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 신성

남산 신성

[ 慶州 南山 新城 ]

지역 경주

남산 신성은 경상북도 경주시의 남쪽 교외에 솟아 있는 표고 486m인 남산에 축조되어 있는 포곡식산성(包谷式山城)으로 전체 둘레는 5,137m, 성내 면적은 7,882,163㎡에 달한다. 이 산성의 초축연대에 대하여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진평왕 13년 신해(辛亥 : 591) 7월에 축조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와 관련하여 최근 제9비가 발견된 지점의 외성벽 하단 기초부는 이 비석의 제작연도인 신해년(591) 당시의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라는 견해도 기록을 뒷받침하고 있다. 또한 『삼국사기(三國史記)』의 문무왕 19년(679)에 증축하였다는 기록은 축성된 지 약 90년이 경과한 시점에 개축의 필요성에 따라 대대적으로 수축하여, 기초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성벽을 이때 개축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문헌기록을 종합하여 볼 때 이 산성은 591년 초축시에는 하나의 나성 역할에 불과했을 뿐이었으나, 문무왕 3년(663)에 장창(長倉)을 만들고 679년에 대대적으로 증축한 사실은 남산 신성이 정궁(正宮)인 월성의 기능을 보조하는 중요한 위치를 점하게 되었음을 보여 준다고 하겠다. 그리고 일부분에서는 초축, 개축과 별도로 통일신라 후반기 어느 때에 보축(補築)한 흔적도 보이고 있어서 성벽은 크게 3회에 걸친 축조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이 산성은 신라왕조와 운명을 같이하여 이용되다가 고려시대에 폐성되었다.

이 산성의 성벽 중 가장 잔존상태가 양호한 곳은 남벽과 동벽 및 북벽의 일부이다. 축조수법은 적심하여 외축하는 기법이 주종을 이루고 있으나 골짜기나 비교적 지형이 낮은 서벽에서는 내외협축(內外夾築)하여 축조하였다. 성벽의 축조에 사용된 석재는 대부분 화강암을 떼어낸 것을 사용하였다. 성벽 내부에는 3m 너비의 내호로 보이는 통로가 형성되어 있다. 남산 신성비 중 완전한 상태로 원래의 자리에서 발견된 것은 제9비인데 다행히 이 비석자리의 외성벽 기초부가 남아 있어서 초축시의 수법을 살필 수 있다.

이 성벽에서는 지금 4단 정도의 축석밖에 볼 수 없지만 바위 같은 큰 석괴(石塊)를 1차 가공하여 석재의 앞면을 떼어내거나 편평한 자연면을 그대로 이용하여 거의 수직에 가깝도록 정연하게 축조하였다. 수평을 유지하면서 쌓는 이른바 횡선평적(橫線平積)의 기법으로 축조하였는데, 외면의 면석 사이에는 잔돌을 끼우지 않았으며, 각층마다 줄눈이 일렬이 아닌 어긋나기로 된 가로쌓기와 세로쌓기를 교차하여 축조하였다. 성벽의 적심부는 매몰되어 알 수 없다. 현재 무너진 쪽을 보면 약간의 적심석이 보이고 있으나 흙이 주종을 이루고 있는 점으로 보아 진흙과 석재를 섞어서 적심한 것으로 추정된다. 성벽 축조에 사용된 성석(城石)의 외면 크기는 폭 25㎝(소), 45㎝(중), 82㎝(대)이며 중형이 대부분이고, 두께는 21-25㎝이다.

이 산성에서 확인된 문지(門址)는 모두 6개소로 동·서·남·북·동남·서남문이 시설되었다. 동문지는 남산 탑골(塔谷) 마애조상군(磨崖彫像群)이 있는 옥룡암(玉龍庵)으로 이어지는 통로상에 있는데, 대부분이 파괴되어 그 구조를 파악하기 힘들다. 이 문지의 측벽은 석축이 3단 정도 남아 있어 그 높이가 50-60㎝ 가까이 된다. 탑골 마애조상군에서 왼쪽으로 가면 ‘주눅골’이 되는데, 이 주눅골쪽 성벽에서 가장 많이 돌출된 곳에 동남문지가 있다. 이 문지는 성벽의 폭과 거의 같은 규모인 4.5m 너비로 측벽을 축조하였는데, 문지의 폭은 4m 정도이다.

남문지는 해목령(蟹目嶺)에서 전망대로 가는 남산 순환도로와 연결되는 성벽에 위치하고 있으며 문 폭은 5m인데, 이 부근에서 다량의 신라시대 기와편이 발견되고 있어 문루가 시설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서남문지의 문 폭은 3m 정도이다. 서문지는 성내에서 가장 낮은 지형에 위치하고 있으며, 부근에 상당히 넓은 평지가 전개되고 있어서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중요한 지역이다. 북문지는 이 산성의 정문으로 성문 가운데 월성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장창지(長倉址)로 통하는 근거리의 성문이다. 이 문지의 양 측벽은 육축(陸築)하여 그 너비가 7m에 달하며, 높이는 동쪽 측벽이 7m, 서쪽측벽이 약 5m를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이 산성에서는 8개소의 수구시설이 확인되고 있다.

이 산성 내에는 22개소의 망대가 확인되고 있으며, 동쪽과 남쪽에서 18개소가 일정한 간격으로 밀집되어 나타났고, 서북쪽에서는 4개소가 확인되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 문무왕 19년(679)조에는 “동궁(東宮)을 만들고 궁궐과 궁부를 지어 국왕의 권위를 새롭게 하였으며, 호국사찰인 사천왕사(四天王寺)를 만들면서 남산성(南山城)을 증축하였다”고 하였는데, 이는 소규모 공사가 아니라 성벽의 하부을 제외한 나머지를 덧붙여 쌓은 큰 규모의 공사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성곽에서 비교적 잘 남은 성벽은 바로 이때 축조한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 잔존상태가 양호한 곳은 제7망대와 8망대 사이의 외성벽으로 높이 8단, 길이 약 10m 정도이다. 이 부분의 성벽은 횡선평적(橫線平積)과 종횡교적(縱橫交積)이 잘 지켜진 정연한 축조기법을 보이고 있으며, 성석은 앞면을 조금씩 손질하고 편평한 쪽은 그대로 사용하였다. 이 성석의 크기는 폭이 26㎝(소), 47㎝(중), 58㎝(대)인데 대부분이 중형이며, 두께는 18-20㎝로 얇다. 성벽 단면은 위쪽이 하부에 비해 안으로 내경(內頃)한 편이나 거의 직선에 가깝다.

이 성곽의 성벽을 증축·개축·수축한 기록은 문무왕 19년(679)에 1번 보일 뿐이나 홍수 등으로 인한 피해를 입기 쉬운 수구 부근 같은 곳은 여러 차례 보축하였을 것으로 보이는데, 수구(水口)의 내성벽도 초축·증축시의 축성수법과 다른 조면축조(粗面築造)이며 성석도 크기가 일정하지 않고 무너진 성석을 이용하여 조잡하게 축조하였다.

참고문헌

  • 慶州 南山新城考(朴方龍, 東亞大學校大學院 碩士學位論文, 199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