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방후원분

전방후원분

[ 前方後圓墳 ]

일본의 전방 후원분

일본의 전방 후원분

전방후원분은 일본의 고분시대(4-6C경)에 성행했던 무덤양식으로, 평면도상으로 보면 원형(圓形)과 방형(方形)의 분구가 붙어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영어로는 원형과 방형의 구멍이 이어진 이전의 열쇠구멍 모양과 유사한 점에 착안하여 ‘Keyhole-shaped tomb’이라고 번역되기도 한다.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에 대한 명칭의 유래는 일본 근세의 학자 가모쿤페이(蒲生君平)가 천자(天子)가 타는 궁차(宮車)의 모양을 모방하여 만든 고분으로 추정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즉 천자가 타는 차에는 둥근 지붕이 있고 여기를 후원부(後圓部), 말이 끄는 방형의 앞부분을 전방부(前方部)로 해석했다. 이러한 전방후원분의 궁차기원설은 지금은 성립되지 않으나 용어자체는 고고학 용어로 정착되어 사용되고 있다.

전방후원분은 분구의 형태에 따라 크게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 전방후방분(前方後方墳), 원분(圓墳), 방분(方墳)으로 나뉜다. 이중에서 단연 전방후원분이 규모의 면에서나 수적인 면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으며, 전남지방을 중심으로 한 한반도 남부에서도 발견된 바가 있지만, 일본열도(日本列島)내에 분포하고 있는 예에 비하면 훨씬 적은 수에 그치고 있어서 일본 고유의 고분형태로 인정되고 있다. 또한 이 전방후원분의 출현과 일본 전국에 보급, 그리고 그것의 소멸과정은 일본 고분문화의 성립과 파급, 종말의 지표가 되고 있으며 분포상으로도 홋카이도(北海島)와 오끼나와(沖繩)를 제외한 일본 전역에서 발견된다.

전방후원분을 구조적인 측면에서 살펴보면, 우선 전방후원분의 분구, 분구 외측의 즙석시설(葺石施設)과 도랑시설(周溝施設), 구덩식돌방(竪穴式石室)이나 점토덧널(粘土槨)과 같은 매장주체부(埋葬主體部) 등의 속성을 포함한다.

초기의 전방후원분은 보통 자연지형상으로 볼 때 구릉의 선단부와 같은 곳에 입지하며 전방부(前方部)가 낮고 좁은 것이 특징이다. 매장주체부는 구덩식돌방(竪穴式石室)이나 점토덧널(粘土槨) 등이 채용된다. 4세기 중엽경이 되면 봉분의 외연(外緣)을 따라 도랑을 파는 것이 나타난다. 5세기경이 되면 전방후원분은 구릉지대를 떠나 평야지대에 입지하며, 규모가 거대화된다.

전방후원분의 가장 발달된 형태는 기나이지방의 평야지대에 위치한 대형분으로 방패모양의 구획 안에 3단으로 축조해 올린 거대한 봉분과 주변으로 돌아가는 호(濠), 그리고 전방부와 후원부의 높이가 거의 같아지는 것이 특징이다. 후기가 되면 매장주체부가 굴식돌방(橫穴式石室)으로 교체되고 후원부(後圓部)의 축소가 두드러지게 된다. 6세기경부터 전방후원분은 현저하게 쇠퇴하는 양상을 보여주는데 수장묘도 방형이나 원형으로 바뀌게 된다. 그래서 대체로 이른 시기에 소멸하는 지역은 6세기 말경, 늦은 지역은 7세기 후반까지 지속되다가 소멸한다.

특히 전방후원분은 일본 고분시대에 있어서 다른 어떤 분묘 형태보다도 우위를 점하고 있으며 각 지역의 수장급이나 그와 가까운 신분의 묘제임에는 분명하다. 따라서 전방후원분의 구조와 규모는 단순히 건축학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다른 분형(墳型)들과 함께 그 당시 사회상이나 신분적인 질서를 강하게 반영하고 있다.

현재 전방후원부와 관련된 유력한 설은 야요이(彌生)시대 분구묘에 보이는 작은 돌기형태의 제단이 발달하여 전방부의 원류가 되었다는 것이다. 야요이 시대 전·중기의 주구(周溝)를 가진 분구묘에서는 주구의 일부를 파지 않고 남겨 두었거나 일부분을 돌출시킨 형태의 무덤이 보인다. 그리고 야요이시대(彌生時代) 후기가 되면 이들 분구묘의 돌출부를 가공하여 크게 하거나 석렬을 붙여 화려하게 만든 예가 등장한다. 이것은 장송의례에서 돌기형태의 제단이 중요시되고 있음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들 야요이 후기의 분구묘는 원형계와 방형계로 각각 발달하며 3세기 전반 야요이시대 종말기에 이르면 직경 20~30m의 원형분구묘의 한쪽에 제단이 붙는 무덤이 출현한다.

현재 일본 고고학계에서는 이러한 분구묘를 전방후원분의 조형으로 보는 설이 유력하다. 또한 중국에서 그 기원을 찾기도 하였으나, 현재까지 일본 전방후원분의 원류로 보이는 중국의 고분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반면, 한국에서는 일본의 초기 전방후원분 보다는 늦지만 현재 5·6세기대로 추정되는 예가 수 기 알려져 있고 일부는 발굴 조사되었다. 특히 현재까지 조사된 바에 의하면 한국 서남부 영산강유역에 집중된다. 일본열도의 고분에서 출토되는 원통형 하니와(埴輪)와 유사한 토기들도 출토되어 일본열도와의 관련성이 지적되고 있으나, 현재 발굴된 5·6세기대의 예에 한정하면 3세기대까지 올라가는 일본의 예보다 연대가 떨어지므로 일본 전방후원분의 원류로 보기는 어렵다.

전방후원분은 오랫동안 그것이 일본식 묘제이고 한반도 내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어져 왔으나,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일 양국의 일부 학자들에 의하여 한반도내 전방후원분 존재설이 주장되어 왔다. 1990년대 전남지방에서 전방후원분에 대한 정밀한 측량조사와 발굴조사가 이루어져 한반도 남부에 전방후원분의 존재와 특징이 보다 뚜렷이 밝혀지게 되었다. 전라남도 광주시 월계동(月桂洞) 1호분과 2호분 그리고 명화동(明花洞) 고분, 함평군(咸平郡)의 신덕(新德)고분 등이 발굴 조사되었고 해남(海南)과 함평의 장고산(長鼓山)고분이라고 하는 것 등이 정밀 측량되어 전방후원형의 분구형태를 갖는 것으로 밝혀졌다.

발굴자들에 의하여 전방후원분이라는 일본식 용어가 폐기되고 장고형고분(長鼓形古墳), 장고분(長鼓墳)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들 전남지방에서 발견된 전방후원형의 고분들은 대개 매장주체부가 굴식돌방(橫穴式石室)이고 그 중에는 아사가오형(朝顔形) 하니와(埴輪), 혹은 엔도오형(圓筒形) 하니와도 출토되고 있다. 출토된 유물로 보아 이들 고분은 6세기 전반대에 속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런데 함평 만가촌(萬家村) 고분군 중의 6호분에 대한 외곽조사 결과 이른 시기에 속하는 토기가 출토되기도 하였다. 또한 고구려의 돌무지무덤(積石塚) 중에도 압록강 중류역 자강도 초산군(楚山郡) 운평리(雲坪里) 고분군 내의 4지구 6호분은 원형 돌무지분구에 방대형의 단이 결합된 구조로 전방후원형에 가깝다는 지적도 있었다.

참고문헌

  • 王陵の考古學(都出比呂志, 岩波新書, 2000년)
  • 榮山江流域의 前方後圓形墳丘(朴仲煥, 湖南地方 古墳의 墳丘, 湖南考古學會, 1996년)
  • 光州 月桂洞의 長鼓墳 2基(林永珍, 韓國考古學報 31, 韓國考古學會, 1993년)
  • 古墳の墳丘(都出比呂志 外, 古墳時代の硏究7-古墳Ⅰ-, 雄山閣, 1992년)
  • 三國時代 墳丘墓硏究(姜仁求, 嶺南大學校出版部, 1984년)
  • 古墳の變遷(小林行雄 外, 世界考古學大系, 1959년)
  • 前方後圓墳(小林行雄, 考古學 8, 1937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