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택지적비

사택지적비

[ 扶餘 砂宅智積碑 ]

지역 부여
사택지적당탑비. 높이 109cm

사택지적당탑비. 높이 109cm

백제시대 말기의 비석으로, 대좌평(大左平)의 고위직을 역임한 사택지적이란 인물이 말년에 늙어 가는 것을 탄식하여 불교에 귀의하고 불당과 탑을 건립한 것을 기념하여 세운 당탑비(堂塔碑)이다. 이 비는 1948년 부여읍 관북리의 도로변에서 일제시대 일본인들이 신궁(神宮) 역내의 참도(參道)에 깔려고 쌓아 놓았던 돌무더기 속에서 발견되었다. 황수영(黃壽永), 홍사준(洪思俊)이 이 지역을 조사하면서 우연히 발견하였다. 비석은 완전한 형태가 아니며, 상당부분이 잘려나가 전모를 잘 알 수가 없다. 재질은 화강암이며, 비의 높이, 너비, 두께는 102×38×28㎝이다. 현재 국립부여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1983년에는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01호로 지정되었다.

비는 한 면을 잘 물갈이한 다음, 비면에 가로 세로로 일정한 간격으로 칸을 치고 그 칸 안에 글자를 새겼다. 이 정간(井間)은 정사각형으로 한 변이 7.6㎝이다. 현재 남아 있는 비문은 4행으로 매 행의 글자는 14자로 전체 글자 수는 56자이다. 글자의 크기는 약 4.5㎝ 내외이다. 비의 오른쪽 상단부에는 지름 20㎝ 가량의 원을 그리고 그 안에 봉황문(鳳凰文)을 새겨 넣었으며, 붉은 색을 칠한 흔적이 남아 있다. 문장은 중국 육조시대의 사륙변려체(四六騈儷體)이며, 서체는 힘이 넘치는 구양순체(歐陽詢體)이다. 이를 볼 때 당시 문장이나 글자체가 세련된 수준에 이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백제 금석문을 대표하는 귀중한 자료라 하겠다.

비문의 내용은 “甲寅年正月九日 奈祇城砂宅智積 慷身日之易往 慨體月之難還 穿金以建珍堂 鑿玉以立寶塔 巍巍慈容 吐神光以送雲 아아悲貌 含聖明以□□”이다. 이를 해석하면, “갑인년 정월 9일 나지성의 사택지적은 몸이 날로 쉬이 가고 달로 쉽게 돌아오기 어려움을 한탄하고 슬퍼하여, 금을 뚫어 진귀한 당을 세우고 옥을 깎아 보배로운 탑을 세우니, 높고 큰 자비로운 모습은 신광을 토하여 구름을 보내는 듯하고 아아한 슬픈 모습은 성명을 머금어 □□을 한 듯하다” 로 된다. 비문은 불당과 탑을 세운 동기와 자신의 감정을 시적(詩的)으로 잘 표현하였다.

비문의 첫 줄에 나오는 간지(干支)의 첫 글자는 마모되어 잘 확인할 수 없으나, 대체로 ‘甲’자로 판독하고 있다. 이 비에는 연호가 사용되지 않았고 간지를 사용하였다. 갑인년의 연대를 결정하는데는 주인공이라 할 사택지적의 활동시기가 기준이 되겠다. 그런데 사택지적은 한국의 사료에는 보이지 않는다.

다행히 『일본서기(日本書紀)』 권24 황극(皇極) 2년(642) 7월 조에 그 이름이 등장한다. 여기에는 “조정에서 백제의 사신인 대좌평(大佐平) 지적(智積) 등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라는 기록이 보인다. 여기에 등장하는 지적을 일반적으로 사택지적과 동일한 인물로 보고 있다. 이 해에 의자왕이 왕권 중심의 지배체제를 확립하기 위하여 내좌평(內左平) 기미(岐味) 등 반대하는 귀족 40여 명을 섬으로 축줄하였는데, 그는 이 때에 연루되어 면직되었던 것 같다. 비문의 내용에서 지난날의 영광과 세월의 덧없음을 노래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일 듯하다.

그렇다면 갑인년은 의자왕 14년인 654년으로 볼 수 있겠다. 요컨대 사택지적은 왜(倭)에서 돌아 온 뒤 관직에서 물러나 자신의 인생을 회고하면서 비석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 특이하게도 사택지적은 ‘나지성’이란 출신지를 밝히면서도 자신이 지녔던 관등(官等)이나 관직(官職)을 적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것도 그런 덧없음을 반영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지성의 위치는 부여읍 서쪽 30리의 부여군 은산면 내지리로 비정되고 있다. 사택(砂宅)이란 성은 백제의 팔대성(八大姓)의 하나로 사(沙)씨와 같은 것으로, 사타(沙吒) 등으로 표기하였다. 사택지적이 대좌평(=상좌평)이었던 점으로 보아 그는 백제의 최고 귀족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가 불당과 탑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귀족으로서의 경제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백제시대의 금석문 자료가 많지 않은 현실에서 볼 때, 이 비는 매우 귀중한 자료라 할 만하다. 특히 백제의 수준 높은 문화를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격조 높은 문체와 서법은 7세기대의 백제가 다른 나라에 비해 앞서 있었음을 알게 한다. 또한 이 비는 백제 말기 귀족의 정신세계의 일면을 알려주고 있다.

참고문헌

  • 譯註 韓國古代金石文 제1권(韓國古代社會硏究所編, 駕洛國史蹟開發硏究院, 1992년)
  • 忠南地域의 文化遺蹟 3-扶餘郡 편-(百濟文化開發硏究院, 1989년)
  • 百濟 砂宅智積碑에 대하여(洪思俊, 歷史學報 6, 195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