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열왕릉

무열왕릉

[ 慶州 武烈王陵 ]

지역 경주
왕릉 전경

왕릉 전경

무열왕릉은 경주 북서쪽에 있는 선도산에서 남쪽으로 뻗어 내린 지릉의 말단부인 갯보골에 위치한다. 능은 해발 약 40m의 낮고 편평한 구릉에 자리 잡고 있는데, 왕릉의 서쪽 뒤편으로 150m 떨어진 곳에는 4기의 왕릉급 고분으로 구성된 서악동 고분군이 있으며, 동쪽 앞으로는 전 김인문 묘(傳金仁問墓)와 전 김양 묘(傳金陽墓)가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능은 봉분의 크기가 저경 37m, 높이 8.8m인 원형봉토분이다. 봉분의 가장자리 주변에는 둘레돌(護石)로 보이는 직경 30㎝ 내외의 깬돌(割石)들이 일부 노출되어 있을 뿐 후대의 왕릉들에 보이는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이 새겨진 둘레돌은 아직 꾸며지지 않았다.

능의 앞에는 배례석(拜禮石)이 설치되어 있는데 이것은 화강암제 장대석 8매를 이용하여 조립한 것으로 길이, 너비, 두께가 3.04×2.14×0.35m이다. 이 배례석은 조립형태와 석재의 모양으로 보아 후대에 설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능의 전방 동북쪽에 귀부(龜趺)와 이수(이首)만 남아 있는 비가 배치되어 있고 이 비는 비각에 의해 보호되고 있다. 따라서 이 능은 신라의 왕릉으로 전해오는 것 가운데 피장자가 명확한 것으로는 유일한 것이 된다. 내부구조는 돌방(石室)으로 추정되고 있다.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재위 654-661년)은 성은 김씨, 이름은 춘추로 진지왕(眞智王)의 아들인 이찬 용춘(龍春)의 아들이다. 김유신의 매부로서 선덕, 진덕의 두 여왕을 함께 보필하여 삼국의 병합을 도모하고, 신라 제29대 중대 첫 진골 출신 왕이 되었다. 왕릉에 대해서는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 무열왕조에는 “영경사 북쪽에 장사를 지냈다(葬永敬寺北)”고 했고,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경주 서악리에서 137보 떨어진 곳에 있다(府西岳里 周137步)”고 하였는데, 왕릉의 위치 확인의 기준이 되는 영경사터에 대해서는 아직 확실한 정설이 없다.

왕릉의 전방에 있는 능비 이수의 앞면에는 ‘太宗武烈大王之碑’라고 전서(篆書)로 쓴 2행 8자의 명문이 있는데 이를 포함한 원래의 비문은 대동금석서속(大東金石書續)에 의하면 당시의 명필인 무열왕의 둘째 아들 김인문(金仁問, 629-694)의 글씨로 전한다. 이수는 여섯 마리 용이 여의주를 받들거나 혹은 다투는 형상이 조각되어 있다.

같이 있는 귀부는 장방형의 대석 위에 올려진 것으로 네 발과 머리의 표현이 생동감이 넘쳐 신라조각의 정수로 손꼽히고 있다. 귀부의 등에는 4중의 구갑문(龜甲文)을 조각하고 그 주위에 비운문(飛雲文)이 장식되었는데, 제작시기를 알 수 있는 최고의 작품으로 이수와 함께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귀부의 네 귀퉁이에는 초석이 남아 있어 당초 비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지금은 최근에 세워진 팔작지붕의 비각 안에 보호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고적조의 태종무열왕릉조에 나오는 조위(曺偉)의 시에 “…讀碑文缺落難實究茫茫歲月荒委棄無人…”라는 구절로 보아 조선시대에는 비신이 남아 있었던 듯하다.

왕릉의 뒤편에 종렬로 늘어선 서악리 고분들은 위에서부터 1호분 법흥왕릉(法興王陵), 2호분 진흥왕릉(眞興王陵), 3호분 진지왕릉(眞智王陵), 4호분 무열왕(武烈王)의 부 문흥대왕(文興大王, 追尊) 용춘의 능으로 비정되기도 한다. 능의 주변 4,286평이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20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참고문헌

  • 慶州西岳地域地表調査報告書(慶州文化財硏究所, 199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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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신라 무열왕릉 정측면

경주 신라 무열왕릉 정측면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