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남지

궁남지

[ 扶餘 宮南池 ]

지역 부여
宮南池 出土 木造施設 遺構 平面 및 立·斷面圖

宮南池 出土 木造施設 遺構 平面 및 立·斷面圖

궁남지는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117번지 주변이며 사적이다. 궁남지의 역사는 삼국사기 백제 무왕조에 기록이 남아있다. 즉 “무왕 35년(634) 3월에 궁남에 연못을 파서 물을 20여 리나 끌어들였다. 네 언덕에는 버드나무를 심고 연못 가운데에는 섬을 만들어 방장선산을 모방하였다.” 또 같은 왕 “39년(638) 봄 3월에는 왕과 왕비가 큰 연못에 배를 띄웠다.”고 한다.

현재의 궁남지 모습은 1965년부터 1967년까지 3년간에 걸쳐 내부를 준설하고, 가장자리의 언덕은 흙을 쌓은 후, 수양버드나무를 심은 결과이다. 현존한 궁남지는 13,000여 평이며, 그 주변을 정비하는 과정에서 토사를 매몰하여 경작지로 이용한 것이다. 정비 이전의 궁남지 모습은 수만 평이 넘는 늪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궁남지에 대한 발굴조사는 1990년, 1991-1992년, 1993년에 간헐적인 조사가 있었다. 이 과정에서 인공적인 시설물을 확인하지 못하여 보다 철저한 고증작업을 하기 위하여 1995년부터 연차적으로 발굴작업을 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나타난 궁남지 내부 및 주변에서는 목조 및 점질층으로 구성된 집수장시설, 수로, 건물지 등 다양하게 조사되었다.

집수장 시설물은 궁남지 내부에서 드러난 시설물로서 길이(동-서), 너비(남-북)가 11.65×3.13m이며 가장자리를 따라 통나무를 2중으로 박아 벽체로 이용하였다. 외측벽 통나무는 1.25-1.45m 간격으로 배치하고, 내측 통나무는 0.75-0.95m 간격마다 배치하였다. 통나무 사이는 원통형나무나, 원통형나무를 세로로 켜서 사용한 것과 판자형으로 켜서 사용한 것 등이 조사되었다.

집수장 시설과 거의 접한 동편외측에는 수로시설이 남-북 방향으로 이어져 이곳에서 집수로 동편으로 물을 유입할 수 있도록 하였다. 집수장 내부의 서반부 6.3m는 깊이 1.05m 정도의 깊은 홈을 파서 물을 저장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나머지 동반부는 수로에서 유입된 물을 흘려 보낼 수 있도록 얕은 ‘∪’자형 홈을 마련하였다. 이 얕은 홈에는 인족 여러 개와 짚신 1켤레가 출토되었다.

수로의 어깨선에서는 백제 목간 1점이 드러났는데, 목간의 길이, 너비, 두께는 35×4.5×1㎝이다. 목간은 앞뒤 면에 묵서가 남아 있으며, 한 면에는“西部後巷巳達巳斯丁依活□□□丁歸人中口四下口二邁羅城法利源水田五形”, 다른 면에는“西部中部夷”로 판독되었다. 목간은 소나무로 조성하였으며, 양면을 잘 다듬었다. 상·하단은 칼로 막음처리가 완연하고, 상면에서 4.5㎝되는 지점에 지름 0.5㎝의 구멍을 관통하여 못에 걸거나 다른 목간과 함께 줄로 꿸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목간의 길이는 35㎝로서 백제시대 확인된 유적 등을 환산한 영조척이 35.05㎝와 부합하고 있다는 점에서 백제의 척 연구에도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목간의 내용은 백제 행정구역 연구에 중요한 내용을 제시하고 있는데, ‘西部後巷’과, ‘中口’ 및 ‘下口’가 이를 말해준다. 삼국사기와 중국 정사인 주서(周書), 수서(隋書), 북사(北史) 등에는 백제가 도하를 5부로 나누고, 각 부에는 5항을 두었다고 하였다. 그 동안 5부는 백제 인장와에서도 전부, 중부, 후부, 상부, 하부가 모두 확인된 바 있으나 목간에서는 처음 확인된 것이다. 특히 후항의 적기는 문헌에서만 존재한 기록을 실제 목간에서 확인한 첫 번째의 사례여서 백제 행정연구에 중요한 단서가 되었다.

그 외에도 다양한 생활용구가 출토되었는데, 목간과 거의 접하여 출토된 비경이는 길쌈하는 베틀의 한 구조물에 속한다. 참나무로 만든 이 구조물에는 길쌈하면서 생긴 실줄로 인하여 형성된 음각선이 횡으로 조밀하게 나타나 있다. 짚신은 그 동안 수 켤레가 조사되었는데, 세로 중심은 여러 가닥의 끈으로 이어지고 그 사이사이는 부들풀 같은 재료를 사용하여 짠 것이다. 사람 발자국 흔적이 나 있는 주변에서는 말의 하악골과 기타 몇 마리분의 뼈가 출토됨으로서 당시 농경과 관련하여 말을 이용했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게 되었다.

저수조 옆의 수로 어깨층에서는 백제 유엽형철화살촉(柳葉形鐵鏃) 1점이 출토되었는데 옻칠로 덮여 있었다. 같은 층위의 목재에 대한 탄소연대측정에서 A.D. 340-590년, 420-610년으로 조사되었고, 목재 58개에 대한 수종분석에서는 밤나무, 상수리나무, 느티나무, 소나무, 뽕나무, 가래나무가 확인되었다. 특히 목간 중 묵서흔은 불명하였으나 수종이 일본산인 삼나무로 조사된 사례가 있었다. 수로는 인공물을 설치하지 않은 자연형수로와 측면에 말목을 박고 나무를 횡으로 걸친 인공형수로가 조사되었다. 자연형수로는 전체적으로 말목이 존재하지 않을 뿐 인공적으로 조성한 것이었다. 자연형 수로는 넓은 경우 2.5m 내외이며 깊이는 1m가 넘는다. 서편에 치우쳐 조사된 자연형 수로는 동서로 0.7m 가량을 확인하였다. 이 동서 수로를 중심으로 남북수로가 일정한 간격으로 서로 연결되어 조사되었다.

한편 이 수로의 주변에서는 굴립주건물지가 조사되어 이러한 수로구조는 당시 주택이나 공구(工具) 만드는 공장과 관련하여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특히 남북수로 내부에서는 나무로 만든 여러 점의 삽과 가래가 출토되었는데, 이러한 형태의 가래는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부여지역에서 사용했던 곡식을 건조하고 나락과 검불을 분류하기 위하여 바람에 날려보내면서 사용되었던 것으로 드러나 주목되었다. 삽과 가래가 출토된 지역 주변에서는 많은 톱밥이 출토되었는데, 이는 이들 공구(工具)를 만들면서 생성된 것으로 나타났다.

말목을 박은 수로는 너비가 1.8m 내외, 깊이는 0.85m 정도이다. 이 수로는 말목을 박고 벽 쪽에 원통형 나무나 세로로 켠 나무를 횡으로 여러 개를 세워 벽체 흙이 수로의 안쪽으로 흐르지 않도록 배려하고 있다.

궁남지는 그 규모와 정확한 호안의 구조가 아직 밝혀지지 않았으나 앞으로 조사작업의 진행에 따라 규모와 좀 더 정확한 내용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 宮南池(國立扶餘文化財硏究所, 1999년)
  • 扶餘宮南池內部發掘調査槪報-百濟木簡出土意義와 成果(崔孟植 外, 韓國上古史學報 20, 韓國上古史學會, 1995년)
  • 扶餘宮南池 第2·3次發掘調査槪報(申光燮 外, 考古學誌 5, 199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