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간

목간

[ 木簡 ]

목간(木簡) 안압지 통일신라 8~9세기. 길이(右) 31.8cm

목간(木簡) 안압지 통일신라 8~9세기. 길이(右) 31.8cm

문서나 편지 등의 글을 일정한 모양으로 깎아 만든 나무 또는 대나무 조각에 적은 것으로, 나무에 새긴 것을 목독(木牘), 대나무에 새긴 것을 특히 죽간(竹簡)이라고 하여 양자를 구별하지만 한국에서는 아직 죽간이 발견된 사례가 없어 그냥 양자를 총칭하여 목간이라 한다.

주로 종이가 발명되기 이전 또는 널리 쓰이기 이전 그에 대신하는 용도로 널리 쓰였다. 따라서 목간의 사용과 소멸은 종이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목간은 중국의 고대유적을 비롯하여 일본의 고대유적, 인도나 로마시대의 유적에서도 발견되었다. 목간은 비록 단편적이기는 하지만 당대의 정치·사회상이 기재되어 있기 때문에 사료적 가치가 매우 크다. 특히 사료가 빈약한 한국에서는 그것이 차지하는 비중이 대단히 높다.

한국에서 목간의 존재가 처음 알려진 것은 197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였다. 이후 목간 자료가 점차 증가하면서 금석문자료와 함께 역사 복원을 위한 연구자료로 많이 활용되고 있다. 이를 중심으로 하여 정립된 하나의 학문 분야를 목간학(木簡學)이라 일컫는데,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출토된 수량이 엄청나게 많기 때문에 목간학이 상당한 수준으로 발달하였지만 한국에서는 최근에 와서야 목간 자료가 증가하고 있는 실정이어서 이제 겨우 그 문턱에 와 있다고 할 수 있다.

중국에서는 1901년 중앙아시아 지역에 대한 학술탐험가들에 의해 목간이 발견된 이래, 이후 여러 곳에서 출토되었다. 樓蘭과 敦煌 유적 등이 유명하며, 1930년대에는 한대(漢代)에 쓰여진 1만여 점의 목간이 발견됨으로써 한대사(漢代史) 연구에 활기를 띠게 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 이후 중국학자들에 의해 목간의 발굴 조사는 계속되었다. 목간은 아직 종이가 발달하기 이전 단계인 진한(秦漢)시대부터 위진(魏晋)시대에 이르기까지 죽간(竹簡)과 함께 널리 사용되었다. 중국에서는 나무에 작성된 것만을 목독, 또는 목첩(木牒)이라고도 한다. 목간은 대개 나무를 폭 약 1㎝, 길이 20-30㎝, 두께 3㎜ 정도의 긴 자 모양으로 잘라 묵서(墨書)했는데 시대마다 용도마다 그 차수가 달랐던 것 같다.

일본에서는 1961년 平城宮 유적에 대한 발굴조사에서 41편의 목간이 출토되었다. 그 이후 여러 곳에서 목간이 발견되었고, 지금까지 발견된 목간의 수는 약 20만 점가량 된다고 한다. 일본의 목간은 길이 20-40㎝, 폭은 3-5㎝ 정도이다. 1개의 목간에 많은 문자를 써넣을 필요에서 글자를 2줄 이상 쓰거나, 앞 뒤 양면에 기재하기도 하였다. 목간의 용도는 다양하였는데, 이를 크게 3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고 한다. ①관사(官司) 등의 명령·보고의 전달문서와 기록 장부류에 해당하는 문서목간(文書木簡)과 ②하찰(荷札)·조세의 물품에 붙여진 부찰(付札), ③그리고 기타의 예로 나눈다. 일본에서의 목간은 대체로 7세기를 소급하지 않고, 그 중심 연대가 대체로 8세기대의 것이다.

한국에서는 1975년 경주 안압지(雁鴨池) 발굴조사에서 51점의 목간이 출토되었다. 이들 가운데 완형(完形)에 가까운 것은 40점이었다. 목간의 길이는 긴 것은 30㎝가 넘는 것도 있으나, 대체로 9-23㎝ 사이의 것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주로 그 상단의 양면을 각각 ‘V’자형으로 절단하여 일종의 홈을 만들고 있다. 간지와 연호가 사용된 목간을 분석해 볼 때 이들의 사용 시기는 대체로 8세기 중엽쯤인 것으로 판단된다. 이는 안압지의 준설(浚渫) 및 사용 시기와 대체로 합치한다. 이 목간은 동궁(東宮) 관련의 것도 있고 일부는 안압지의 개수(改修)공사에 관련된 자료로 추측된다.

그 뒤 지금까지 10여 곳에서 목간이 출토되었다. 부여 관북리(1983), 경주 월성(月城) 해자(垓字)(1984-85), 경기도 하남시 이성산성(二聖山城)(1990-91, 2000), 함안 성산산성(城山山城)(1992-94), 경주 황남동(1994), 부여 궁남지(宮南池)(1995), 부여 쌍북리(1998) 등을 손꼽을 수 있다. 2000년까지 발견된 목간의 수를 모두 합하면 약 140여 점이 된다.

월성 해자에서 나온 약 30점의 목간에는 하찰(荷札) 목간으로 보이는 것이 있고, 관청간에 주고받은 문서로 보여지는 것들도 있다. 이성산성 출토 목간에는 무진년(戊辰年)의 연대가 기록된 신라 지방관 사이에 주고받은 문서형식의 목간이 있어, 연구자들의 많은 관심을 끌었다. 그리고 2000년에는 욕살(褥薩)이란 관명이 기록된 고구려(高句麗) 목간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고구려 지방통치 연구에 매우 긴요한 자료로 이용될 것이 틀림없다.

함안의 성산산성에서는 27점의 목간이 출토되었는데, 그 용도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그 사용시기는 대체로 6세기 후반대였다고 보고 있다. 이것의 재질은 24점이 소나무이고, 2점이 밤나무로 판명되었다. 황남동 출토 목간에는 창고와 관련된 글자가 보인다. 그리고 부여 궁남지에서 나온 목간에는 부명(部名)이 보이고 있어 백제 왕도(王都) 연구에 중요한 자료의 하나로 주목받았다. 한국에서 출토된 목간의 사용 시기는 늦어도 6세기 중엽에서 8세기 중엽에 이르는 시기였다고 볼 수 있다.

한국 고대의 목간은 아직 비록 숫자는 많지 않지만, 고대사의 정치 사회상을 밝히는 데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앞으로 목간 자료는 꾸준히 증가될 것으로 전망된다. 그러므로 이들 목간에 대한 체계적인 분석 정리는 한국고대사 분야의 자료적 한계를 극복하는 하나의 유력한 방법이 될 것이다. 고고학적으로는 동일 지역에서 발견된 유적·유물의 절대연대를 판별할 수 있는 중요한 실마리가 될 수 있다. 앞으로 목간이 연구자료로 더 부각될 수 있으려면, 목간의 재질이나 형태·크기를 분류하고, 문서의 형식이나 서체 등에 대한 종합적이며 기초적인 검토가 필요하다. 이때 하나의 목간편이라 하더라도 소홀히 해서는 안되며, 각 목간의 재질, 크기, 용도 등에 대해 정확히 파악해야 할 것이다.

그 동안 목간의 판독율이 낮다는 것이 문제로 지적되어 왔으나, 다행스럽게도 최근 적외선 촬영을 할 수 있게 됨으로써 판독력이 향상되고 있다. 앞으로 자료가 더욱 축적되고 경험이 쌓이면 판독 능력은 훨씬 높아질 것이다. 목간학이 하나의 분야로서 정립되려면 문자학·금석학 분야와도 연계하는 것이 필요하다. 아울러 그를 위해 중국이나 일본 등 그 방면의 경향까지도 파악함으로써 인식의 지평을 확대해 나가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 함안 성산산성 출토목간의 내용과 성격(한국고대사학회, 1999년)
  • 韓國出土の木簡について(李成市, 木簡硏究 19, 1997년)
  • 雁鴨池에서 出土된 新羅 木簡에 대하여(李基東, 新羅 骨品制社會와 花郞徒, 1980년)

관련이미지

거연에서 발견된 한대의 목간

거연에서 발견된 한대의 목간 출처: 미술대사전(용어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