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원고구려비

중원고구려비

[ 忠州 中原高句麗碑 ]

지역 충주
중원고구려비

중원고구려비

충청북도 충주시 가금면 용전리 280-11 입석마을 입구에 세워져 있는 고구려의 고비로서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1979년 2월 25일 충주 지방의 향토사연구 모임인 예성동호회의 제보에 의해 동년 4월 8일 단국대학교박물관 학술조사단이 비면 탁본과 정밀한 해독(解讀) 작업을 실시해 비문에서 「고려(高麗)」란 국명(國名)과 함께 「대사자(大使者)」,「발위사자(拔位使者)」, 「대형(大兄)」, 「당주(幢主)」 등등의 고구려 관등과 관직을 확인함으로써 고구려가 세운 비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건립의 연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으나 5세기 말의 문자왕(文咨王)대로 추정된다.

이 비는 광개토왕비를 축소한 것과 같은 느낌을 갖게 할 정도로 외형이 비슷한데, 사각의 석주형(石柱形)으로 높이는 약 2.03m, 너비는 0.55m이다. 비의 재질은 견고한 화강암으로 자연석을 이용하되, 글자를 새긴 곳은 물갈이를 하였다. 글자의 크기는 3~5㎝로 일정하지 않으며, 앞면 10행, 왼쪽면 7행, 오른쪽면 6행이 확인되었다. 비문의 서체는 고졸(古拙)한 예서체라는 설과 예서체를 간직한 해서(楷書)라는 설 등으로 견해가 나뉘어져 있다. 문체는 순수한 한문은 아니며 이두문과 고구려식의 한문이 섞인 혼용문으로 되어 있다.

발견 당시 비의 전면에 이끼가 많이 끼어 있어 글자의 확인이 상당히 까다로웠다. 이끼를 제거하고 면밀히 조사한 결과 현재 앞면으로 추정되고 있는 면과 그 왼쪽 옆면, 그리고 오른쪽면에서 문자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 뒷면은 글자를 새겼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만 확인했을 뿐 글자를 한 자도 읽어낼 수가 없었다. 전체적으로 마멸이 심해 판독할 수 없는 글자가 많아 비를 세운 시기를 비롯한 비문의 전반적인 내용 등 기본적인 문제에 대해서 논란이 분분해 왔다. 특히 글이 새겨진 비면의 수, 비문의 순서, 건립연대 등등을 둘러싸고 이견이 많았지만 최근의 면밀한 조사를 계기로 어떤 사항에서는 상당히 의견이 수렴되어 가고 있다.

발견 당시 2면 비, 3면 비, 4면 비로 보는 견해 등으로 엇갈려 있었으나 이제 4면 비임이 거의 확실시되었고, 앞면 상단부에서 ‘년(年)’ 자를 판독해냄으로써 원래 제액(題額)의 존재 가능성을 확인하고 아울러 앞면이 제1면이라는 점도 알 수 있게 되었다. 그에 따라 앞면이 첫째 면이며, 왼쪽 면, 오른쪽 면, 뒷면의 순서로 문장이 작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리고 앞면 1행 여덟 번째 글자가 「조(祖)」자임이 분명해져 그 동안 비의 건립연대에 대해 광개토왕대설, 장수왕 37년(449)설, 장수왕 68년(481)설 등으로 나뉘어 분분했던 논란은 거의 종식되고 문자왕대로 정리되었다.

이 비는 고구려비 가운데 한반도에서 발견된 유일한 예로 고구려가 신라를 「동이(東夷)」라 칭하면서 그 국왕에게 종주국으로서 의복을 하사했다는 귀중한 내용이 실려 있는데, 이는 『삼국사기(三國史記)』등 문헌 기록에 전혀 나와 있지 않았던 사실로, 5세기경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고구려가 주변 세력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천하관(天下觀)의 존재를 보여 고구려사에 대한 인식의 폭을 넓혀 주었다. 그리고 「신라토내당주(新羅土內幢主)」란 직명으로 미루어 신라 영토 안에 고구려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고 한 『일본서기(日本書紀)』의 기록도 사실성이 높음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그밖에도 고구려에서 직명-부명-관등명-인명의 순으로 표기했다는 점, ‘절교사(節敎事)’ 등의 표현에 보이듯 고구려에서 이미 5세기 이전부터 이두가 사용되었다는 점등과 함께, 고구려 관등조직의 정비과정을 비롯한 여러 측면에서 고구려사에 접근하는데 새로운 정보를 담고 있다.

비가 발견된 초창기에 연구자들이 공동 조사를 한 뒤 기본적인 비문 조사는 거의 방치되다시피 하였는데, 2000년 2월에 사단법인 고구려연구회에서 최첨단의 기기(機器)를 동원한 과학적인 방법으로 본 비를 본격적으로 재조사함으로써 연구사상 전환기를 맞이했다. 그럴 뿐만 아니라 특히 많은 연구자들이 동원됨으로써 객관성을 높이려 한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이 때 1979년 처음 만들어진 탁본자료와 적외선 사진, 그리고 2000년 현장에서 탁본한 것을 직접 비교 분석하여 컴퓨터에 입력하는 한편, 그 동안 마모된 부분에 대해서 적외선 사진을 촬영하였는데, 이는 국내에서 비문 판독에 처음으로 시도해 본 것으로 앞으로 다른 고비(古碑)에 대한 연구에서도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으리란 기대를 낳았다.

이 조사로 인해 이전에 판독하지 못하여 미상으로 처리되었던 글자를 23자 정도 더 밝힐 수 있게 되었고 견해가 엇갈려 논란되었던 글자들을 일부 확정짓기도 하는 등 고구려 연구와 고비(古碑)연구에 있어서 큰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참고문헌

  • 譯註 韓國古代金石文 제1권(韓國古代社會硏究所編, 駕洛國史蹟開發硏究院, 1992년)
  • 中原 高句麗碑의 再檢討(金昌鎬, 韓國學報 47, 1987년)
  • 중원 고구려비에 대하여(손영종, 력사과학 85-2, 1985년)
  • 中原 高句麗碑 -建立年代를 中心으로-(木下禮仁, 素軒南都泳博士華甲紀念史學論叢, 1984년)
  • 史學志 13(檀國大 史學會, 197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