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비도성

사비도성

[ 泗沘都城 ]

부소산성(扶蘇山城) : 부소산성은 군창지 소재 테뫼식산성과 사비루 소재 테뫼식산성, 그리고 이를 둘러 싸고 있는 포곡식산성으로 이루어져 있는 복합식산성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부여문화재연구소에서 1993~1994연에 걸쳐 실시된 발굴조사 결과 군창지 소재 테뫼식산성은 통일신라시대의 축성으로 밝혀졌으며, 이 군창지 소재 테뫼식산성을 2구로 구분하기 위하여 남~북으로 축조된 성벽은 조선시대의 축성으로 보고되고 있고, 1996년에 조사된 사비루 소재 테뫼식산성도 통일신라시대에 축조한 것으로 밝혀지고 있어 백제시대에 축조된 성체는 포곡식산성 뿐이었음이 밝혀지게 되었다. 이 포곡식산성 토루의 전체 길이는 토루 외곽선을 기준으로 하여 2,495m로 나타났고, 통일신라시대에 초축 또는 보완된 테뫼식산성 토루는 1,576m, 군창지를 둘러싼 테뫼식산성 토루는 840m로 확인되고 있다.

백제시대에 초축(初築)한 판축토루(版築土壘)의 기초부는 원칙적으로 부소산의 생토면인 풍화암반층을 바닥으로 하였으며, 경사면이 있는 지형은 판축 기초부의 휩쓸림을 방지하고 판축을 용이하게 구축하기 위하여 0.3~0.6m 안팎의 밝은 황갈색 마사토(磨砂土)를 사용하여 단일층으로 성토한 후 그 상층에 본격적인 판축기법으로 쌓아 올렸다. 따라서 이 판축층의 기초부는 생토면인 풍화암반층을 기저부로 이용하였으며, 성벽 안쪽의 흙을 파서 성 내벽쪽에 호(壕)를 만든 한편 그 파낸 흙을 성 내벽에 보축하였다.

그러나 성외측의 경우는 풍화 암반층에 ‘U’자형 구(溝)를 마련하였는데, 이 구의 폭은 0.55~0.65m, 깊이는 경사면에 마련하여 일정치는 않으나 성외측의 경우 0.25m, 성내측에는 0.55m 정도이다. 그리고 성외부측과 성내측에 대칭되게 일정한 간격으로 목주공(木柱孔)을 마련하였다. 이 목주공은 구(溝) 중앙에 1.25m 정도의 간격마다 배치된 듯하다. 이 목주공은 구(溝)보다 0.1~0.2m 정도 깊고 넓게 굴착되었고, 그 내부에는 1-3기 정도의 할석편이 놓여 있었다. 초기 중심토루인 판축층의 경계면은 동으로는 성외측의 목주공 중심부에서 경계면을 이루고, 서측으로는 성내측 목주공 중심부에서 판축층 경계벽면이 수직으로 경계면을 이루고 있었다.

동·서 목주공간의 거리는 일정하지는 않으나 5.8~6.4m 정도인데 이 거리가 초기 판축토루의 폭을 나타낸다. 조사결과 이 판축층은 일시에 판축을 하지 않고 2회에 걸쳐 나누어 판축을 한 곳이 확인되었다. 이 구간의 경우 초기 판축 바닥층 너비는 5.8m인데, 성내측(너비 3.6m)을 먼저 판축기법으로 쌓고 성외측(너비 2.2m)을 후에 축조하였다.

초기 판축토루 내부 상층에서는 토루를 횡(橫)으로 가로지르는 횡장목공(橫長木孔)이 상·하 2단으로 노출되었다. 상단과 하단의 각 구멍은 그 간격에 있어 목주의 간격과 거의 비슷하나, 상단 구멍과 하단 구멍의 상하 관계는 서로 엇갈려 배치되어 상하 수직으로 나타나지는 않았다.

또한 이 구멍들의 모양은 단면상 정방형(正方形)에 가까웠으나 그렇지 않은 직사각형 형태도 조사되었는데, 모두 각재를 사용한 횡장목으로 그 크기에 있어서도 일정하지는 않았다. 이 횡장목공의 크기는 지름이 19·22·30㎝ 등 다양하며, 길이는 최고 2.4m에 이르는 예도 발견되었다.

횡장목공의 위치는 잔존한 초기 판축 중심토루의 상면에서만 주로 노출되었고, 하단 횡장목공은 상면의 횡장목공에서 0.35~0.4m 정도 아래에서 노출되었다. 따라서 노출된 횡장목공의 위치로 본 횡장목의 쓰임새는 판축층의 중간층보다 더 높은 층에서만 사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토루 판축기법에서는 기본적으로 중심토루의 동단, 서단의 경계지점에 토루를 따라 1.2~1.3m 간격마다 목주공이 배치되었고, 중심토루 판축 중에서 횡장목공과 종장목공(從長木孔)이 발견됨으로서 판축 구축시에 목주와 장목(長木)을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외측 목주공에서 드러난 수직 토층선에서 나타난 토층으로 보아, 목주공에는 ‘U’자형의 홈을 마련한 후 판목을 끼워 넣어 아래층부터 판축공법으로 한층씩 흙을 다지고, 판목 높이만큼 다져지면 다시 판목을 올린 후 그 윗층을 다졌을 것으로 판단된다.

포곡식산성에는 동·서·남·북의 4개소에 성문이 시설되어 있을 것으로 판단되는데, 북문지는 백제도읍기 당시의 부소산성에서 이곳을 빠져나가면 곧바로 백마강 포구에 연결되어 평상시 뿐만 아니라 유사시에는 이곳이 비상구로 사용했음을 짐작할 수 있으나, 앞에서와 같이 파괴되어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없는 상태이다. 현재 동문지와 남문지가 조사되었는데, 동·서 두 문지는 부소산성에서 좌우 양편으로 나성과 연결되는 지점의 안쪽에 근접해서 위치하고 있다. 따라서 나성 외부로부터 직접 산성으로 들어올 수는 없게 되어 있다.

동문지는 처음 조사시 외형상 4.5m 정도 절개되어, 문지로 판단된 곳은 통일신라에 들어와 토루를 헐어낸 후 문으로 개조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 후대 문지에서 토루를 따라 0.9m되는 지점에 너비 10m 정도의 절개지가 다시 드러나는데 발굴조사 결과 이 지역에서 백제 구지표(舊地表)와 함께 문초석으로 판단되는 가로 0.65m, 세로 1m의 방형초석(方形礎石)이 적심석 위에 정연한 상태로 1기가 바르게 놓여 있었다. 이 문초석의 상면 중앙에는 0.15m 정도의 너비와 깊이를 가진 구멍이 뚫려 있으며, 구멍의 동·서측에는 철심이 박혀 있었다. 특히 동측 철심은 0.3m 정도 높이로 그대로 남아 있었다. 반대편에는 직경 0.55m의 원형초석이 있는데 이것은 원위치에 있었던 것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이를 볼 때 이 문지가 백제시대의 동문지로 판단된다. 또한 백제 동문지 주변에서는 다량의 기와와 수막새, 철제못, 문고리, 투겁형의 무기류, 찰갑편(札甲片) 등의 유물이 다양하게 출토되었다.

주변지형을 보아서도 이곳 백제시대에 시설된 동문지는 토루를 빠져나가면 작은 계곡 또는 완만한 지형이 평지까지 이어져 문지로서의 호조건을 갖추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한편 1991년 조사시에는 이 동문지 부근에서 ‘대통(大通)’의 두 글자가 새겨진 인각명와편(印刻銘瓦片) 1점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공주 대통사지(大通寺址)에서 출토된 유물과 똑같은 문자기와이다. 원형의 윤곽안에 우서(右書)로 양각되었다. 대통사는 『삼국유사(三國遺事)』 권3 원종흥법조에 ‘우어대통원년정미 위량제창사어웅천주 명사통사(又於大通元年丁未 爲梁帝創寺於熊川州 名大通寺)’라고 그 유래가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이 중국 양나라의 대통원년(성왕 5년, 527)에 창건되었음이 확실한 사찰이다. 부소산성 내부에서 발견된 이 와편은 신왕도의 조영을 위하여 웅진지방의 건축자재들이 수송되었다는 것을 밝혀주는 것으로서 538년 사비로 천도하기 이전에 사전 준비한 사실을 엿볼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자료라고 하겠다.

포곡식산성의 남문지는 삼충사(三忠祠) 뒷편에 위치하고 있으며 정문으로 파악되는데, 1986·87년에 국립문화재연구소에 의하여 발굴조사된 바 있다. 남문지는 약간 서남향하여 정면 1칸, 측면 1칸(약 3.3m)의 규모로 구성되었고, 문지 밖에서 성내로 들어가는 입구 전면에는 5단의 계단이 시설되어 있었고 이 계단 전면에는 작은 돌들을 깔아 놓았다. 이 계단의 규모는 폭 2.2m, 길이는 5.4m인데 각 계단의 높이는 0.1~0.15m, 계단 상면의 너비는 0.4~0.5m 정도이다. 문지의 폭은 4.5m로 이곳에는 0.7×0.7m, 0.8×0.8m인 2개의 방형 초석이 있는데 동편 초석은 이동되어온 것으로 보인다. 그밖에 문지석이나 이 문의 구체적인 상부구조를 밝혀주는 자료는 얻지 못하였으나, 암거(暗渠)와 도수관(導水管) 등이 발견되었다. 최근에 이 부소산성을 동성왕 8년(486)에 축조한 바 있는 우두성(牛頭城)에 비정하는 설이 대두되고 있다.

나성(羅城) : 나성은 부소산성을 기점으로 하여 그 동쪽으로 뻗어 내려 청산성(靑山城)을 경유하여 석목리(石木里)에 이르는 북나성(北羅城), 능산리(陵山里)의 서쪽 산을 타고 내려 필서봉(筆書峰)을 경유 백마강에 이르는 동나성(東羅城), 부소산의 서록(西麓)에서 뻗어 내려 백마강의 자연제방을 따라 구아리(舊衙里), 구교리(舊校里), 동남리(東南里)에 거쳐 군수리(軍守里)에 이르는 서나성(西羅城), 그리고 최근에 그 존재가 논란되고 있는 궁남지(宮南池)에서 동쪽으로 이어져 중정리(中井里)에 이르는 남나성(南羅城) 등으로 구분하여 부르고 있으나, 현재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부소산성을 기점으로 하여 동남쪽으로 우회하는 동나성과 백마강의 유선(流線)과 평행하게 서남쪽으로 연결되는 서나성이 있다.

남쪽은 백마강에 면하고 있으므로 나성이 축조되지 않았다. 이 나성은 대부분이 구릉을 이용해서 축조된 것을 가장 큰 특징으로 삼을 수 있는데, 동나성은 높은 구릉과 평지를 교차하며 축조되어 있고 서나성은 백마강을 따라 이어지는 낮은 구릉 위에 축조되어 있으며, 전체 길이는 약 8㎞에 달한다. 구릉과 구릉사이에서 평지를 통과하는 부분이 3개소가 있는데 지금은 시가지의 개발과 농경지의 조성으로 말미암아 평지 나성은 모두 파괴 멸실되었다. 나성 내부에는 부여시가지와 금성산 그리고 적지 않은 면적의 농경지가 포함된다.

동나성은 이 청산성을 경유한 후 동남쪽으로 방향을 돌리게 된다. 이 청산성을 나성에 포함시키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목적이 있었겠지만 사비도성의 북쪽 방면을 감시하고 방어하기에 더욱 유리할 뿐만 아니라 나성 내의 시가지 및 농경지의 면적을 더 넓힐 수 있는 장점도 내포하고 있다고 하겠다. 청산성과 나성과의 연결부분을 보면 나성이 청산성 북벽의 중앙보다 약간 동쪽으로 치우친 곳에 접속되어 있어 동일시기에 축조되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하겠다.

나성을 출입하는 성문으로서는 동문과 서문이 있다. 서문지로 추측되는 곳은 백제대교 남쪽으로 약 400m의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데 부여(扶餘)에서 서쪽으로 홍산(鴻山), 서천방면(舒川方面)에 이르는 가장 중요한 도하점(渡河點)에 면하고 있다. 동남리 사지(東南里 寺址) 전면을 동서로 통과하는 구도로는 이곳에 도달하고 있다. 그리고 문지로 생각되는 곳은 나성이 안쪽으로 굴곡되면서 ‘U’자형을 이루고 있는데 이것은 다음에 말할 동문지의 입지방법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북·서·남의 3면이 백마강으로 둘러 쌓여 있는 사비나성의 정문은 동쪽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하겠다. 또 나성의 동벽 밖에는 왕릉묘역(王陵墓域)이 자리잡고 있으므로 능행(陵幸)에 이용되던 성문이 반드시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현재 논산-부여간 국도는 능산리의 왕릉 소재지 전면을 통과하고 있다.

동·서 2개소의 성문 이외에 구도읍(舊都邑)인 웅진(熊津)으로부터 사비도성에 이르는 동북문과 그리고 부소산 기슭에 위치한 고성진(古省津), 즉 현재의 구드래나루로 이르는 서북문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그 자리는 지금 확인하기가 힘들다. 고성진은 ‘구드래’라는 이름을 한자로 표기한 것으로 믿어지는데 대중·일 외항선박들이 도착할 수 있는 중요한 선착장이었다고 생각된다.

나성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조사는 1991년부터 1993년에 걸쳐 이루어졌으며 그 결과 성벽의 외부 기슭에는 호성석축(護城石築)이 축조된 사실이 밝혀지게 되었다. 이 호성석축은 부분에 따라서는 높이가 2m를 넘었으며 그 규모는 웬만한 석축산성의 성벽과 비교해서 손색이 없다고 할 수 있다.

부여 나성의 구조는 호성석축이 수반된 토축성벽으로 규정할 수 있으나 그 축조방법은 부분에 따라 적지 않은 차이가 나타나 있다. 특히 구릉과 평지에서는 서로 다른 축조방법이 채택되어 있는 사실이 주목된다. 구릉지대에 구축된 나성의 구조는 판축 또는 판축에 준한 기법으로 축조되었으니, 필서봉 북록(北麓)의 낮은 구릉에서 조사된 바로는 성벽 전체의 높이는 4.9m, 기저부의 넓이는 약 16m, 호성석축의 높이는 2.5m인데 약 60˚로 경사되었다. 대략 장방형(長方形)을 이루고 있는 석괴(石塊)를 바른층쌓기로 구축하였는데 제일 잘 남아 있는 곳에서는 그것이 9단으로 축조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석괴들의 크기는 길이가 30~60㎝이고, 높이는 20~45㎝이다. 석벽 뒷면에는 크고 작은 막돌들을 채워 보강하였는데 이 적심부의 범위는 약 2.9m의 두께를 이루고 있다.

이에 대하여 평지에서 조사된 나성의 구조는 성체가 흙으로 성토된 점에서 차이가 없었으나 내부의 구축방법에서 산성과는 계통을 달리하는 제방축조술(堤防築造術)이 응용된 것으로 보인다. 즉 평지 나성의 내부구조는 판축과는 다른 별개의 방법으로 성토되었는데, 토층 사이사이에서 흑색 탄화목층(炭化木層)이 발견되었다. 이 탄화목층에는 직경이 5~10㎝ 내외의 참나무 등의 나무가지가 수평으로 배열되어 있었으며 성체의 흙이 0.5m 정도 두께로 성토되었을 때마다 반복해서 그것을 깔아 놓았다. 여기에는 연한 흑회색의 점질토가 사용되었다.

이 흙은 나성 주변의 낮고 습한 지역에서 채굴된 질고 수분이 많은 흙이 사용된 것으로 짐작된다. 이와 같은 흙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그 사이사이에 나무가지를 깔면서 성토작업을 진행한 것으로 판단되는 것이다. 이러한 흑회색 점질토의 성토층은 나성의 너비에 대하여 약 1/3을 차지하고 있다. 다시 그 안쪽에 해당되는 2/3 부분에 대해서는 갈색 또는 황갈색의 점질토를 사용해서 성토하였다. 이러한 식물탄화층은 김제(金堤) 벽골제(碧骨堤)의 제방 발굴 시에 발견된 예가 있으며, 또한 백제계 이주민들에 의하여 축조된 日本 福岡縣 太宰府 유적의 거대한 수성(水城)에서도 이러한 탄화목층이 발견된 예가 있다.

평지 나성에서 지적할 수 있는 또 하나의 특징으로서 호성석축이 생략된 점을 들 수 있다. 필서봉 북쪽 기슭에서 발굴된 호성석축의 높이는 2m를 넘었는데 점차 높이가 감소되면서 평지에 걸친 말단부분은 단순한 석열로 연장된 후 완전히 없어지고 대신 기저부 외면이 적석층으로 보강된 것을 볼 수 있었는데 이러한 적석층은 부분에 따라서는 반대편인 나성 안쪽에서도 확인되었다. 나성 기저부의 너비는 22m 정도이나 위치에 따라 약간씩의 이동이 있었다. 나성 기저부의 주변에서 백제시대의 벼루와 삼족토기 등 소량의 토기파편들이 발견되었다.

동문지의 위치는 현재 논산-부여간 국도가 나성을 횡단하는 바로 그 지점에 인접해서 발견되었다. 동문지는 필서봉에서 능산리 왕릉으로 이어지는 평지의 최북단 지점에서 발견되었는데 이 문지(門址)의 외부에는 호성석축이 축조되어 그 높이가 1.5m 가량 되며 비슷한 형태로 채석된 장방형 석재들을 사용하여 정연하게 축조되었다. 성문의 너비는 9.5m이다. 그러나 이 동문지는 논산-부여간 국도에서 염창리(鹽倉里)로 갈라지는 도로의 밑부분에 매몰되어 있었기 때문에 문지 자체에 대한 발굴 조사는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이 나성의 축조시기에 대하여서는 이론이 많이 제기되고 있는데, 최근에 이 나성의 초축이 동성왕 23년 10월과 11월 사이에 동라성과 서라성이 모두 완공되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

사비성지 내성의 구조

사비성지 내성의 구조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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