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석문

금석문

[ 金石文 ]

금속(金屬)이나 돌붙이(石類)에 새긴 글씨, 또는 그림을 총칭한다. 따라서 크게 금문과 석문으로 분류된다. 한층 넓은 의미로는 갑골문(甲骨文), 와전명(瓦塼銘), 토기명문(土器銘文), 금·은에 새긴 글, 목간(木簡) 등을 포함시키기도 한다. 금석문은 당대 사람들에 의해 직접 만들어진 1차 사료이므로 그들의 생활이나 의식을 여과(濾過)없이 그대로 반영하고 있어 자료적인 가치가 대단히 높다. 특히 문헌사료가 부족한 고려시기 이전의 금석문은 더할 나위 없는 소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금문 자료 종류로는 칼(刀劍)에 새긴 글자, 범종명(梵鐘銘), 청동거울(銅鏡)과 여러 종류의 불기(佛器)에 새긴 글자, 조상(造像), 동인(銅印) 등을 손꼽을 수 있다. 석문은 비문이 중심인데, 그 내용에 따라 사적비(事蹟碑), 순수비(巡狩碑), 국경비(國境碑), 신도비(神道碑), 사찰비(寺刹碑), 탑비(塔碑), 석당비(石幢碑), 갈(碣) 등으로 나눈다. 그 외의 중요한 석문으로 석각(石刻), 석탑, 불상, 석등, 석주에 새긴 명문 등을 손꼽을 수 있다. 금석문의 종류와 내용을 시대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선사(先史)시대 것으로 바위에 새긴 그림인 암각화(岩刻畵)가 유명하다. 울주 대곡리·천전리, 고령 양전리, 경주 금장대, 포항 칠포리 등에 그 유적이 있다. 중국의 경우는 금문(金文)이 앞서고 석문(石文)이 그 다음이었으나, 한국은 초기 청동기시대에 문자를 사용한 흔적이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일부의 청동기 자료에는 그림만 있고 글자가 새겨진 것은 없다. 낙랑(樂浪) 지역에서 발견된 명문 있는 유물로는 청동거울, 와당(瓦當), 봉니(封泥) 등을 손꼽을 수 있다. 점제현신사비(蟬縣神祠碑)는 85년 세워졌는데 한국에 있는 최고(最古)의 비석이다.

삼국시대는 금석문이 본격적으로 만들어진 시기이다. 이는 문자 사용이 이 시기에 급속히 확산되었음을 뜻한다. 고구려의 것으로는 광개토왕비(廣開土王碑), 중원고구려비(中原高句麗碑), 평양성 석각(平壤城 石刻), 불상 광배에 적은 조상기(造像記) 등이 있다. 광개토왕비는 외형, 글씨, 그 내용에 있어서 다른 금석문보다 탁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안악 3호분(일명 동수묘)·덕흥리 고분·모두루묘 등의 고분벽화와 함께 남아 있는 묵서(墨書) 명문들도 고구려사 연구의 중요한 금석문들이다. 백제의 금석문으로는 日本 石上神宮에 있는 칠지도(七支刀) 명문을 비롯하여 부여의 사택지적비, 1995년 능산리 절터에서 발견된 창왕명석조사리감(昌王銘石造舍利龕), 그리고 공주에서 발견된 무령왕 지석(誌石) 등이 있다.

백제는 문장, 글씨 등의 작성 솜씨를 볼 때 비슷한 시기의 다른 나라보다 문화적 수준이 높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 외에 문자가 있는 기와편과 최근에 발굴로 출토된 목간이 여러 점 있다. 가야의 금석문으로는 1989년 발견된 합천 매안리 비(陜川 梅岸里 碑)가 유명하다. 또 합천 저포리 고분군에서 나온 하부(下部)명이 적힌 항아리와 대왕(大王)명이 새겨진 장경호 등의 토기명문이 있다. 가야의 경우에는 특이하게도 명문이 있는 고리자루큰칼(環頭大刀)이 몇 점 알려져 있는데, 그 중 창녕의 교동 11호분에서 나온 칼은 종래 백제의 것으로 추정하였으나 최근 X선 사진 판독을 통해 새롭게 고구려의 것임이 확인되었다. 신라시대의 금석문으로서는 비문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

현재 가장 오래된 신라 비석으로 알려진 영일 냉수리비(迎日 冷水里碑)를 비롯하여 울진 봉평비(蔚珍 鳳坪碑),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 명활산성비(明活山城碑), 대구 무술오작비(大邱 戊戌烏作碑), 남산 신성비(南山 新城碑) 등이 있다. 비슷한 시기에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적인 면모를 보인다. 이들 자료들은 신라의 중앙통치조직, 지방통치체제, 신분제, 촌락구조, 산성과 저수지 축조, 그리고 부역동원 등에 대한 많은 새로운 사실을 알려 주었다. 석각으로는 법흥왕대의 울주 천전리 서석(書石)이 유명하다. 이곳에는 그림과 부호와 함께 많은 글씨가 새겨져 있어 주목된다. 금속류로 경주 호우총에서 출토된 광개토왕의 시호가 새겨진 호우(壺), 서봉총에서 나온 은합(銀盒) 등이 있다. 삼국시대는 문헌사료가 빈약하여 그 어느 시대에 비해 금석문이 차지하는 위치가 높다. 기왕에 비문에 대한 관심이 압도적으로 높지만, 최근에는 토기, 기와 등의 단편적 문자자료에 대한 관심도 커져 가고 있다.

통일신라시대 비석으로는 왕의 비문, 승려의 비문 등이 있다. 이 시기에 이르면 비는 외형상 비신(碑身), 이수(首), 귀부(龜趺)를 갖춘 정형을 취하게 되는 변화가 수반된다. 왕의 비문으로 무열왕릉에는 현재 비신은 소멸되었으며 웅장한 모습의 이수와 귀부만 전하고 있다. 문무왕릉비와 김인문묘비는 그 일부가 전해지고 있고, 성덕왕릉과 흥덕왕릉에서는 비의 조각이 몇 점 발견된 바 있다. 승려의 비문은 나말여초(羅末麗初) 선종의 유행과 함께 많이 작성되었는데, 대표적으로는 최치원(崔致遠)이 쓴 사신비명(四山碑銘)을 손꼽을 수 있다. 이는 내용 뿐 만 아니라 글, 글씨, 조각 수법 등에 있어서 매우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금속에 새긴 것으로는 속칭 에밀레종이라 불리는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의 명문과 그 비천상이 잘 알려져 있다. 그 외에 석등, 석탑, 사리함 등에 새겨진 명문 등이 많이 알려져 있다.

고려시대는 승려의 탑비(塔碑)와 사적비(寺蹟碑)가 많이 세워졌다. 탑비와 사적비의 글과 글씨, 새김은 당대 최고 수준의 작가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 가운데 일연선사의 생애를 기록한 탑비인 인각사 보각국존정조탑비(麟角寺 普覺國尊靜照塔碑)는 중국 왕희지(王羲之)의 글씨를 집자(集字)한 것으로 유명하다. 고려시대는 통일신라시대와는 달리 묘지명(墓誌銘)이 유행하였는데, 이는 다른 측면에서 사료적으로 매우 중요한 가치를 갖고 있어 주목을 받고 있다. 금문으로는 동종(銅鐘)의 명문(銘文)이 있고, 향로 등에 문자를 넣은 것도 있다.

조선시대의 석문으로는 먼저 비갈(碑碣)이 있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당대의 가장 명망이 있고 문장에 능한 사람으로부터 글을 받고, 명필에게 글씨를 얻어 비를 세우는 것을 영예롭게 생각하였다. 대체로 유학의 발달과 함께 죽은 이의 업적과 학식을 과장하고 미화하려는 경향이 강하였기에 그 내용 전부를 사실로 받아들이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 점은 삼국시대나 고려시대 금석문이 차지하는 위상과 전혀 다른 점이다. 그 다음으로 어떤 특수한 사실을 기록한 사적비(事蹟碑)가 많이 세워졌다. 여기에는 전투의 승리를 기록한 전적비(戰蹟碑), 사찰에 대해 기록한 사적비(寺蹟碑), 향교, 서원을 설립했거나 중수한 사실을 기록한 묘정비(廟庭碑)가 있다.

유명한 사람이 태어났거나 살았던 곳에는 구기비(舊基碑), 유허비(遺墟碑) 등의 명칭으로 표석을 세워 기념하였다. 또 지방관의 공덕을 칭찬하는 비를 세우기도 하였는데, 선정비(善政碑), 송덕비(頌德碑), 거사불망비(去思不忘碑) 등의 표현을 사용하였다. 금속으로는 몇몇 종(鐘)의 명문이 있다. 금석 이외에 사기판(沙器版)에 문자를 써서 구운 묘지(墓誌)가 있다. 이렇게 금석문은 고려시대 이전의 것이 상대적으로 사료적 가치가 높은 편이며, 조선시대 금석은 사료로서의 가치보다는 서예사(書藝史) 등의 자료 면에서 관심을 끄는 대상이 더 중요성을 지닌다고 평가된다.

그러면 금석문에 대한 관심과 연구는 어떻게 진행되어 왔는지 살펴보자. 금석문에 대한 관심과 자료수집은 일찍부터 있어왔다. 이는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등의 사서를 작성하면서 삼국시대의 금석문을 활용한 데서 알 수가 있다.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을 비롯한 고려시대의 여러 문집에서는 앞 시대의 비문을 언급하고 수록하였다. 조선 초기의 『동문선(東文選)』에도 고려와 조선시대의 비문과 묘지를 수록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단지 수록하거나 소개하는데 그쳤으므로 금석학(金石學)이라 이름하기는 어렵다. 명실상부하게 금석학이라 부를 수 있는 시기는 17세기 이후이다. 선조의 아들인 낭선군(朗善君) 이우(李吳)는 신라에서 조선시대에 이르는 3백 종의 탁본을 수집하여 『대동금석첩(大東金石帖)』을 펴냈고 그보다 약간 늦은 시기인 숙종 6년(1655) 조속(趙涑)은 진흥왕순수비를 비롯한 탁본 120여 점을 모아 『금석청완(金石淸玩)』이란 책을 편찬하였다.

영조 때의 김재로(金在魯)는 금석 탁본 246책의 『금석록(金石錄)』이란 저서를 남겼다. 그 후 19세기에 이르러 금석학은 큰 발전을 보았다. 이전의 서예 중심의 관심과 연구에서 이제는 비문의 내용 중심의 연구로 바뀌어져 갔다. 『금석과안록(金石過眼錄)』을 저술한 김정희는 비문을 조사, 발굴하고 정밀한 고증을 하였다. 현대에 비교하여도 손색이 없는 접근 방법을 사용하였으므로 그는 금석학의 연구방법과 수준을 한 단계 끌어 올렸다고 평가받는다. 그리고 중인 출신의 오경석(吳慶錫)은 비문을 판독하고 고증하여 『삼한금석록(三韓金石錄)』을 저술하였다.

한편 19세기에 청나라 사람 유희해(劉喜海)는 금석문을 모은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과 『해동금석존고(海東金石存攷)』를 펴냈다. 일제시대에 이르러 조선총독부에서 주관하여 전국적인 조사를 실시한 자료를 바탕으로 거질의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 2책을 편찬하였다. 이 조사에 참여하였던 葛城末治는 그 경험을 토대로 『조선금석고(朝鮮金石攷)』(1935)란 연구서를 저술하였다. 이 책은 식민주의사학의 관점에 접근한 것이기는 하나 한국 금석문에 대한 최초의 단행본 연구서로서 높게 평가받고 있다.

해방 후에는 새로운 금석문 자료가 많이 발굴 소개되었고, 이에 대한 판독이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1960-70년대 이후에는 그를 모아 집대성하는 작업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대표적으로는 이난영(李蘭暎)의 『한국금석문추보(韓國金石文追補)』(1968), 황수영(黃壽永)의 『한국금석유문(韓國金石遺文)』(1976), 1979년부터 계속 나오고 있는 조동원(趙東元)의 『한국금석문대계(韓國金石文大系)』 1-5, 허흥식(許興植)의 『한국금석전문(韓國金石全文)』 1-3(1984), 장충식(張忠植)의 『한국금석총목(韓國金石總目)』(1984) 등을 손꼽을 수 있다.

또 주제별로 자료를 정리한 것으로, 임창순(任昌淳)의 『한국금석집성(韓國金石集成)』 권1 선사시대편, 김영태(金煐泰)의 『삼국신라시대 불교금석문고증(三國新羅時代佛敎金石文考證)』(1992) 등이 있다. 금석문자료에 대한 역주(譯註) 작업도 진행되어,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에서는 『역주 한국고대금석문(譯註 韓國古代金石文)』1-3권(1992)을 발간하였다. 승려 이지관(李智冠)은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校勘譯註 歷代高僧碑文)』 신라편·고려편(1993-1995)을 펴냈다. 그리고 한국역사연구회에서는 『역주 나말여초금석문(譯註 羅末麗初金石文)』 원문교감(原文校勘) 상·하권(1996)을 출간하였다. 이러한 업적들로 인해 한국의 금석문 자료의 정리와 연구는 한 단계 더 발전할 수 있었다.

1970-80년대 이후 금석문자료에 대한 가치와 중요성은 더욱 강조되고 있다. 연구자들은 새로운 금석문의 잇단 발견으로 인해 최고(最古) 비석이란 기록이 갱신되는 것을 직접 보았고, 그것이 새로운 역사연구로 이어지는 것을 확인하였다. 요컨대 금석문은 역사, 예술, 문학 등 각 방면에 있어서 중요한 기본 자료가 되며, 그 가치가 높이 평가되고 있다. 특히 시대가 올라갈수록 문헌 자료의 공백으로 인해 그 중요성이 한층 커진다. 아울러 금석문은 서예연구 자료로서도 매우 중요하다. 앞으로 새로운 금석문 자료에 대한 발굴 조사는 계속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아울러 기왕의 금석문 자료에 대한 정리와 판독 작업은 지속되어야 하겠다. 이런 작업은 개인 차원에서보다는 여러 학자들이 공동 참여하여 연구하는 것이 더 바람직할 것이다. 금석학은 역사학, 언어학, 종교학, 인류학, 민속학, 자연과학 등의 학문 분야가 서로 연결을 맺으며 발전되어야 하겠다. 일부에서는 X선·적외선 사진 등을 활용하여 기왕에 잘 보이지 않았던 글자에 대한 정밀한 판독을 진행하고 있음은 다행스러운 일로 여겨진다. 또한 비석과 쇠붙이류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질 것이 아니라, 적은 양이라 하지만, 토기명문, 목간(木簡), 기와(瓦)나 벽돌의 명문 등 조그마한 자료들에 대해서도 도외시하지 말고 더욱 관심을 가지고 집대성하여 종합적으로 파악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무엇보다 소중한 자료들이 더 이상 훼손되지 않도록 세심한 배려와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 유물에 새겨진 古代文字(부산시립박물관, 1997년)
  • 譯註 韓國古代金石文제 1·2·3권(韓國古代社會硏究所編, 駕洛國史蹟開發硏究院, 1992년)
  • 朝鮮金石攷(葛城末治, 193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