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화고분

벽화고분

[ 壁畵古墳 ]

안악 3호분 행렬도

안악 3호분 행렬도

고분의 내부를 피장자가 사후에 기거하는 공간으로 간주하고 벽면에 그림을 그려 무덤방을 장식한 고분으로, 그림을 그려 넣을 수 있는 벽면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충분한 실내공간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벽화고분은 돌방무덤(石室墳)이나 벽돌무덤(塼築墳)과 같은 굴계(橫穴系)의 방을 가진 매장시설로 되어 있다. 벽화를 그리는 매장의례의 행위는 부장품을 매납하는 행위와 비슷한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즉 피장자의 생시 사회적 지위나 역할을 표현하기도 하며 사후세계의 풍요하고 평안한 생활에 기원, 영혼의 위무(慰撫)와 같은 의도에서 벽화가 그려진다고 할 수 있다. 생시의 지위나 권력을 표상해 주는 그림이 주인공 부부의 초상(肖像), 군신행렬(君臣行列)이나 조례도(朝禮圖), 기마행렬도(騎馬行列圖) 등이라면 사후세계의 평안을 기원하는 그림은 생활도나 예불도(禮佛圖), 연지도(蓮池圖), 수문장(守門將), 역사도(力士圖) 등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벽화의 내용을 분류하고 기능적인 의미를 추론하는 것이 용이한 것만은 아니다. 벽화가 가지는 다양한 의미들은 당시의 역사적·문화적인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하고 고고학, 미술사, 사회사적인 다양한 각도에서의 접근을 필요로 한다.

무덤에 그려진 벽화는 채색화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고 부조, 선각, 화상전 등 다양한 표현기법들이 동원되지만 흔히 채색화에 주목하기 마련이다. 무덤벽화의 분포지역은 전세계적이라고 할만하고 역사적인 시기로 보면 이집트의 왕묘에서 아즈텍의 지배자무덤에 이르기까지 대체로 초기 문명의 단계로부터 시작되는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벽화고분은 동북아시아 제지역 고분벽화의 기원과 발전에 큰 역할을 하였다. 무덤에 그려진 그림으로서 湖北省 江陵縣 天星觀의 전국시대(戰國時代) 중기 대형덧널무덤에 그려진 기하학적 문양의 예를 들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본격적인 고분벽화라고 하기는 어렵다.

회화적인 성격을 갖춘 본격적인 고분벽화는 전한대(前漢代) 만기(晩期)에 화북지방에서 발견된다. 주로 공심전묘(空心塼墓), 전축분(塼築墳)의 일부 벽면에 회를 바르고 주로 인물과 용(龍), 호(虎), 주작(朱雀) 등의 소재와 함께 구름무늬(雲文) 등의 장식요소가 그려진다. 후한대(後漢代)에 들어서면 벽돌무덤이 더욱 발전하고 그에 따라 무덤방의 벽화도 발전하여 회화적인 기법이나 완성도도 높아진다. 그리고 지역적으로도 하남성(河南省)과 요령성(遼寧省)을 중심으로 발전하다가 감숙, 내몽고, 광동이나 운남지역까지 고분벽화가 출현한다. 가장 세련된 고분벽화는 위진남북조시대(魏晉南北朝時代)를 거쳐 당대(唐代)에 이르러 완성된다.

한국의 경우 요동지방(遼東地方)이나 낙랑(樂浪)·대방(帶方)지역에 분포해 있던 중국식의 고분벽화가 삼국시대 고구려에 의해 처음으로 받아들여져 크게 발전하게 된다. 고구려에 이어 백제나 신라지역에서도 한정된 지역의 한정된 고분에 벽화가 그려지게 되지만 고구려지역에서 만큼 번성하지는 못하였고 통일신라시대에도 고분벽화가 그다지 발전하지는 못하였던 것 같다. 삼국시대 이후, 고분벽화의 존재가 소멸된 것은 아니어서 고려 초기의 호족들의 무덤에도 그려진 예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고구려에서의 고분벽화의 발전은 비단 백제나 신라·가야지역에만 영향을 준 것이 아니라 일본지역 고분벽화의 발생에도 일정한 몫의 기여를 한 것 같다.

日本 九州 熊本縣을 중심으로 발전한 장식고분(裝飾古墳)의 벽화는 물론 왜(倭)의 지역적인 특성을 강하게 보여주고 있지만 삼국시대 한반도지역 고분벽화의 영향을 배제할 수는 없다. 특히 奈良縣의 高松塚古墳의 벽화는 당대(唐代)의 회화 수법까지 보이지만 그림의 전체적인 주제와 내용이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이다.

고구려의 벽화고분은 내부구조상으로 따로 그 형식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다듬은 석재나 깬돌(割石)로 축조한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의 벽에 회를 바르고 벽화를 그린 것이다. 현재까지 조사에 의하면 집안(集安) 일대의 돌방무덤 중에 벽화가 있는 것은 약 20여 기가 알려져 있고 대동강유역에서는 60여 기의 벽화고분이 남아 있다고 한다. 벽화고분은 돌방무덤 중에 일정한 규모 이상의 무덤에만 해당되기 때문에 상위 신분의 무덤에만 벽화가 그려진다고 보아도 좋다. 그러나 규모가 큰 돌방무덤 중에도 벽화가 그려지지 않은 것이 많기 때문에 고구려 후기의 무덤 중 최상위신분 혹은 왕묘는 반드시 벽화고분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벽화는 널방(玄室)의 네 벽이나 널길(羨道) 및 통로의 벽에 그려지며 천장과 기둥 혹은 모서리에도 그려지는 것이 보통이다. 벽화의 내용상으로 보았을 때 피장자의 생시 생활 모습과 관련된 어떤 주제의 장면이 묘사되기도 하고 사신(四神), 비천상(飛天像), 괴수(怪獸), 불상(佛像), 산악(山岳), 수목(樹木) 등과 같이 단편적인 소재들이나 구름무늬, 인동문(忍冬文), 당초문(唐草文) 과 같은 간단한 문양이 묘사된다. 벽화고분에 나타나는 벽화의 주제와 내용은 시기적인 변화를 비교적 잘 반영하고 있다. 벽화고분의 내부구조와 벽화의 주제 내용이 변화되는 양상을 기준으로 전기·중기·후기 3시기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전기는 4세기 중엽경에서 5세기 초에 걸치는 시기에 해당된다. 요동지방의 벽화고분과의 관계를 생각한다면 고구려의 영역 내에 벽화분이 출현한 시기는 4세기 초까지 올라갈 수 있지만 뚜렷한 실물자료로 제시할 만한 것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중국식 고분벽화의 전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양상이다. 전기의 벽화고분으로 대표적인 것은 동수묘(冬壽墓)로 불리는 안악(安岳) 3호분과 덕흥리(德興里) 고분이고 그밖에 요동성총(遼東城塚), 태성리(台城里) 2호분, 고산리(高山里) 2호분, 안악(安岳) 2호분, 약수리(藥水里) 고분 등이 해당될 것이다. 전기고분의 벽화에서는 앞방의 서쪽벽에 무덤주인공 부부의 초상을 정면좌상으로 그리고 나머지 벽면에 행렬도(行列圖), 시종, 마구간, 사냥, 부엌 등의 소재를 배치한 생시 생활모습을 그려 넣는다. 널방에도 생활도가 그려지며 천장에는 구름무늬와 불꽃무늬 등이 그려진다.

중기의 벽화고분으로는 각저총(角抵塚), 무용총(舞踊塚), 산연화총(散蓮花塚), 개마총(鎧馬塚), 삼실총(三室塚), 쌍영총(雙楹塚), 장천(長川) 1호분 등의 예가 있다. 그림의 주제와 내용은 물론 필치에서도 중국 고분벽화의 전통에서 벗어나 고구려식이 완성되는 단계에 해당하고 대개 5세기 전반에서 6세기 중엽 정도의 시기에 해당된다. 고분의 구조상으로도 옆방(側室)이나 벽감(壁龕) 등이 없어지고 앞방·널방의 구조나 널방 하나의 구조로 간략하게 된다. 무덤의 주인공 부부(夫婦)의 초상이 정면좌상의 경직된 구도로 묘사되지 않고 초상화라기보다 생활 장면의 주인공처럼 자연스러운 구도로 나타나고 그 배치도 널방의 북쪽 벽면으로 옮겨진다.

각 방의 네 모서리를 기둥으로 삼고 천장과 벽면 사이에 대들보를 묘사하여 방안을 집안처럼 꾸미고 전기에 형식화한 행열도, 사냥도, 잡기도와 같은 주제들 중에 특정한 것이 선정되어 그려진다. 씨름도, 가무도, 사신도, 사냥도 등이 하나의 장면으로 확대되어 활동감 있게 묘사된다. 천장에는 현실 생활을 떠난 소재들이 등장하는데 대들보 위에 산자형(山字形) 연속무늬와 같은 것이 등장하고 괴수, 신선, 수목, 비천, 주악, 일월성신 등 다양한 문양과 소재가 층층이 자유롭게 배치된다. 특히 중기 고분벽화부터는 불교적인 소재가 많이 그려지는데 도안화(圖案化)되지 않은 비교적 사실적인 연꽃과 예불도(禮佛圖)가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후기 벽화고분은 내부구조가 외방무덤(單室墓)으로 단순화되듯이 벽화의 소재도 현실생활의 복잡한 양상이 아닌 사신도 위주의 간결한 내용이다. 이 시기는 6세기 중엽에서 7세기 중엽에 해당되며 대표적인 고분으로 집안(集安)의 사신총(四神塚), 강서대묘(江西大墓), 호남리(湖南里) 사신총(四神塚), 진파리(眞坡里) 1·4호분, 오회분(五灰墳) 4· 5호분 등이 있다. 특히 후기에는 잘 다듬은 거석을 이용하여 쌓은 벽면에 회칠을 하지 않고 직접 그리는 수법이 유행한다. 사신도를 중심으로 신선, 괴수, 수목, 해와 달 등의 현실을 떠난 장식적인 소재가 현실의 네 벽을 메우게 된다. 벽면 상단과 천장에는 구름무늬, 인동무늬, 당초무늬, 연꽃무늬 등이 완전히 도안화된 형태로 등장하는데 매우 세련된 필치로 묘사된다. 선이나 색채 모두 선대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장식적이고 세련되었으며 웅장하다.

백제지역의 벽화고분으로는 공주(公州) 송산리(宋山里) 고분군의 전축분인 6호분과 부여(扶餘) 능산리(陵山里) 고분군의 동하총이 있다. 송산리 고분군의 벽화는 동·서·남·북벽에 각각 청룡(靑龍)·백호(白虎)·주작(朱雀)·현무(玄武) 사신도를 그린 것인데 남조 전축분의 구조와 고구려고분 벽화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능산리 동하총은 능산리 고분의 굴식돌방의 구조가 고구려 후기 돌방무덤과 유사할 뿐만 아니라 후기 고분벽화처럼 현실의 네 벽에 사신도를 그리고 천장에는 연화문(蓮花文)과 비운문(飛雲文)을 묘사하였다. 고구려 고분벽화의 영향이라고는 하지만 백제적인 기법이 가미되어 있다. 능산리 동하총의 연화문은 대가야의 중심지인 고령(高靈) 고아동(古衙洞) 고분벽화로 연결된다.

경상북도 북부의 순흥(順興)지방에도 벽화고분이 발견된다. 어숙술간묘(於宿述干墓)와 기미중묘(己未中墓)라고도 하는 읍내리(邑內里) 고분의 벽화가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읍내리 고분의 벽화는 다양한 주제와 내용을 포함하고 있어 흥미를 끈다. 벽화의 소재나 표현 수법은 기본적으로 고구려 고분벽화와 다를 것이 없다. 첨형기(鮎形旗)의 묘사가 조금 특이하고 필치가 약간 어색한 면이 있다 하더라도 역사도, 수문장도, 연지도(蓮池圖), 사신도 등 고구려의 고분벽화와 극히 유사하다. 순흥지역은 역사 지리적으로 대단히 복잡한 지역이다. 그래서 묘의 주인공이 ‘술간’이라는 신라의 관위를 받았음에도 벽화고분의 주인공을 신라인으로 볼 것이냐 고구려인으로 볼 것이냐가 논쟁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참고문헌

  • 漢魏南北朝的墓室壁畵(湯池, 中國美術全集 繪·編12, 1989년)
  • 고구려 고분벽화 연구(全虎兌, 서울大學校國史學科博士學位論文, 1987년)
  • 順興邑內里壁畵古墳(文化財管理局文化財硏究所, 1986년)
  • 韓國 古代壁畵의 思想史的 硏究(李殷昌, 省谷論叢 16, 1985년)
  • 朝鮮半島の壁畵古墳(金基雄, 六興出版, 1980년)
  • 韓國의 壁畵古墳(金元龍, 一志社, 1980년)
  • 高句麗の壁畵古墳(朱榮憲, 學生社, 1972년)