調査報告書(慶州古蹟發掘調査團·慶州市, 199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