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니

봉니

[ 封泥 ]

봉니(封泥)

봉니(封泥)

고대 중국에서 공문서나 서신, 기물 등을 봉할 때 사용되는 인장 찍힌 점토덩이를 말한다. 종이가 보편적으로 사용되기 전까지 문서는 보통 죽간(竹簡)이나 목간(木簡)을 사용하게 되는데 이들을 철하거나 궤에 넣어서 끈으로 묶고 그 연결부에 진흙덩이로 봉함한 후 인장을 찍어 놓게 된다.

춘추시대(春秋時代) 말엽에 인장이 출현한 뒤 봉니도 따라 사용되었는데 진한시대(晉漢時代)에 가장 유행하였고 수당대(隋唐代)까지 쓰였으나 그 이후 자취를 감추었다. 그 중에서 湖南省 長沙縣 馬王堆 漢墓에서 출토된 것처럼 도호(陶壺)와 궤짝을 봉함한 봉니가 발견된 것은 유명하다. 봉니에는 당시의 관직이나 군현(郡縣)의 지명이 압인되어 있기 때문에 고대 중국의 정치제도, 중앙과 지방의 관계 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인 것은 틀림없다. 일면 이 봉니는 중국 진한시대 문화의 한 특징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봉니는 평양지역의 낙랑유적에서 출토되어 한국 고고학과 고대사의 중요 쟁점이 되어 왔기 때문에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1918년 평양의 토성리 일대에서 발견된 이후 해방 이전까지만 해도 평야 근처에서만 200여 점 이상이 출토되었다. 이들 봉니에는 낙랑군에 소속된 25개의 현(縣) 중에서 22개의 현 이름이 모두 나온다. 봉니라는 것이 문서 등을 보낸 자의 직함과 같은 것을 인장으로 찍어 보내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속현의 봉니가 평양지역에서 나오는 한, 봉니출토지를 낙랑군치지(樂浪郡治地)로 간주해도 무방할 것이라 생각해 왔다. 하지만 이 지역에서는 낙랑태수장(樂浪太守章), 낙랑수승(樂浪守丞) 등 낙랑의 관직명이 나오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즉 이들 낙랑관직명이 찍힌 봉니는 낙랑에서 보내야하는 물건이므로 이곳에서 나올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봉니의 위조문제가 논란이 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 支那の建築と藝術(關野貞, 1983년)
  • 樂浪時代의 銘文考(金鍾太, 考古美術 135, 1977년)
  • 樂浪地域出土の印章と封泥(田村晃一, 考古學雜誌 62, 1976년)
  • 樂浪社會の支配構造(三上次男, 朝鮮學報 30, 196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